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근세사 최초의 군사정변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일으킨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다.
이집트 원정군 사령관인 나폴레옹은 명령을 어기고 회군한 뒤 국내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던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했다. 나폴레옹은 자유 평등의 프랑스 혁명정신을 전제군주 정치의 유럽에 전파하지만, 스스로는 황제에 올라 독재를 완성했다. 나폴레옹을 흠모해 3번 교향곡에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달았던 베토벤은 황제 즉위 소식을 듣고 “그도 속물이었군”이라며 ‘영웅’으로 바꿨다고 한다. 쿠데타는 ‘정부를 뒤엎는다’는 프랑스어로 나폴레옹의 쿠데타 이후 군사정변을 통칭하는 표현이 됐다.
▦ 중국 공산당의 아버지 마오쩌둥은 1927년 난창 봉기 실패 후 “모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현대의 쿠데타는 ‘총’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집권세력의 체포ㆍ구금, 공항 등 교통시설 장악뿐만 아니라 언론 통제가 필수적이다. 우리의 쿠데타 역사에서 박정희, 전두환 군부세력이 방송국 장악에 나선 까닭이다. 쿠데타 목적과 의미를 포장하고, 저항세력은 물론이고 국민을 굴복, 설득시키는 게 정권 찬탈의 핵심 요소가 됐다.
▦ 터키의 쿠데타 실패 과정을 보면 방송 장악도 구시대적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쿠데타 세력은 방송을 통제하면서 쿠데타 성공을 알렸지만, “국민들은 거리로 나가 그들에게 답을 해달라”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호소는 소셜미디어네트워크(SNS)를 타고 급속도로 번졌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의 저항으로 터키 사상 5번째 쿠데타 시도는 여섯 시간 만에 좌절됐다. ‘내 손안의 컴퓨터’인 스마트폰 시대에 언론 장악은 불가능하다는 게 입증됐다.
▦ 쿠데타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피의 숙청’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터키의 쿠데타 실패 하루 만에 2,700여명의 쿠데타세력이 체포되고, 법관 3,000여명이 해임됐다. 반정부인사 탄압과 언론통제에 앞장서온 에르도안의 독재가 쿠데타 시도를 빌미로 공고해질 것이란 우려가 높다. 시민은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지켜냈지만, 민주주의 후퇴를 가져오는 아이러니를 보게 됐다. ‘승자의 관용과 패자의 승복’이 덕목인 평화적 정권교체와 민주적 선거과정의 중요성은 터키 사례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된다.
/정진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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