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ACT (Click map below !!)

Turkey Branch Office : Europe & Middle East (Click map below !!)

Mobile Phone Cases (Click photo here !)

Mobile Phone Cases (Click photo here !)
Mobile Phone Cases

Thursday, November 10, 2011

박원순의 승리, 시민의 반격이다

박원순의 승리, 시민의 반격이다(서프라이즈 / 김창호 / 2011-11-10)
우여곡절 끝에 박원순이 크게 승리했다. ‘우여곡절’이라는 토를 단 것은 초반에 쉽게 이길 것으로 예상했던 선거가 중반부터 전략적 판단착오로 한나라당을 결집시켰고, 한때 아슬아슬한 시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7%라는 큰 차이로 범야권이 승리함으로써 이번 선거의 전략적 목표는 달성했다.
물론 어떤 선거든 완벽하게 만족스러울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번 선거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다. 현재의 정치적 정세, 특히 시민들의 좌절과 분노가 극에 달한 시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프레임에서 지고, 선거에서 이겼다


전략적 착오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명백한 정치적 선거를 정책선거로 축소시켰다는 점이다. 이번 선거는 무상급식을 거부한 오세훈 전 시장의 오기가 불러온, 예정에 없던 선거였다. 이런 점에서 무상급식 거부라는 한나라당의 반시민적 행태와 정책 실패에 대한 분명한 심판이 필요했다.

아울러 이번 선거는 MB 정부에 대한 심판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선거였다. 99%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는 1%의 탐욕이 전 세계적으로 비판받고 있는 지금, MB 정부의 부자정치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좌절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단순히 시민행복을 위한 각론적 정책들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을까. 시민들의 안중에 각론들의 논의가 들어 올 리 없었다. MB 정부를 심판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비전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박원순 캠프는 이 의제를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했다.
둘째, 한나라당의 네거티브 프레임에 갇혀 정작 중요한 MB 심판이라는 프레임을 살려내지 못했다. 학력이나 병력에 대한 네거티브공세에 대해 ‘한나라당이 그런 비판을 할 자격이 있나’ 식으로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논법으로 대응했다. 대변인 브리핑이라는 것도 대부분 한나라당이 지적한 의혹을 해명하기에 바빴다.

문제는 이런 식의 대응이 한나라당의 프레임을 더욱 강화시켜 줬다는 것이다.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를 생각하지마>가 가르쳐주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새로운 의제를 만들지 못한 채 상대가 제기한 의제를 중심으로 해명하고 반박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프레임전쟁에서 밀리고 말았다.

과연 박원순의 승리인가


그러나 박원순의 승리는, 후보와 상관없이, 유권자들이 한나라당과 MB 심판이라는 프레임에 충실한 결과였다. 어느 신문의 심층조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박원순 후보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나경원이 당선돼서는 안 된다’는 시민들의 판단이 작용했다.

언론은 주로 ‘안철수 효과’를 지적한다. 어떻게 보면, 안철수는 최소한의 제스처로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그래서 언론은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안철수는 최대의 정치적 수혜자라고 해석한다. 단 한 번의 출현으로 선거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언론의 평가와 함께,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박근혜의 대항마로 자리매김했다고 설명한다.

물론 안철수의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이번 승리의 결정적 원인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이 같은 인물 중심구도는 흥미 극대화를 위한 저널리즘의 관점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 설명은 아니다. 이미 시민들은 박원순을 지지함으로써 반 한나라, 반 MB를 명확히 할 것을 충분히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언론의 지적처럼 ‘안철수’의 실체는 모호하지만, ‘안철수 현상’의 실체는 명백히 존재한다. 즉 정당을 포함한 우리 사회 상부구조에 비판적이며, 기득권 카르텔의 해체를 요구하는 광범위한 시민정치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안철수’라는 자연인을 통해 표출됐으며, 만약 자연인 ‘안철수’가 이를 담지 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서면 시민들은 새로운 인물을 찾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박원순이 안철수에게 마지막 순간, 손을 내민 것은 스스로 안철수를 대신해 기존의 정당정치의 해체를 요구하는 시민정치세력들의 분노와 좌절을 담지 하는데 그리 성공하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결과, 어려운 선거운동의 성과를 고스란히 안철수에게 넘겨주고 말았다는 정치평론가들의 설명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누가 청년들의 고민에 다가간 적이 있나

이번 선거에서 박원순, 문재인 등과 더불어 안철수가 새로운 정치공간, 새로운 시민정치적 세력을 창출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기존처럼 이념과 지역에 의해 포착되지 않았던 정치공간, 특히 SNS를 기반으로 하는 시민정치세력을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낸 공로는 한국정치사에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문재인, 안철수의 등장, 그리고 박원순의 당선을 흔히 과거 무소속 후보와 비교해 설명하기도 한다. 이들이 과거의 무소속 후보와 다른 것은 과거와 달리 배후에 시민정치세력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1% 지배 카르텔의 야합, 그리고 이들을 견제하지 못하는 정당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소통방식을 창출해 기존의 정당구조를 위협하는 새로운 시민정치세력이 그들이다.
이들이 결집하게 된 동력은 ‘위로(慰勞)의 정치’였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젊은 세대를 위로한 것이 그들이었다. 특히 안철수는 청년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공감을 이끌어냈다.

이것은 ‘공감(共感)의 정치’라고 하는 새로운 소통방식을 시도한 것이기도 하다. 과거처럼 비난과 비판, 음모와 전략, 지역과 이념이라는 전통적 화법이 아니라 청년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들의 좌절과 분노에 공감하는 정치였다. 과거같이 분열과 대립을 기본 축으로 하는 전통적 정치행위들과 명백하게 다른 정치행위인 것이다.

공감은 서로의 삶에 깊이 참여해 들어갈 수 있는 수단이다. 공감은 또한 우리 공동의 현실을 만드는 수단이다. 더 많이, 더 깊이 공감할수록 더 많은 참여가 이뤄지며, 그만큼 우리가 참여하는 현실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진다. 공감은 다른 사람과 평등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인간적 행위이다. 타인의 존재를 긍정하지 않으면 공감은 불가능하다.
특히 수직적 질서가 수평적 질서로 바뀌고 네트워크에 의해 관계망이 확산되고 있는 현대적 구조 속에서는 과거의 지시나 명령이 아니라 ‘공감’은 소통의 가장 기본적 전제이다. 특히 약자의 경우 자신의 존재를 긍정 받고 평등한 지위를 보장받기 위한 가장 기초적 인식은 바로 ‘공감’에서 시작한다.

청년들은 자신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평등하게 공감하는 대화를 원했고, 이를 받아주는 ‘공감의 정치’를 요구하고 있다. ‘위로의 정치’란 다름 아닌 이 같은 ‘공감의 정치’가 가져온 정치적 결과일 따름이다. 평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는, 그래서 함께 그들의 현실을 공유하는 ‘공감의 정치’를 통해 청년들은 위로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대화는 서로의 공감을 확인하는 도구이다. SNS는 기존의 정치적 담론이나 대화와 구별되는 새로운 형태의 공감을 만들어 내는 언어를 창출했고, 오프라인에서 ‘청춘콘서트’라는 새로운 공감의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다. ‘안철수 현상’으로 표현되는 오늘날의 새로운 정치현실은 바로 이런 공간이 창출한 결과이다.
이런 공간의 역할을 폄하한다면 앞으로 전개될 정치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박원순 당선’이 가진 탈정당적 경향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탈정당정치 현상은 박원순, 안철수, 문재인의 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 정당들이 책임져야 할 일이다. 대신 거꾸로 질문해야 한다. “정치인 누가 청년들의 고민에 귀 기울여준 적이 있는가” “누가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며 위로하고 공감한 적이 있는가.

‘위로의 정치’에서 ‘책임의 정치’로


한때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을 위한 투쟁, 즉 ‘인정투쟁’이 우리 정치의 중심에 선 적이 있었다. 배제와 차별, 타자로부터 존재론적 무시가 우리 정치의 주요한 갈등구조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갈등 속에도, 도시와 농촌 간의 불균형 속에도 이 같은 ‘인정투쟁’의 요소가 내재되어 있었다.
우리에게 ‘인정투쟁’에 불을 붙였던 것은 미군탱크에 깔려 죽은 여중생들이었다. 이 사건은 한반도에서 미국과 한국 간의 불공평한 관계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켰고, 정서적 저항을 불러왔으며, 곧 인정투쟁으로 전환했다.

과도한 해석일지 모르지만, 월드컵에서 보여준 집단적 응원도 이 같은 ‘인정투쟁’의 한 현상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월드컵이 단순한 축구게임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인정받고 평가받는 과정이자 계기로 인식됐다. 그리고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노무현 정치의 핵심도 이 같은 ‘인정투쟁’이라 할 수 있다. ‘사람사는 세상’이 그렇고 노무현의 당선 자체가 ‘인정의 정치’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기득권 카르텔에 저항해 서민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정치화했던 노무현 정치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인정의 정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정치를 관통하는 것은 ‘위로의 정치’ 또는 ‘공감의 정치’이다. 그러나 위로의 정치가 현실을 책임질 수는 없다. 박원순의 당선으로 표출되고 있는 일회적 현상이 정치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담지 할 수는 없다. 박원순의 당선과 ‘안철수 현상으로 표출된 시민들의 요구가 위로와 공감의 형식을 넘어 정치의 영역에서 책임 있게 구현될 수 있는 방법, 현실적 수단들에 대해 논의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다시 말해 ‘위로의 정치’가 ‘책임의 정치’로 전환할 것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위로는 ‘책임’을 수반하지 않을 때 단순한 위로에 머물고 만다. 그 위로는 달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So What?’이라는 질문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대중들은 위로가 궁극적 해결책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이제 위로와 공감이라는 사적인 교감이 공적 영역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사적 공간을 넘어 객관화된 현실 속에서 그 대화와 위로들이 어떻게 구체화되어 실현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막스 베버의 용어를 빌자면, ‘신념윤리’를 넘어 ‘책임윤리’가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반란’을 꿈꾸나


박원순 당선의 밑바탕에는 ‘위로의 정치’, ‘공감의 정치’가 중요한 동력이 됐다. 그리고 이를 넘어 책임의 정치로 구현되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미 박원순의 선거과정에서 책임정치에 대한 질문들이 대두됐고, 이제 이를 구현해야 할 과제가 주어졌다.
문제는 이번 선거결과가 박원순 또는 안철수와 같은 자연인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시민들에 의해 ‘호명(呼名)’되었을 뿐이다. 과거 지역주의 정치시대에는 호명할 선택지가 많지 않았고, 그래서 특정 정치인들이 특정 지역의 대변자로 불려 나왔던 것처럼….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시민들은 자신의 요구에 맞지 않다고 판단될 경우 언제든 지지를 철회한다. 시민이 정치인들에 의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시민들이 정치인을 불러내고 선택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시민들은 ‘반란’을 이끌 정치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 ‘반란’이라고 한 것은 기존의 지배카르텔을 해체하고자 하는 명백한 정치적 의도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반란’에는 기존의 개혁진보진영도 예외일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의 반란은 궁극적으로는 지배카르텔의 해체를 꿈꾸고 있지만, 1차적으로는 개혁진보진영의 재편을 의미한다. 이 재편은 정치적 공간에서 개혁진보세력의 교체를 의미한다. 단순한 인물교체나 세대교체가 아니라 명백한 세력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요구를 단순히 정치지도자의 교체나 세대교체로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민들이 제3의 인물을 ‘호명’하면서 꿈꾸는 ‘반란’의 핵심은 무엇일까. 진보개혁세력에 대해 어떤 ‘반란’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필자는 이미 여러 차례, 한국 정당정치의 위기, 대의제의 위기, 직접 민주주의 요구 증대, 그리고 세력교체를 강조했었다. 또 ‘국가와 시장’ 이분법의 한계와 새로운 시민정치운동의 필요성, 기존 시민운동의 좌절과 새로운 시민정치공간으로의 이동 등을 통해 이러한 ‘반란'이 지향하는 정치적 변화를 설명한 바 있다.

결국 정당정치든, 시민정치공간이든 필자의 결론은 세력교체였다. 이에 대해 많은 분들이 ‘어떤 세력으로 어떤 세력을 교체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물론 기존의 세력이 아닌 만큼 가시화된 세력이 아닐 수도 있다. 새로운 질서에 대한 욕망을 지닌 만큼 기존의 논리나 철학으로 설명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번 선거결과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새로운 세력은 명백한 사회적 현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제 이들을 외면한 정치는 현실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박근혜를 비롯한 기존의 정치세력이 이들 앞에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위협적으로 보여줬다.

그들의 욕망과 감수성을 읽어라


진보개혁세력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기존의 진보정당들의 경우 더욱 그렇다. 문재인의 등장, ‘안철수 현상’, 그리고 박원순의 당선을 계기로 드러난 이들 새로운 세력은 기존 진보정당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기존의 진보의 틀에서 보면 진보나 보수도 아닌 것이 정치의 중심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민주당이 이런 감정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민주당뿐이 아니라, 진보를 자처하는 소수정당들은 더 큰 낭패감을 맛보고 있을 것이다. 정당 외부에서 형성된 이러한 새로운 세력은 정당의 대소를 불문하고, 기존 정당들이 모두 기득권의 카르텔 속에 안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기존 진보정치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이들은 “지금껏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듣보잡’이 판을 흔든다”고 느낄 것이다. 이런 감정은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때 기존의 진보들이 느꼈던 감정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기존의 진보적 민중운동, 시민운동은 끝까지 노무현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때 그들은 ‘지금까지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온 사람들이 누구인데, 어디서 굴러온 돌이 대통령이 됐냐’는 식이었다.

지금 진보정당들이 느끼는 감정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일련의 정치적 사태를 통해 보여준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외면한다면 진보는 이제 더 이상 유의미한 정치세력으로 존재하기 힘들 것이다. 필자는 진보정당 간 통합도 새로운 진보의제를 빼놓고, 정치공학적으로 이뤄진다면, 성공할 수도 없고, 역사에도 기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었다.
문제는 감수성이다. 새로운 세력은 과거 진보개혁진영이 가진 감수성과 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과거 진보의 금욕적, 민중적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폐쇄적 민족주의나 자본에 대한 금욕적 비판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글로벌가치에 친화적이며, 성공과 욕망을 긍정한다.

물론 과거에도 진보적 시민들은 금욕적, 민중적 삶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것의 도덕적 가치는 인정해 줬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새로운 세력은 진보를 과거의 금욕적, 민중적 삶이 아닌 새로운 삶의 형식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전통적 진보가 ‘알박기' 식으로 복고풍의 감수성으로 진보를 독점하려 한다면 점점 설 자리가 좁아질 것이다. 새로운 세력은 ‘반란’을 꿈꾸는데 머물지 않고 구체적으로 현실화해 나갈 것이다.

이에 대해 기존 정당이 ‘트윗과 페이스북을 열심히 하라’ 등의 방식으로 구태의연하게 대응하면서 정작 새로운 세력의 변화무쌍한 욕망과 그들의 빛나는 감수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국 자멸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김창호 / 전 국정홍보처장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