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의 야누스적인 속성
최근 들어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파워의 쇠락에 주목하면서 달러의 "과도한 특권(exorbitant privilege)"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 더 이상 미국이 세계 경제의 최강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달러의 국제 기축 통화 지위를 활용해 부당 이익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세계 경제에 대한 지배력의 약화와 세계 경제의 다극화는 "달러의 특이한 지배력과 불편한 긴장 관계"를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달러의 위기, 혹은 세계 헤게모니로서 미국의 몰락을 점치는 목소리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따금 달러화 표시 유동성을 확보하는 데 혈안인 모습이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 직후의 모습이 단적인 예다. 당시 위기의 진원은 미국이었지만, 정작 그 여파로 달러화 유동성이 고갈되면서 세계 도처에서 달러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가열되었다. 그 결과 달러는 초강세를 보였다. 원/달러 환율이 외환 위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치솟았던 것도 그 때였다. 지금도 사정은 유사하다. 유럽 재정 위기가 달러화 유동성의 경색 우려로 번지면서 원/달러 환율이 폭등하고 세계 경제가 또 다시 극심한 몸살을 앓은 것이다.
마치 야누스와 같은 달러의 두 얼굴이다. 국제 경제학계의 대가 배리 아이켄그린(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교수)이 <달러 제국의 몰락(Exorbitant Privilege)>(김태훈 옮김, 북하이브 펴냄)에서 조망하고 있는 달러의 미래 역시 바로 이 점에 천착하고 있다. 그는 "달러의 몰락에 대한 예측과 현실 사이에 격차"가 크다고 지적하면서, "달러를 둘러싼 통념들은 대부분 틀렸다"고 역설한다.
아이켄그린이 먼저 환기시키는 '환율의 경제학'의 제1원리는 "환율과 관련된 문제는 언제나 상대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두 통화의 교환 비율을 의미하는 환율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제 아무리 특정한 통화의 가치가 하락하려고 해도 그 짝이 되는 다른 통화의 가치가 오르지 않는 이상, 환율이 변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달러가 제 아무리 문제가 많다고 해도, 달러 이외 다른 통화 역시 문제가 많"은 이상 달러의 가치가 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다른 통화의 문제가 더 크다면 달러의 가치가 오를 수도 있다.
세계 금융 위기, 또 최근의 유럽 재정 위기 과정에서 나타난 달러의 강세는 바로 이 때문이다.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이른바 '시스템 안정'을 위해서는 사실상의 기축 통화인 달러의 원활한 유통이 관건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달러를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고, 그 결과 달러의 가치가 상승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달리 의존할 수 있는 대안 통화가 없다는 점도 달러 강세에 일조했다. 이에 아이켄그린은 지난 1970년대 달러의 위기가 언급되기 시작한 이후 "달러는 부전승으로 국제 통화의 최강자 자리를 지켜 왔다"고 꼬집는다.
달러 중심 국제 통화 체제의 내재적 긴장
그렇지만 달러의 자체 하중이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세계 금융 위기의 주범으로서 달러 중심 국제 통화 체제의 불안정성과 불공정성에 주목하는 시각이 늘고 있다.
실제로 국제 자금흐름 교란의 원천으로 지목되는 '달러 리사이클링(dollar recycling)'도 이 때문이다. 달러가 기축 통화로서 군림하는 이상, 나머지 주변국의 위기 예방을 위해서는 준비 자산으로서 달러 비축이 절실했던 탓이다. 또 스탠더드 앤 푸어스(S&P)의 미국 신용 등급 강등에서 드러났듯이, 미국의 재정 부실 역시 심각한 문제다. 금과 같은 상품 통화와 달리 법화(fiat money) 체제에서는 정부의 공신력이 관건인데, 재정 부실로 인해 이런 신뢰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세계 금융 위기, 또 최근 미국의 재정 불안 역시 모두 역설적으로 달러화 강세로 귀착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만큼 달러 중심 국제 통화 체제 자체의 내재적인 긴장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달러의 위기가 목전에 다가섰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켄그린은 19세기 후반 국제 통화 체제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달러 중심 국제 통화 체제의 이러한 문제점을 파헤치고 있다. 여기서 그는 통화의 세계 지배력이 결국 해당국 경제와 재정의 기초 체력에 의존한다는 데 주목한다. 따라서 달러의 위기는 미국의 기초 체력이 그만큼 약화된 탓이며, 달러의 운명 역시 "미국 경제가 어떻게 굴러갈 것인지, 금융 위기로 이어진 심각한 정책적 실패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여부"에 의존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국제 통화 체제의 향방과 관련해 세계 경제의 다극화에 부응하는 통화 체제의 다극화에 초점을 맞춘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달러화 일극 지배 체제는 역사적으로 볼 때 극히 이례적인 사례다. 오히려 복수 통화 체제가 일반적이다. 여기서 아이켄그린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유로와 위안이다. 사실 유로야말로 달러화 일극 국제 통화 체제에서 비롯된 제약이나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보완 수단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유럽 재정 위기의 영향으로 유로가 와해 지경에 내몰리고 있다. 하지만 역내 통합을 위한 강력한 정치적 의지를 감안할 때 유로의 붕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위안도 당장에는 자본 통제 등의 영향으로 국제적 활용도가 떨어지지만, 중국의 막강한 경제력과 위안화 국제화 노력을 감안할 때 국제 통화로의 성장도 마냥 미래의 일로 치부하기 어렵다. 실제로 중국은 점진적으로나마 위안의 결제 통화 역할을 확대시켜 가고 있고, 상하이를 중심으로 국제금융센터 육성 계획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아이켄그린은 20세기 초 미국의 달러가 국제 통화로 올라서던 경험을 환기시킨다. "달러가 국제 무대에 데뷔한 지 2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지배적인 통화로 자리매김을 했다"는 것이다.
한편, 달러, 유로, 위안 등 "세 개의 국제 통화를 수용할 여지가 있다는 것은 곧 더 많은 국제 통화를 수용할 여지가 있다는 뜻도 된다"고 덧붙인다. 여기서 그는 인구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인도의 루피와 브라질의 헤알 역시 국제 통화의 잠재 후보국에 올린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앞으로 국제 통화를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하지만 아이켄그린은 이 경쟁이 "죽음의 경주"는 아니라고 설명한다. 국제 통화의 자리가 하나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달러의 몰락 혹은 붕괴 가능성에 대해서도 거리를 둔다.
항간에서 거론되는 달러의 붕괴 시나리오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미국과 중국 간의 정치적 갈등이다. 하지만 경제적 상호 의존성이나 달러 위주의 막대한 외환 보유액 등을 감안할 때 달러 붕괴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중국의 이해관계도 크다. 두 번째는 시장 심리가 돌변하면서 외국인들이 달러 자산을 투매하는 경우다. 그러나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방어막이 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아이켄그린은 "달러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국제 금융 체제를 안정시키는 일에 모든 나라의 공통된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고 평가한다.
대신에 그가 주목하는 것은 미국의 재정 부실이다. 물론 여기에도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개입할 수 있다. 즉, 돈을 풀어서 미국의 국채를 매입하는 식으로 재정을 떠받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유럽의 경험을 보면, 중앙은행의 지원만으로는 위기를 억제하는데 역부족이다. 결국 강력한 재정 안정 조치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중앙은행의 지원이 '부채의 화폐화(monetization of debt)'로 변질되면서 극단적인 인플레이션 위험으로 귀착될 소지가 크다.
불확실성의 새로운 원천으로서 달러 위기
이런 맥락에서 아이켄그린은 미국의 '허리띠 졸라매기'를 해법으로 내세운다. 외환 위기 당시 우리도 익히 체험한 바 있고, 최근 유럽 위기 과정에서도 되풀이되는 논리다. 물론 이로 인한 "생활수준의 정체"라는 대가는 심각한 문제다. 따라서 그는 미국의 "정책 실수" 가능성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정치적 논리로 인해 내핍의 불가피성이 용납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달러의 운명이 중국이 아니라 미국의 손에 달려 있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 문제야말로 가장 치명적 쟁점 아닐까? 아이켄그린은 미국이 실수하지 않는다면 달러의 붕괴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미국의 실수는 불가피해 보인다. 사실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미국 경제의 회생을 위한 경쟁력 있는 옵션이 부재한 상황이다. 오바마는 녹색 뉴딜을 미국 경제의 미래 청사진으로 제시했지만, 수익을 좇는 투기성 자본의 새로운 소재(바이오 테크 등)로서만 관심을 끌 뿐 지속적인 번영을 담보할 원천으로서는 아직 감감 무소식이다. 한편, 최근 '월가를 점령하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주목되는 분배의 재조정 역시 정작 세계 헤게모니에 집착하는 미국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지금은 내부적으로 모순이 응축되고 있는 달러의 위기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 할 시점이다. 또 유럽 위기를 비롯하여 중국의 경착륙 가능성 등으로 인해 사실상 복수 통화 체제의 구도 자체가 이미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국제 통화 체제 자체의 재건이다.
문제는 그 방향이다. 위기의 직간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던 달러 일극 체제가 아니라 국제적으로 호혜평등의 원칙을 살린 균형적인 체제로 국제 통화 체제가 재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실질적인 의미에서 국제 통화 체제 재건의 축이 되었던 '마셜 플랜(유럽 부흥 계획)'의 경험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달러 중심의 현행 체제가 만들어졌지만, 이번에는 다른 접근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지금도 불안이 증폭되고 있는 유럽 위기가 출발점이다. 각자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오리무중에 빠진 유럽의 재건을 위해 국제 사회에서 새로운 마셜 플랜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제는 글로벌 유동성의 새로운 공급원으로서 미국보다 중국 등 신흥 경제 대국이 부각되고 있다. 그간 달러 리사이클링으로 국제 자본 흐름의 불안정성을 유발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위기의 세계 경제를 구원할 주체로서 신흥국의 외환 보유액이 관심을 끄는 것이다. 아마도 이 과정이 원활하게 진행된다면, 선진국과 신흥국, 서양과 동양 간의 적절한 권력 균형에 입각한 새로운 글로벌 거버넌스(governance : 지배 구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말보다는 행동이 어려운 법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 와중에 세계 주요 7개국(G7)을 대신하여 세계 주요 20개국(G20)이 새로운 글로벌 거버넌스로 부상하고 있지만, 여전히 내부의 불협화음이 큰 가운데 효과적인 구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달러의 위기, 그리고 유럽 위기가 자칫 각국의 경쟁적 평가 절하, 즉 국제적인 환율 전쟁으로 귀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제는 세계 금융 위기의 새로운 전개로서 국제 환율 위기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즉, 국제 외환 시장이 글로벌 불확실성의 새로운 경로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켄그린의 이번 역작은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세계 경제의 향방과 관련해 일종의 '누락 고리(missing link)'로 자리매김 되는 달러의 위기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한다.
최근 들어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파워의 쇠락에 주목하면서 달러의 "과도한 특권(exorbitant privilege)"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 더 이상 미국이 세계 경제의 최강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달러의 국제 기축 통화 지위를 활용해 부당 이익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세계 경제에 대한 지배력의 약화와 세계 경제의 다극화는 "달러의 특이한 지배력과 불편한 긴장 관계"를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달러의 위기, 혹은 세계 헤게모니로서 미국의 몰락을 점치는 목소리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따금 달러화 표시 유동성을 확보하는 데 혈안인 모습이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 직후의 모습이 단적인 예다. 당시 위기의 진원은 미국이었지만, 정작 그 여파로 달러화 유동성이 고갈되면서 세계 도처에서 달러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가열되었다. 그 결과 달러는 초강세를 보였다. 원/달러 환율이 외환 위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치솟았던 것도 그 때였다. 지금도 사정은 유사하다. 유럽 재정 위기가 달러화 유동성의 경색 우려로 번지면서 원/달러 환율이 폭등하고 세계 경제가 또 다시 극심한 몸살을 앓은 것이다.
마치 야누스와 같은 달러의 두 얼굴이다. 국제 경제학계의 대가 배리 아이켄그린(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교수)이 <달러 제국의 몰락(Exorbitant Privilege)>(김태훈 옮김, 북하이브 펴냄)에서 조망하고 있는 달러의 미래 역시 바로 이 점에 천착하고 있다. 그는 "달러의 몰락에 대한 예측과 현실 사이에 격차"가 크다고 지적하면서, "달러를 둘러싼 통념들은 대부분 틀렸다"고 역설한다.
아이켄그린이 먼저 환기시키는 '환율의 경제학'의 제1원리는 "환율과 관련된 문제는 언제나 상대적으로 살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두 통화의 교환 비율을 의미하는 환율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제 아무리 특정한 통화의 가치가 하락하려고 해도 그 짝이 되는 다른 통화의 가치가 오르지 않는 이상, 환율이 변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달러가 제 아무리 문제가 많다고 해도, 달러 이외 다른 통화 역시 문제가 많"은 이상 달러의 가치가 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다른 통화의 문제가 더 크다면 달러의 가치가 오를 수도 있다.
세계 금융 위기, 또 최근의 유럽 재정 위기 과정에서 나타난 달러의 강세는 바로 이 때문이다.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이른바 '시스템 안정'을 위해서는 사실상의 기축 통화인 달러의 원활한 유통이 관건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달러를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고, 그 결과 달러의 가치가 상승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달리 의존할 수 있는 대안 통화가 없다는 점도 달러 강세에 일조했다. 이에 아이켄그린은 지난 1970년대 달러의 위기가 언급되기 시작한 이후 "달러는 부전승으로 국제 통화의 최강자 자리를 지켜 왔다"고 꼬집는다.
달러 중심 국제 통화 체제의 내재적 긴장
▲ <달러 제국의 몰락>(배리 아이켄그린 지음, 김태훈 옮김, 북하이브 펴냄). ⓒ북하이브 |
실제로 국제 자금흐름 교란의 원천으로 지목되는 '달러 리사이클링(dollar recycling)'도 이 때문이다. 달러가 기축 통화로서 군림하는 이상, 나머지 주변국의 위기 예방을 위해서는 준비 자산으로서 달러 비축이 절실했던 탓이다. 또 스탠더드 앤 푸어스(S&P)의 미국 신용 등급 강등에서 드러났듯이, 미국의 재정 부실 역시 심각한 문제다. 금과 같은 상품 통화와 달리 법화(fiat money) 체제에서는 정부의 공신력이 관건인데, 재정 부실로 인해 이런 신뢰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세계 금융 위기, 또 최근 미국의 재정 불안 역시 모두 역설적으로 달러화 강세로 귀착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만큼 달러 중심 국제 통화 체제 자체의 내재적인 긴장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달러의 위기가 목전에 다가섰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켄그린은 19세기 후반 국제 통화 체제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달러 중심 국제 통화 체제의 이러한 문제점을 파헤치고 있다. 여기서 그는 통화의 세계 지배력이 결국 해당국 경제와 재정의 기초 체력에 의존한다는 데 주목한다. 따라서 달러의 위기는 미국의 기초 체력이 그만큼 약화된 탓이며, 달러의 운명 역시 "미국 경제가 어떻게 굴러갈 것인지, 금융 위기로 이어진 심각한 정책적 실패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여부"에 의존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국제 통화 체제의 향방과 관련해 세계 경제의 다극화에 부응하는 통화 체제의 다극화에 초점을 맞춘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달러화 일극 지배 체제는 역사적으로 볼 때 극히 이례적인 사례다. 오히려 복수 통화 체제가 일반적이다. 여기서 아이켄그린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유로와 위안이다. 사실 유로야말로 달러화 일극 국제 통화 체제에서 비롯된 제약이나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보완 수단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유럽 재정 위기의 영향으로 유로가 와해 지경에 내몰리고 있다. 하지만 역내 통합을 위한 강력한 정치적 의지를 감안할 때 유로의 붕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위안도 당장에는 자본 통제 등의 영향으로 국제적 활용도가 떨어지지만, 중국의 막강한 경제력과 위안화 국제화 노력을 감안할 때 국제 통화로의 성장도 마냥 미래의 일로 치부하기 어렵다. 실제로 중국은 점진적으로나마 위안의 결제 통화 역할을 확대시켜 가고 있고, 상하이를 중심으로 국제금융센터 육성 계획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아이켄그린은 20세기 초 미국의 달러가 국제 통화로 올라서던 경험을 환기시킨다. "달러가 국제 무대에 데뷔한 지 2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지배적인 통화로 자리매김을 했다"는 것이다.
한편, 달러, 유로, 위안 등 "세 개의 국제 통화를 수용할 여지가 있다는 것은 곧 더 많은 국제 통화를 수용할 여지가 있다는 뜻도 된다"고 덧붙인다. 여기서 그는 인구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인도의 루피와 브라질의 헤알 역시 국제 통화의 잠재 후보국에 올린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앞으로 국제 통화를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하지만 아이켄그린은 이 경쟁이 "죽음의 경주"는 아니라고 설명한다. 국제 통화의 자리가 하나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달러의 몰락 혹은 붕괴 가능성에 대해서도 거리를 둔다.
항간에서 거론되는 달러의 붕괴 시나리오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미국과 중국 간의 정치적 갈등이다. 하지만 경제적 상호 의존성이나 달러 위주의 막대한 외환 보유액 등을 감안할 때 달러 붕괴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중국의 이해관계도 크다. 두 번째는 시장 심리가 돌변하면서 외국인들이 달러 자산을 투매하는 경우다. 그러나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방어막이 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아이켄그린은 "달러가 주도적 역할을 하는 국제 금융 체제를 안정시키는 일에 모든 나라의 공통된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고 평가한다.
대신에 그가 주목하는 것은 미국의 재정 부실이다. 물론 여기에도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개입할 수 있다. 즉, 돈을 풀어서 미국의 국채를 매입하는 식으로 재정을 떠받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유럽의 경험을 보면, 중앙은행의 지원만으로는 위기를 억제하는데 역부족이다. 결국 강력한 재정 안정 조치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중앙은행의 지원이 '부채의 화폐화(monetization of debt)'로 변질되면서 극단적인 인플레이션 위험으로 귀착될 소지가 크다.
불확실성의 새로운 원천으로서 달러 위기
이런 맥락에서 아이켄그린은 미국의 '허리띠 졸라매기'를 해법으로 내세운다. 외환 위기 당시 우리도 익히 체험한 바 있고, 최근 유럽 위기 과정에서도 되풀이되는 논리다. 물론 이로 인한 "생활수준의 정체"라는 대가는 심각한 문제다. 따라서 그는 미국의 "정책 실수" 가능성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정치적 논리로 인해 내핍의 불가피성이 용납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달러의 운명이 중국이 아니라 미국의 손에 달려 있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 문제야말로 가장 치명적 쟁점 아닐까? 아이켄그린은 미국이 실수하지 않는다면 달러의 붕괴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미국의 실수는 불가피해 보인다. 사실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미국 경제의 회생을 위한 경쟁력 있는 옵션이 부재한 상황이다. 오바마는 녹색 뉴딜을 미국 경제의 미래 청사진으로 제시했지만, 수익을 좇는 투기성 자본의 새로운 소재(바이오 테크 등)로서만 관심을 끌 뿐 지속적인 번영을 담보할 원천으로서는 아직 감감 무소식이다. 한편, 최근 '월가를 점령하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주목되는 분배의 재조정 역시 정작 세계 헤게모니에 집착하는 미국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지금은 내부적으로 모순이 응축되고 있는 달러의 위기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 할 시점이다. 또 유럽 위기를 비롯하여 중국의 경착륙 가능성 등으로 인해 사실상 복수 통화 체제의 구도 자체가 이미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국제 통화 체제 자체의 재건이다.
문제는 그 방향이다. 위기의 직간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던 달러 일극 체제가 아니라 국제적으로 호혜평등의 원칙을 살린 균형적인 체제로 국제 통화 체제가 재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실질적인 의미에서 국제 통화 체제 재건의 축이 되었던 '마셜 플랜(유럽 부흥 계획)'의 경험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달러 중심의 현행 체제가 만들어졌지만, 이번에는 다른 접근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지금도 불안이 증폭되고 있는 유럽 위기가 출발점이다. 각자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오리무중에 빠진 유럽의 재건을 위해 국제 사회에서 새로운 마셜 플랜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제는 글로벌 유동성의 새로운 공급원으로서 미국보다 중국 등 신흥 경제 대국이 부각되고 있다. 그간 달러 리사이클링으로 국제 자본 흐름의 불안정성을 유발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위기의 세계 경제를 구원할 주체로서 신흥국의 외환 보유액이 관심을 끄는 것이다. 아마도 이 과정이 원활하게 진행된다면, 선진국과 신흥국, 서양과 동양 간의 적절한 권력 균형에 입각한 새로운 글로벌 거버넌스(governance : 지배 구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말보다는 행동이 어려운 법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 와중에 세계 주요 7개국(G7)을 대신하여 세계 주요 20개국(G20)이 새로운 글로벌 거버넌스로 부상하고 있지만, 여전히 내부의 불협화음이 큰 가운데 효과적인 구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달러의 위기, 그리고 유럽 위기가 자칫 각국의 경쟁적 평가 절하, 즉 국제적인 환율 전쟁으로 귀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제는 세계 금융 위기의 새로운 전개로서 국제 환율 위기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즉, 국제 외환 시장이 글로벌 불확실성의 새로운 경로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켄그린의 이번 역작은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세계 경제의 향방과 관련해 일종의 '누락 고리(missing link)'로 자리매김 되는 달러의 위기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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