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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November 12, 2011

"한국의 보수는 1950년에 머물러 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9일 중학교 역사교과서 집필 기준을 일방적으로 변경, 발표해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먼저 절차의 문제가 제기됐다. 교과부가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개발 공동연구진’, 교과부 장관 자문기구 ‘역사교육과정 개발추진위원회’(역추위), 역사학계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는 비판이다. 9월 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등 역추위 위원 9명이 사퇴했고, 지난달에는 연구진 위원장직과 역추위원직을 맡고 있는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국사학과)는 ‘비민주성’을 거론하며 사퇴했다.

내용을 둘러싼 논쟁은 더욱 뜨겁다.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로 바뀌었다. 헌법의 ‘자유민주적 근본질서’를 ‘자유민주주의’로 해석한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정권에 대한 서술에서 ‘독재’가 빠지고 ‘독재화’란 낯선 개념이 등장했다. ‘친일파 청산’과 ‘5·18 민주화운동’ 또한 삭제됐다.

11일 고려대학교에서 정태헌 교수(한국사학과)를 만나 역사교과서 논란의 핵심을 들어봤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정 교수는 역사교과서 문제에 대해 그동안 각종 언론과 학회에서 주요 문제를 제기해 왔다. 정태헌 교수는 교과부가 보수세력의 ‘정치논리’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 ‘민주주의’와 ‘남북 평화’를 후퇴시키는 결정을 내렸다며 한국 사회의 보수의 ‘이념적 취약성’을 지적했다. 

  
정태헌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역사교과서 논란은 꽤 오래됐다. 2005년 출범한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포럼은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2008년 3월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도서출판 기파랑)’를 발간했다. 당시 ‘현재 교과서에 좌파이데올로기가 주입돼 있다’고 비판했다. 이번 집필기준 변경은 사실상 보수진영 학자, 학회들의 주장이 관철됐다고 보는 시각이 다수다.

"어떤 점이 좌파 이데올로기일지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유독 이명박 정부 들어서 역사 교과서 문제가 유난히 불거지고, 근자 들어 수준 낮은 색깔론이 나오는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심지어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집권당 후보 아니면 평양시장 뽑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갑갑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교과부가 새로운 집필기준을 발표했다. ‘특정 학회의 의견만 들었다’고 알려졌는데, 사실 그것을 구실로 해서 장관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것으로 보인다. 절차 문제가 기본적으로 걸린다. 이것 때문에 역추위 위원장이 사퇴까지 하게 됐다."

- 보수 대 진보 간 역사관 차이라는 건가.

"아니다. 지금 나는 철저히 보수의 시각에서 말하겠다. 한국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분들의 정체성과 그 기반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유독 ‘친일’, ‘독재’ 개념이나 문제에 대해 과민 반응을 보인다. 생각만큼 북한에 대한 자신감도 부족한 것 같다. 한국은 기나긴 독재정권의 상황에서 민주화를 이룩하면서 경제발전의 내용도 깊어졌다. 북한과 차별성이 있다면 바로 그 지점이다. 그걸 부각시켜야지 북한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 아니겠나. 그런데 이 문제를 자꾸 떼어 놓는다. 독재가 아닌 ‘독재화’라는 낯선 개념을 가지고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설명한다. (우리가 이들 정권을) 처음부터 독재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어느 시점부터 권력을 독점하고 장기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독재’라고 한다. 이분들 논리를 북한에 대입하면 북은 독재가 아니라 독재화라고 해야 하나."

-내용에 대해 얘기했다.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나.

"새로운 집필기준이 강조하는 것은 ‘헌법의 기본질서가 자유민주주의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제헌헌법부터 대한민국 헌법에는 ‘자유민주주의’는 거론되지는 않는다. 중간에 개헌이 되고 나서 ‘자유민주적 근본질서’라는 말이 등장한다. 영어식으로 보면 ‘자유롭고 민주적인 근본 질서’다. 이는 결코 사전적 의미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이에 대한 강조는 북한의 ‘인민민주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이다. 현 정부와 보수를 자처하는 분들이 북한에 대해 자신감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라고 하는 건 자유와 평등 두 바퀴 위에서 형성된다. 정치학자들 대부분이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내용에 미달한다’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 시장경제만 하더라도 ‘시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국가, 사회 등 다양한 요소가 있어야 운영되는 거다. 돌아가서 민주주의라는 보편개념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고 역사적이라고 생각한다."    
  
©노컷뉴스

-‘민주주의’가 역사적이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48년 남쪽과 북쪽이 따로 떨어지고 제헌헌법이 만들어질 때를 돌이켜보자. 경제조항만 놓고 보면 남한과 북한 헌법이 큰 차이가 없다. 무엇을 의미하느냐. 남한과 북한의 지도부가 ‘식민지 경제’라는 동일한 유산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를 재건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이념문제가 안 드러난다. 북한 헌법이 '공산주의' 거론 안 하는 것처럼 남한 헌법 또한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강조하지 않는다. 남한과 북한 사이의 이념문제가 두드러지는 계기는 전쟁이었다. 결코 헌법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해보자.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 대해 가급적 독재로 보고 싶지 않아 한다 해도 이들 정권 자체가 ‘자유민주주의적이다’라고 규정하기 힘들 거다. 이승만, 박정희 정부는 그 단계에 필요한 정책과 역할도 했지만 독재라는 측면에서 자유민주주의에 상반되는 과정을 밟았다. 그런 독재 정권을 바꾸고 민주화 과정을 밟아나가는 것이 북한과의 차별성이다. 사실 남북 간의 경제적 격차도 민주화 여부에서 드러난다. 대체로 70년대 중반부터 남북한 경제 격차가 역전되기 시작하는데, 남한은 유신체제로 갔다고 하더라도 이면에는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역량이 넓어져 가는 과정이 있었다.

북한은 거꾸로 주체사상이라고 하는 이론적 체제로 갔다. 그러니까 민주화는 사회구성원들의 에너지를 모으는 과정이었고, 그게 남한과 북한의 차이다. 요즘에 (보수세력이) 입만 열면 얘기하는 게 ‘대한민국 정통성’인데 그런 과정 속에서 대한민국 정통성이 살아나는 거다. 현재 남한과 북한이 UN에 가입한 상황이다. 미우나 고우나 빨리 평화적인 관계를 이룩해서 다음 세대는 지금보다 나은 세대로 가야 한다. 그런데 50, 60년 전처럼 남북대결 논리로 교육시키면 어떤 희망이 있겠나."

-한국의 보수가 북한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인다는 건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도 논란이 있었다.

"북이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는 것과 북을 협상파트너로 봐야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현실적인 문제다. 한국의 보수는 ‘UN이 인정한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에서 ‘유일한’에 방점을 두는데, 지금이 50, 60년대라면 이해한다. 남과 북이 극단적으로 대치하고 대립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를 강조하는 게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21세기에 와서 이렇게 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 그 표현은 ‘당시 대한민국이 선거가 이루어진 지역에서의 합법정부’라는 것이고 사실 ‘한반도 내에서 선거에 빠진 부분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거다. 그러면 보수를 자처하고 대한민국 정체성을 얘기하는 분들은 ‘빠져 있는 부분’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온당한 것 아니냐. 지금 ‘유일한 합법정부’를 강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사회 보수의 문제라는 건가.

"제도적 민주화가 어느 정도 사회의 기반이 됐다. 보수를 자임하는 분들은 변화된 사회를 알고 얘기해야 한다. 지금 (이들의) 말, 인식으로 보면 그 동안 대한민국 사회가 변화했다는 것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다. 친일문제도 그런 점에서 나온 발상이다. 해방 후 한국사회가 친일문제 청산이 안됐는데 그걸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해방 60, 70년 지난 지금, 친일과 무관하지 않은 언론, 학교, 정치인들이 조상들의 친일 사실을 인정하고 털어내는 것이 조상들의 짐을 가볍게 해주는 것이다. 이걸 ‘어쩔 수 없었다’고 피하거나, ‘아니다’고 부정하면 쳇바퀴 도는 거다.

친일문제가 나온다고 해서 법적으로 형사, 민사문제를 거론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쉽게 정리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후손, 관계자의 생각의 폭이 좁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게 아마 한국사회 보수가 갖는 취약점이라고 생각한다. 518민주화운동도 삭제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국군을 동원해 민간인을 대규모로 살상한 것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건가. 보수를 자처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뭘 가지고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미래 전망을 얘기할 것인가. 지난한 세월 동안 있었던 민주화과정을 빼버린 채 독재와 친일 문제를 너그럽게 넘어가려고 한다면, 앞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젊은 사람에게 나라를 지키자고 할 건가. 보수의 근간은 국가와 민족이다. 한국의 보수는 유독 국가와 민족이 약하다."
-역사교과서 논쟁의 핵심에 대해 정리하자면?

"대한민국의 보수사회라고 한다면 자기가 생각하는 보수의 내용이 무엇인지 정체성을 가지고 얘기해야 한다. 50, 60년 전에 ‘북한 때리기’ 하던 그 방식 그대로 세월과 상황이 바뀐 시대에도 하려다 보니 자꾸 무리수가 된다. 최근의 상황은 보수사회가 새롭게 재편되는 과도기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가 싶다. 지금 이명박 정부, 뉴라이트 이런 분들이 변화된 한국사회의 보수의 정체성을 채우기는 힘들 것 같다. 일제의 식민 지배를 아주 심한 경우 미화하거나 식민사관으로 바라보는, 그런 역사관 속에서 어떻게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보수를 얘기할 수 있겠나. 보수가 크게 변화하는 과정에서의 부산물인 것 같다. 그런 분들이 권력을 가지고서 마치 휘두르다시피 하니까 힘들고 피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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