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의식을 지배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언어로 구성됩니다. 누군가의 생각이 궁금하다면 그가 사용하는 말과 글, 단어와 표현을 자세히 살펴보면 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21일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어 사드(THAD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국민들의 협조를 당부했습니다. 사드 배치를 결정한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 중에서 유난히 두드러져 보이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국가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대해서 우리가 분열하고, 사회 혼란이 가중된다면 그것이 바로 북한이 원하는 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에 불순세력들이 가담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철저히 가려내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21일 10시30분 탄도미사일 발사 등 최근 북한의 도발 위협과 관련한 안보상황 점검을 위해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청와대제공
‘불순세력’ 처음 언급한 박 대통령, 왜?
여기서 ‘불순세력’이라는 단어가 눈에 걸렸습니다. 제 기억에 박근혜 대통령이 ‘불순세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처음인 것 같았습니다. 청와대 누리집의 대통령 연설, 보도자료, 브리핑 코너에서 ‘불순세력’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없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월16일 국회 연설에서 북한의 도발을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혼란’ ‘남남갈등’ ‘국론분열’ ‘선전선동’ ‘북풍의혹’ ‘음모론’ ‘갈등과 분열’ 등의 단어를 썼습니다. 그러나 ‘불순세력’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사드 배치 결정으로 인한 국내 혼란을 박근혜 대통령이 매우 절박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불순세력은 누구일까요? 사드 배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성주군민들일까요? 친여 보수성향 언론에서 말하는 ‘외부세력’일까요? 아니면 사드 배치 결정에 반대하는 야당일까요? 언론일까요?
박근혜 대통령의 논리대로라면 사드 배치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은 불순세력이거나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런가요?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지금 얼마나 말이 안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가 7월14일치 <경향신문>에 ‘찬반의 굴레를 벗는 정치’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이런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의할 것이 있다. 샤츠 슈나이더는 민주주의를 ‘스스로가 옳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체제’라고 정의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 정의는 찬반의 언어를 사용하되, 찬반 그 자체를 옳음으로 가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서로 다른 관점과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갈등하고 경쟁하고 협력하는 세계이다. 이 때문에 옳고 그름과 맞고 틀림과 좋고 나쁨이 대체로 분명치 않다.”
저는 박근혜 대통령의 가장 큰 문제가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은 옳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은 그르다는 ‘배타적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고는 민주주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독선’입니다. ‘같음과 다름’, ‘옳음과 그름’을 구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입니다.
“모든 문제에 불순세력들이 가담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철저히 가려내야 합니다.”
아무리 다시 읽어봐도 위험한 발상입니다. 사드에 찬성하면 순수한 것이고 사드에 반대하면 불순하다는 것일까요? 도대체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박정희·전두환이 사용하던 용어
과거 불순세력이라는 말을 쓰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입니다. ‘박정희’와 ‘불순세력’으로 뉴스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1979년 8월16일 <경향신문> 1면 ‘노사분규 선동·사회불안 조성 불순세력 철저 조사하라’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6일 근래 일부 종교를 빙자한 불순단체와 세력이 산업체와 노동조합에 침투하여 노사분규를 선동하고 사회불안을 조성하고 있는데 대해 그 실태를 전반적으로 철저히 조사 파악해 보고하라고 김치열 법무부 장관에게 지시했다고 임방현 청와대 대변인이 발표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관계장관들로부터 최근의 YH무역 노사분규와 그것이 야기한 소요사태에 관해 보고를 받고 이같이 지시하면서 동시에 농촌에 있어서도 유사한 단체와 세력이 농민들을 선동하여 농촌경제와 사회안정에 위해를 끼치고 있는 사례에 대해서도 그 실태를 아울러 조사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1974년 4월6일 <경향신문> 1면 ‘학원내 불순 근절 긴급조치 4호 선포의 배경과 의의’라는 기사입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지난 3일 담화문에서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조종하에 그들과 결탁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이른바 그들의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으레 조직하는 소위 통일전선의 초기단계적 지하조직을 우리 사회 일각에 형성, 반국가적 불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확증을 포착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번에는 ‘전두환’과 ‘불순세력’으로 뉴스 검색을 해봤습니다. 1986년 11월5일 <동아일보> 1면 기사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4일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북한은 서울올림픽과 평화적 정부이양을 둘러싸고 우리 내부에 취약점이 표면화될 것을 예상, 도발책동을 획책할 가능성이 증대되고 있다”면서 “정치 사회적 안정유지와 국민의 단합에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전 대통령은 이어 “이러한 국내외 상황의 어려움 속에서 일부 불순세력이 폭력수단으로 사회혼란을 획책하고 있는 것은 경계할 일”이라고 말하고 “공직자는 물론 전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의 차원에서 힘을 합쳐 철저히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5년 7월20일 <동아일보> 1면 ‘학원소요 불순세력 엄단’ 기사입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일 “정부는 2학기에도 학원의 자율화는 계속 보장하지만 학원을 국가전복의 기지로 삼으려는 학원소요는 용납하지 않겠다”면서 “학원 노사 문제를 야기시키는 불순세력이 있다면 법에 따라 엄하게 다스릴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쿠데타 집권 독재자들 닮아가는 박 대통령
어떻게 보셨습니까?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용한 ‘불순세력’이라는 단어와 박근혜 대통령이 사용한 ‘불순세력’이라는 단어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과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불순세력이나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는 세력으로 몰아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걱정입니다. 저는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들입니다. 특히 국회의원을 한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5선 국회의원 출신의 정치인입니다. 오랫동안 정당과 국회에서 민주주의 정치를 체험하고 학습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뒤에 달라진 것 같습니다.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독재자들의 언어과 사고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불순세력’ 발언을 계기로 몇몇 언론은 대대적인 공안정국이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될까요? 그렇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 전두환의 언어는 차용했지만 그들의 행동까지 따라서 하지는 않을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믿고 싶습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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