[토요판] 커버스토리
부동산 재벌 김문기
상지대왕 김문기
상지대왕 김문기
1000000000000원. 0이 12개나 붙는 이 금액을 우리는 1조원이라고 부른다. 2016년도 기준 최저임금을 연봉으로 환산하면 1700만원. 1조원은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5882년을 고스란히 모아야 만들 수 있는 돈이다.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이 돈을 마련하는 데 상지대 전 총장인 김문기(84·사진)씨는 54년이 걸렸다. 김씨 일가는 서울 인사동, 숭인동, 서초동, 우이동과 강원 원주시, 강릉시, 평창군 일대 147만여㎡(44만5000여평)의 대지와 전답, 23채의 빌딩과 주택 등을 합쳐 실거래가로 1조원이 넘는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부동산 왕국이다. 상지대 구성원들은 이 왕국이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세워졌다는 의혹을 제기해왔다. 리모델링을 이유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인사동 건물 세입자들을 내몰고 있는 김씨의 부동산 보유 내역을 최초 보도한다. 사진은 김씨 소유 부동산을 표기한 등기부등본(300여장)과 그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빌딩과 대지들이다.
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사진 강재훈 김경호 선임기자 khan@hani.co.kr, 그래픽 송권재 기자 cafe@hani.co.kr

▶ 상지대 구성원들은 전 상지대 총장 김문기씨 일가 소유의 1조원대 부동산 왕국이 ‘권력유착과 사학비리로 쌓아올린 바벨탑’이라고 비판한다. 그가 부동산 재벌이 되는 과정은 대표적 사학비리의 주인공이 돼 가는 과정과 맞물린다. 가구업자 김문기가 부동산 재벌이 되어 재산을 축적하는 과정은 교육과 무관한 그가 정치 연줄을 이용해 대학을 인수하고, 등록금 등 학교 돈을 기반으로 다시 주변 지역 땅을 사들여 치부하는 과정과 고스란히 겹치기 때문이다. 그가 부당하게 불린 부동산을 학교가 돌려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김문기 부동산 축재의 내밀한 과정과 그 내역을 집중 취재했다.
서울 종로2가 사거리에서 인사동 골목길로 100m쯤 올라가면 도로 왼쪽 건물 2층에 노암갤러리(인사동 133번지)가 보인다. 현재 비어 있는 1층 외벽엔 ‘올리브영’이라는 한글 간판을 뗀 흔적이 역력하다. 인사동길 메인 거리에 접한 목 좋은 공간이 집기가 모두 빠진 채 을씨년스럽다.
건물 왼편 좁다란 골목길 안엔 각기 다른 크기와 모양의 오래된 건물들이 이격거리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30m를 들어가자 ‘만석골 닭한마리’ 집이 보인다. 닫힌 가게 앞에서 쓰레기가 나뒹굴고 깜깜한 가게 안에선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옆 건물(인사동 135-1번지) 2층엔 ‘소(笑)국밥’이 있다. 지난달 28일 점심시간을 갓 지난 시간에도 가게는 한산했다. 웃음 짓는 국밥이라는 뜻의 상호지만 대표 진아무개(53)씨는 요즘 통 웃을 일이 없다. 계약 만료 6개월을 앞두고 권리금도 못 받고 가게를 비워줘야 하기 때문이다. “재산이 수천억원이고 명색이 교육자라면서 자신의 건물에서 장사한 상인들 권리금도 못 받게 내쫓는 거 너무하지 않나요? 돈 많은 이들에게 3천만원은 푼돈이겠지만 저희 같은 영세업자에게는 목숨이거든요.” 소고기국밥과 불고기가 주메뉴인 식당을 2015년 1월부터 운영해온 진씨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진씨가 말한 천문학적인 재산을 소유한 ‘명색이 교육자’는 올리브영이 세들었던 건물의 주인이다. 만석골 닭한마리의 임대인이며, 노암갤러리의 ‘노암’이다. 강원도 강릉의 지명 노암을 호로 쓰는 그는 사학비리의 대명사인 전 상지대학교 총장 김문기(84)씨다.
권리금도 못 받고 쫓겨난 인사동 소국밥집과 만석골 닭한마리집. 글·사진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권리금도 못 받고 쫓겨난 인사동 소국밥집과 만석골 닭한마리집. 글·사진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한겨레>가 등기부등본으로 확인한 결과, 김문기와 장남 김성남 상지학원 상임이사는 인사동에만 소국밥집이 있는 상가 등 건물 7채(3993.75㎡, 약 1210평)와 500여평의 건물 부지 및 대지(1743.4㎡, 약 527평)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기준(2016년 2분기)으로 1700억원대에 달한다.
김문기의 축재는 권력의 비호 아래 이뤄졌다는 의혹을 받는다. 아래 흑백 사진은 1968년 김씨(왼쪽)가 서울 인사동에 있던 자신의 ‘빠고다가구’ 공예점 3층에서 이재학 국회부의장(오른쪽 둘째) 등과 함께 재경 강원도민회 현판식을 하는 모습. 김문기 자서전, <상지정신>
김문기의 축재는 권력의 비호 아래 이뤄졌다는 의혹을 받는다. 아래 흑백 사진은 1968년 김씨(왼쪽)가 서울 인사동에 있던 자신의 ‘빠고다가구’ 공예점 3층에서 이재학 국회부의장(오른쪽 둘째) 등과 함께 재경 강원도민회 현판식을 하는 모습. 김문기 자서전, <상지정신>
교직원·학생 내쫓더니 이젠 상인까지
최근 김문기는 자신이 소유한 인사동 133번지와 135~137번지 일대 건물(1936㎡, 약 569평)을 리모델링해 2~3층은 갤러리로 쓰고 1층에는 상가를 세놓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번지수는 나뉘어 있지만 이 건물들은 모두 붙어 있다. 리모델링 계획에 따라 진 대표를 비롯해 이곳에 입주한 상인 10여명도 거리로 나앉을 처지다. 진씨는 지난달 중순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고 새로 들어올 세입자와 계약서를 쓸 예정이었다. 계약 당일 그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 전에 아무 말도 없던 건물주 대리인이 갑자기 연락을 해 ‘계약하지 말라’는 거예요. 건물주가 리모델링을 해 새로 가게를 임대할 계획이니 계약 기간인 올해 말까지만 영업하다 나가라는 거였죠.”
건물주의 반대로 계약이 틀어지자 진씨는 건물주인 김문기 쪽에 인테리어 비용 등을 포함한 권리금(3천만원)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김문기 쪽은 보증금 외에 권리금은 줄 의무가 없다고 통보해 왔다. 완강한 김문기 쪽의 태도에 결국 권리금 3천만원을 날린 그는 이달 초 가게를 접고 서울 서소문에 더 작은 공간으로 옮겨갔다.
진씨만 피해를 입은 건 아니다. 만석골 닭한마리 주인도 이미 올 초 쫓기듯 가게를 비우고 인사동을 떠났다. 100여개의 블로그에서 인사동 대표 맛집으로 소개되는 등 성업했지만 ‘조물주보다 센 건물주’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도 권리금 한 푼 받지 못한 채 건물을 비워야 했다. 인사동을 떠난 뒤 생계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주변 상인들은 전했다.
건물주 리모델링 이유로 인사동의
상인들 권리금 없이 내몰릴 위기
건물주는 사학비리의 원조 김문기
김씨, 인사동에 1700억 부동산 소유
상인들 “갑부에 교육자라더니” 비판
김씨 일가 부동산은 서울·강원 산재
시가로는 1조원대 이를 것으로 추정
부동산 내역 분석된 것은 이번 처음
상지대 구성원들 “학생 등록금 등
학교 돈 횡령으로 마련했을 것” 주장
2014년 8월, 21년 만에 총장으로 상지대에 돌아와 자신을 반대하는 교직원과 학생들을 파면·해임·무기정학으로 학교에서 내몰던 상지대 전 총장 김문기씨가 이번에는 자신이 소유한 건물을 리모델링한다는 이유로 세입자들마저 내쫓고 있다. 파란색 지붕이 문제가 되고 있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 일대 건물.  글·사진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2014년 8월, 21년 만에 총장으로 상지대에 돌아와 자신을 반대하는 교직원과 학생들을 파면·해임·무기정학으로 학교에서 내몰던 상지대 전 총장 김문기씨가 이번에는 자신이 소유한 건물을 리모델링한다는 이유로 세입자들마저 내쫓고 있다. 파란색 지붕이 문제가 되고 있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 일대 건물. 글·사진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골목 끝에 자리한 ‘ㅅ한식집’도 사정은 비슷하다. 8월 계약 만료를 앞두고 권리금 5천만원을 떼일 위기에 처했다. 점주 ㄴ씨는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 있어 이야기할 게 없다”며 말을 아꼈다.
‘저항’하고 있는 세입자도 있다. 골목 초입에서 어머니와 함께 콜라텍(2층)과 노래방(3층)을 운영하던 ㄷ씨는 김문기를 상대로 올 초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김문기의 손을 들어줬다.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상가법)상 건물을 재건축하거나 상가가 재개발 지역에 포함될 경우에는 임대인이 권리금 회수를 보장해 줄 필요가 없다는 조항 때문이었다. 지난해 개정된 상가법은 법안의 모호한 표현, 악용될 수 있는 예외조항, 적용 제외 대상 기준 등으로 법의 ‘보호지대’보다 ‘사각지대’가 더 넓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ㄷ씨는 결국 항소를 포기하고 20년 동안 운영하던 정든 가게를 정리하기로 했다. 권리금만 10억원 손해봤다는 그의 마지막 희망은 새로 들어설 건물에 남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임대를 얻는 것이다. 그의 바람은 이뤄질 수 있을까. 비슷한 처지에 놓인 한 상인은 “새 건물에 우선 임대해준다는 것도 세입자들의 단결을 막기 위해 흘린 말일 뿐 아무런 구속력이 없지 않냐”고 걱정했다.
15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김문기는 “인사동은 내가 문화사업을 하려고 (상인들을) 다 내보내려고 한다”고 했다. “오래전부터 이야기해서 다 계약서를 쓴 사항이라 문제 될 게 없다”고도 했다. 소국밥 대표 진씨의 말은 다르다. “계약할 때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알았다면 곧 비워줘야 할 가게에 누가 권리금을 대가면서 장사를 하겠나.”
권력유착과 비리로 쌓아올린 바벨탑
인사동에서 ‘부동산 거물’ 김문기의 위세는 대단해 보였다. 인사동 부동산업자들은 하나같이 그를 두고 말하기조차 부담스러워했다. 상지대의 한 관계자는 “재산 관리인만 10명이 넘는 것으로 안다”며 “김문기 본인도 자기 재산이 얼마인지 모를 것”이라고 했다.
실제 김문기의 부동산은 인사동 외에도 종로구 숭인동, 서초구 서초동, 강원도 원주시, 강릉시 등에 산재해 있다. <한겨레>는 김문기 일가 소유 부동산(150여 물건)의 등기부등본을 일일이 확인했다. 등기부등본 분량만 300여 쪽에 달했다.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김문기 일가의 부동산 규모는 대지와 전답(논밭) 147만여㎡(44만5천여평)와 23채의 빌딩·주택을 합쳐 실거래가로 최소 1조원, 많게는 2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가히 ‘부동산 왕국’이다. 그의 부동산 소유 현황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4년 10월 정의당 박원석 의원이 낸 ‘부동산 100분위 현황보고서’를 보면, 대한민국 부동산 부자 상위 10명이 214만3790㎡(64만9633평)의 토지를 가지고 있다. 산술적으로 1명당 평균 소유 토지가 21만4천㎡라고 할 때, 김문기 일가의 부동산은 7배나 많다. 상위 10명과 견줘도 톱클래스에 해당된다. 개인이 소유한 부동산 규모로 김문기를 따라올 사람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물론 천문학적 규모의 부동산 부자란 사실만으로 김문기 일가를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의 ‘왕국’이 어떻게 세워졌는지가 관건이다. 그의 재산 축적 과정을 잘 아는 상지대 관계자들은 그의 왕국이 ‘권력유착과 비리로 쌓아올린 바벨탑’이라고 비판한다. 그가 부동산 재벌이 되는 과정은 대표적 사학비리의 주인공이 돼 가는 과정과 맞물린다. 교육과 무관했던 가구업자가 정치 연줄을 이용해 대학을 인수한 뒤 학교에서 빼낸 돈으로 땅을 넓히고 건물을 높여온 경로와 고스란히 겹치기 때문이다.
상지학원에서 일했던 한 직원은 “김문기씨의 재산 가운데 절반 이상은 상지대 이사장을 지낼 때 학생들 등록금으로 산 부동산들”이라고 증언했다. “특히 상지대 앞인 원주시 우산동 일대 6만여평은 학교 부지 명목으로 매입한 뒤 지금도 본인 소유로 가지고 있는 땅들이다.” 그가 학교 교비를 횡령해 부동산 투기를 일삼았다는 사실은 1993년 검찰 수사 당시에도 확인된 사실이다.
실제 등기부등본을 보면, 김문기 일가는 크게 서울 강북(인사·숭인·우이동)과 강남(서초·대치동), 강원도 원주·강릉·횡성 일대에 부동산을 소유했거나 소유하고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 집중적으로 매입한 강북 지역의 일부 부동산을 제외(50건)하고 소유 부동산의 대부분(100건)은 김문기가 상지대 이사장에 오른 1974년부터 사학비리로 구속된 1993년까지 매입한 것들이다.
그가 부동산을 사들이기 시작한 시점은 1960년대 초반부터다. 1932년 강원도 강릉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김문기는 14살 때 ‘대패 하나’ 달랑 쥐고 상경해 서울 인사동의 ‘빠고다가구’ 종업원으로 사회에 나왔다. 22살(1954년)에 종업원으로 일하던 가구점을 인수해 사장이 된 뒤 1962년부터 인사동과 숭인동 일대의 땅을 한 필지씩 꾸준히 사들였다. 특히 자택이 위치한 숭인동 일대엔 일가 소유의 건물과 대지 등이 밀집해 있다.
지난 6일 오후 자택 부근에서 만난 한 주민은 “숭인동에서 김문기씨 모르면 간첩이다. 어마어마한 부자로 알고 있는데 왜 아직 이곳에 사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차 한 대 겨우 들어갈 골목의 맨 끝에 위치한 그의 집은 267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지하 1층에 지상 2층의 양옥이다. 창고 한 채가 부속건물로 딸려 있다. 성공의 발판이 된 가구공장과 인접한 그의 자택은 부동산 갑부의 집치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김문기는 자서전 <상지정신>에서 ‘지금도 오래된 숭인동 집에 살면서 해장국을 먹으면 국물까지 다 먹는 검소한 생활을 한다’고 밝힌 바 있다.
1960년대 후반 김문기는 당시 종로가 지역구이던 민관식 의원의 선거운동을 도운 것을 계기로 정부에 가구를 납품하면서 재력을 키운다. 1967년에서 1970년 사이 그는 인사동, 숭인동 땅 외에 도봉구(현 강북구) 우이동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에도 눈길을 돌렸다. 등기부등본엔 그가 우이동 226번지와 228~233번지 대지 8727㎡(2644평)와 길 건너 산8-15번지의 임야 4만5045㎡(1만3650평) 등 1만6천여평의 땅을 1967년 9월14일에 집중 매입한 것으로 나온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967년 12월4일, 서울시는 40만평에 달하는 우이동유원지 개발사업을 발표한다. 이후 거짓말처럼 김씨가 매입한 터에 우이동유원지가 들어섰다. 개발정보를 미리 알지 못하면 하기 어려운 전형적인 부동산 투기였다.
“월드컵 경기장 55개 규모의 땅”
김문기는 1972년과 1981년 임야와 대지를 추가 매입해 지금도 우이동 일대 6만2932㎡(1만9071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인근 임야와 대지의 가격은 올 2분기 국토부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200억원대에 이른다. 1971년 그린벨트로 지정됐다 1998년 취락지구로 변경된 이곳에 그는 5개 음식점을 임대해주고 있다. 도봉산 기슭에 물 맑고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한 이곳은 1993년 부정입학 관련 금품수수, 교비 횡령, 부동산 투기 등의 혐의로 구속 당시 그가 임대해준 무허가 음식점이 난립해 자연훼손 논란이 일기도 했다.
김문기는 유신 시절 서울 종로구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었다. 1974년 의원들과 전국사업 시찰을 하는 모습. 김문기 자서전, <상지정신>
김문기는 유신 시절 서울 종로구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었다. 1974년 의원들과 전국사업 시찰을 하는 모습. 김문기 자서전, <상지정신>
1972년 유신 선포 뒤 김문기는 종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당선된다.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민관식씨의 지원으로 그는 강원도 원주대학 임시이사로 파견된다. 교육과는 아무 관련이 없던 그가 갑자기 대학의 관선이사가 되면서 상지대학 사학비리의 지난한 서막이 열리고 만다. 1974년 1월 원주대학 설립자인 원홍묵씨로부터 대학을 인수한 그는 상지대로 이름을 바꿔 이사장에 올랐다. 그의 나이 42살 때였다.
김문기는 여러 차례 자신이 설립자라고 주장해 왔지만 지난 2004년 대법원은 상지대 법인은 원홍목씨가 설립했고 운영권만 이전됐을 뿐이라고 판결했다. 원씨는 문교부 장관이던 민관식의 압박 속에서 원주대 운영권을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김문기에게 넘겼다고 주장해 왔다.
상지대 이사장에 오른 1974년부터 구속된 1993년까지 2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김문기의 사업체는 강원상호신용금고와 가구점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무슨 돈으로 100건에 이르는 부동산을 매입했을까. 그의 부동산 매입 자금 출처를 가늠케 하는 사례들이 있다.
교육부는 1992년 10월부터 1993년 상반기까지 상지대에 대한 특별감사를 벌였다.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 지급 규모를 축소한 점, 1990~1992년 사이에만 1억2천만원 상당의 수의계약이 이뤄진 점, 실험실습비와 장학금을 유용한 점 등이 감사에서 적발됐다. 특히 도서구입비를 건축비용으로 유용한 뒤 청계천 상가에서 헌책을 t단위로 사다가 도서관에 비치한 일이나 당시 도서관에 정기간행물이 하나도 없던 일화는 유명하다.
김문기는 상지대 인수 뒤 강사들의 월급을 35만원만 지급했다. 기존 교수들을 모두 해고한 뒤 채용한 교수들을 상지대와 원주실업전문대에 동시 등록해 강의를 배정한 뒤 월급은 한 군데서만 주기도 했다. 인건비를 철저하게 줄인 덕분에 당시 다른 사립대의 경우 70%까지 이르렀던 인건비 비율을 상지대는 40%로 낮출 수 있었다. 1989년부터는 신규 채용 교수에게 봉급 포기 각서, 날짜를 적지 않은 사직서, 이사장 충성 맹세 서약 따위를 요구하는 전횡을 일삼았다.
1987년 당시 민자당 국회의원으로 노태우 당 총재와 환담하는 모습. 김문기 자서전, <상지정신>
1987년 당시 민자당 국회의원으로 노태우 당 총재와 환담하는 모습. 김문기 자서전, <상지정신>
학교 돈을 빼가면서도 재단 전입금은 나 몰라라 하는 사학비리의 전형도 이때 처음 등장했다. 1990년에 상지학원이 상지대에 준 재단 전입금은 3천원이었다. 1992년에는 아예 한 푼도 없었다. 입학을 대가로 돈을 받거나, 횡령한 교비로 부동산 투기를 하고, 비리를 고발한 교직원을 납치하거나 부당 해고하는 등 ‘사학비리의 백화점’을 방불케 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런 가공할 비리는 족벌사학 체제를 구축했기에 가능했다. 김문기는 상지대 운영권을 ‘인수’한 뒤 아내(이사), 사위(총장 비서실장), 매제(전문대학장), 8촌(교무과장·한방병원 총무과장), 문중 인사(회계·서무과장)들로 대학 재정을 다루는 회계·운영 부분 요직을 장악했다. 이후 자신의 임의대로 교비를 사용하고 교수 채용 등에서 전권을 행사했다. 당시 문교부는 그를 제어할 의지가 없었다. 1978년부터 무려 15년 동안 김문기는 이사회를 한 차례도 열지 않았다.
상지대 관계자들은 그 시기 김문기가 남다른 이재(?)를 보였다고 꼬집는다. 한 교수는 “1978년에 자신 소유인 신생 강원상호저축은행에 학생들 등록금 수십억원을 예치한 뒤 이자는 0.08%밖에 안 준 걸로 안다. 당시 시중은행도 그랬지만 저축은행은 불안정성 때문에 예금 금리가 더 높았는데 거의 공짜로 돈놀이를 한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그는 본격적으로 부동산 투기에 뛰어들었다. 상지대 주변인 원주시 우산동 일대의 25만여평의 땅을 임야, 논밭, 대지를 가리지 않고 자신과 가족 등의 이름으로 사들였다. 그가 19년 동안 매입한 땅들이 현재 상지대를 포위(그래픽 참조)하고 있다. 대학에서 쫓겨난 뒤 그는 학교와 인접한 자신 소유 건물 여러 곳에 현 이사진을 비난하고 자신의 복귀를 요구하는 알림막을 걸기도 했다. 상지대 구성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김씨가 소유한 원주시 일대 25만평은 국제 규격 월드컵 경기장 55개를 만들 규모다. 원주에 있는 가장 작은 동 면적과 비슷하니 말 다 하지 않았나. 원주 시민들 사이에 ‘김씨 땅을 밟지 않고서는 원주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얘긴 흔한 농담이다.”
실제 150여건의 물건지 확인해보니
김씨가 이사장 재직하던 74~93년
매입한 부동산 그중 100건에 달해
당시 교육부 감사, 검찰 수사에서도
등록금으로 한 부동산 투기 적발돼
부동산 왕국 일궜으나 93년에 구속
그해엔 집에 강도 들어 4억원 도난
피해액 축소 신고와 의적 논란 일어
용의자들 시내에 훔친 수표 뿌리며
“강도 정치인 뽑지 말라” 편지 남겨
1980년 강원도민회 정기총회에 참석한 최규하 대통령(사진 왼쪽)과 김문기씨. 김문기 자서전, <상지정신>
1980년 강원도민회 정기총회에 참석한 최규하 대통령(사진 왼쪽)과 김문기씨. 김문기 자서전, <상지정신>
93년 김씨 집 턴 강도 ‘의적’ 논란 일어
김문기 쪽은 “당시 농지법상 학교법인이 농지를 살 수가 없어서 학교용지 목적이지만 부득불 개인 명의로 샀다”고 해명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김문기 일가는 이 땅을 상지대에 넘겨주지 않고 있다. 김문기에게 상지대(尙志大)는 땅을 숭상한다는 의미에서 상지대(尙地大)인지도 모른다.
김문기의 부동산 리스트에서 서울 강남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75년부터 강남으로 진출해 3년간 서초구 서초동 2곳, 강남구 대치동 2곳의 땅 5847㎡(1772평)를 잇달아 매입했다. 강남개발 특수를 노린 투기였다. 특히 1977년 매입한 대치동(890-6) 땅 187평은 2006년 4월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에게 되팔았다. 정확한 매각대금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부 사정을 아는 한 인사는 “당시 1천억원 정도에 매매가 이뤄진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 전 부회장은 이듬해 이곳에 19층 규모의 건물을 올려 자신과 아내의 성을 따 엘앤비(L&B) 빌딩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건물은 현재 3천억원대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 1월 김문기는 대치동(889-41) 땅 997평을 352억7600만원을 받고 ㅅ기업에 매각하기도 했다.
1980년 민정당 창당 발기인이 된 김문기는 전국구 예비후보 1번으로 제12대 국회 임기 만료 6개월을 앞둔 1987년 국회의원 배지를 단다. 그는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대관령축산고등학교를 인수하고 아들 성남씨 이름으로 이 일대 땅을 사들였다. 땅을 사는 과정에서 소유권 이전이 불가능한 농지는 동서 이름으로 사들이거나 근저당을 설정하는 수법도 썼다.
김문기 일가가 소유한 주요 부동산(*누르면 확대됩니다.)
김문기 일가가 소유한 주요 부동산(*누르면 확대됩니다.)
그 결과 1993년 3선 국회의원이었던 그는 재산신고 당시 누락 의혹이 일었음에도 185억여원을 신고해 집권당 의원 가운데 3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즈음 김문기의 재력은 이건희 삼성 회장보다 종합토지세를 더 많이 냈다는 말도 나올 정도로 대단했다. 그는 언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고 교육부 감사와 검찰 수사를 잇달아 받았다. 결국 문민정부 ‘사정 1호’가 된 그는 3월 구속돼 1년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천문학적인 재산을 챙긴 대가치곤 형량이 너무 적었다는 비난이 일었다. 당시 교육부 고위 간부가 자신의 땅을 김문기한테 팔아넘겨 ‘변칙 뇌물’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를 감옥에 가둔 부동산 투기는 그에게 또 다른 화를 불렀다. 구속 직후인 같은 해 7월30일, 그의 숭인동 자택에 3인조 강도가 들어 4억6천만원 상당의 수표와 달러가 든 가방을 훔쳐가는 일이 발생했다. 도난당한 수표는 재산공개 당시 그의 신고 내역에서 누락된 돈이었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경찰은 수표가 비교적 추적이 어려운 100만원권과 10만원이라는 점 등으로 미뤄 돈의 출처를 밝힐 수 없는 사연이 있을 것으로 의심했다. 특히 그의 가족들이 경찰 신고 피해액을 1천여만원으로 줄이고 4억6천만원이 든 서류가방의 내용물에 대해 숨긴 점도 의혹을 뒷받침했다.
범인들의 행동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범인들은 털어간 금품 중 2억5천만원(100만원권 자기앞수표 250장)을 정치인 등 사회지배층을 비난하는 메모와 함께 서울시내 한 은행 화단 앞에 뒀다. 대학노트 3장에 쓰인 메모에는 “일부 지도층과 일부 정치 강도 왜 부끄러움이 없는가” “강도 강도 하면 뭘 하나 나처럼 강도를 잡아야지” “국민 여러분 앞으로는 강도에게 표를 찍지 말자”는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앞서 범인들이 범행 직후부터 동대문 평화시장과 이태원, 영등포역 등 서울 시내를 돌며 100만원권 수표 82장을 뿌리고 다녀 ‘의적 논란’이 일었던 터였다. 수사를 맡은 동대문경찰서는 범인의 편지가 문장이 조잡하고 맞춤법도 여러 군데 틀린 사실에 비춰 용의자들의 학력 수준이 낮을 것으로 보고 부동산 투기에 따른 원한관계에서 비롯된 범행에 무게를 뒀다. 9월엔 공범인 것처럼 꾸며 수차례 협박 전화를 걸어 거액을 요구한 40대 남성이 검거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미궁에 빠진 수사는 한 편의 촌극이 돼 갔다. 범행 4개월이 되도록 범인의 윤곽조차 잡지 못한 경찰은 서울 미아리의 유명 점쟁이를 찾아가 범인의 행방을 물었다. 1993년 11월18일치 <경향신문>은 “수사본부 쪽은 최근 처녀보살로 이름난 미아리의 모씨를 찾아가 ‘현재 범인이 동쪽에 숨어 있다’ ‘내년 1월이면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 것 같다’라는 말을 듣고 수사본부를 재정비하는 등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과학수사를 외쳐온 경찰이 점쟁이의 말을 믿고 수사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그러나 온갖 수단을 동원해도 묘책이 없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점쟁이를 찾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동정”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그해 12월 용의자 3명을 수배했다는 보도 이후 ‘김문기 집 강도 사건’은 신문 지면에서 자취를 감췄다.
“김씨 재산 학교 환원 운동 펼칠 것”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살아왔습니다. (…) 나는 떳떳합니다.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기에 당당합니다. 마음에 거리끼는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김문기는 자서전 <상지정신>에 썼다. 그러나 부끄러울 것 없다던 그는 총장으로 상지대에 복귀한 지 1년도 안 된 지난해 3월 교육용 기본재산 부당 관리, 계약직원 부당 채용 등의 비리 행위로 교육부 감사에서 적발돼 해임됐다. 지금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기념관이 있고 <상지정신>이 학생들 인성교육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상지대에 재복귀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대학 이사회에는 장남이자 상임이사인 김성남씨와 측근들이 포진해 있다.
학교라는 돈줄이 사라진 탓일까. 구속 이후 학교에서 퇴출된 1993년 이래 그의 추가 부동산 매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제 그의 ‘부동산 축재기’는 새 국면을 맞고 있다. 상지대의 한 교수는 말했다.
“김문기의 복귀를 막는 일도 중요하지만 상지대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은 학교 돈으로 산 김씨 일가의 부동산을 학교가 돌려받는 일이다. 대학구조개혁 평가에서 ‘D-’ 등급을 받고 지방대학 특성화 사업이 취소되는 등 학교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는데 학교 돈을 빼돌린 김씨 일가는 지금도 돈방석 위에서 살고 있다. 앞으로 김씨 일가의 부정한 재산에 대한 환수 운동을 학내 구성원들과 시민사회와 더불어서 진행할 것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김문기 전 상지대 총장 반론
“땅 사는 데 학교 돈 한 푼도 안 썼다”
<한겨레>는 15일 두 차례의 전화 통화와 대면 인터뷰를 통해 김문기 전 상지대 총장의 해명을 들었다. 서울 서초동의 본인 소유 빌딩(180억 상당)에서 만난 김문기는 고희를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력이 좋아 보였다. 그는 자신을 향해 제기된 모든 의혹을 부인했다. 법원 판결과 검찰 수사 결과에 대해서도 “날조”와 “표적수사”라는 표현을 써가며 비난했다.
-1조원에 가까운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데.
“내가 사업으로 번 돈을 다 쏟아부어 상지대를 설립한 사람이다. 그 전에 가구업을 하면서도 큰돈을 벌었다.”
-2004년 대법원은 상지대의 설립자가 원홍목씨라고 판결했다.
“그건 나를 음해하는 사람들이 날조해서 만들어낸 결과다.”
-상지대 인수 뒤 원주 등의 땅을 집중 매입했다. 학교 구성원들은 학생 등록금 등 학교 돈으로 어마어마한 부동산을 매입했다고 주장한다.
“(갑자기 언성이 높아지면서) 내가 내 돈으로 산 땅 10만평을 상지대에 기부한 사람이다. 나는 거듭 말하지만 학교 돈은 한 푼도 가져다 쓴 게 없다.”
-이와 관련해 업무상 횡령과 배임으로 1993년에 구속돼 1년6개월의 실형을 살지 않았나?
“다 지난 일을 왜 다시 꺼내나? 다른 대학보다 비리 수준이 낮았는데 ’문민정부 사정 1호’로 지목돼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거다.”
-원주시 우산동 일대 25만평의 땅은 왜 반납하지 않나?
“(몹시 흥분하면서) 학교에서 쫓겨났는데 그걸 내가 왜 반납하나.”
-그렇게 학교를 사랑했다면 2014년 총장으로 학교에 돌아왔을 때 상지대 일대 땅을 반납했어야 하지 않나?
“총장으로 돌아와서 6개월 만에 다시 쫓겨났다. 이제 학교에 돌아갈 생각이 없다.”
-이사회를 장악한 장남과 측근들이 복귀를 돕고 있지 않나?
“학교에 돌아가면 뭐하나? 이렇게 있는 게 편하지.”
김문기의 사무실 벽엔 2012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 후보와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는 전두환·노태우와 찍은 사진도 자서전 <상지정신>에 실었다.
오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