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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September 17, 2015

'김무성 아비 김용주' 명백한 '악질 친일반민족자 확실' 브레이크뉴스 "김무성 부친 김용주는 친일파가 아니라 애국자!"라며 친일파 미화 중

"부모로서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쳐라. 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셔질 영광을 인식하자”


이는 1943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전선공직자대회에서 김무성 아비 가네다 류슈 당시 경북도회 의원(김용주 )의 발언이다. 이 행사는 일제가 징병제 실시에 대해 감사하고 일제의 적국인 미국과 영국을 격멸할 것을 결의하기 위한 공직자들의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 참석한 공직자 중 조선인은 두 명이었다. 경북지역 대표적 친일파인 서병조와 김무성의 아비김용주.
 
이런 김용주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있다. 지난달 15일에는 김용주 평전인 <강을 건너는 산>도 출간됐다. 이 책을 출판한 ‘청어’는 이 책을 “광복 70주년 기획, 새로운 역사인물 찾기”라는 설명을 달아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제거 명단 중 포항지역 총살 대상 1호였다. 현대사의 격랑 중, 오해와 왜곡 속에 감춰진 한 애국자의 진실”이라고 포장했다. 

브레이크뉴스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인 해촌 김용주 선생이 친일파 였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이는 동일한 이름을 가진 친일파 김용주와 동명이인으로 사실과 정반대로 큰오해를 불러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다"며 김무성 대표 부친 김용주는 친일파가 아니라 애국자!라는 제목의 '김용주 평전'을 20회째 연제하고 있어 '역사를 왜곡하며, 친일파를 미화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17일 민족문제연구소는 1차 사료들을 분석해 김용주를 ‘명백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김용주는 지난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으나 김용주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닌 것이 아니라 추가조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보류했다”고 밝혔다.

김무성은 지난 2013년 9월 월간중앙과 인터뷰에서 부친의 친일 행적에 대해 부인했다. 이후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라며 이승만 국부론을 주장하는 등 역사에 대해 미화했다.(지난달 15일 여의도순복음교회) 그는 진보좌파 세력이 준동한다는 이유로 역사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바꾸기 위하 노력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지난 7월 3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그가 아비의 친일반민족 행위에 대해 국민앞에 진심으로 사죄하기는 커녕 아비 행적을 미화하며 숨기고 싶었던 역사는 무엇일까?  이날 민족문제연구소는 김용주에 대한 친일경력에 대한 입증 자료를 공개했다. 
 
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김용주의 친일행적은 경상북도 도회의원 시절인 1940년 이후부터 발견됐다. 그는 도회의원으로서 1940년 2월 23일 “국체명징관 내에는 내선관계의 역사적 연원을 증명하는 자료를 진열해 내선일체의 정신적 심도를 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1940년 2월 27일자) 국체명징관은 내지(일본)와 조선이 한몸이라는 ‘내선일체’를 촉진한다는 목적으로 세운 건물이다. 

김용주는 대구 국체명징관에 1000원, 대구 신사에 2000원을 헌납했다. (일본동맹통신사, 330~332쪽) 김용주는 애국기(전투기) 헌납운동도 주도했다. 그는 1941년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위해 결성한 최대 민간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에 선임됐다. 경북지부는 1942년 2월 군용기 5대를 헌납했다. (매일신보 1942년 2월 27일자)


김용주가 활동했던 경북 영일군에서 애국기 헌납 비율이 가장 높았다. 1942년 2월 당시 경북 영일군에서 애국기 3기를 헌납했기 때문이다. 같은해 12월이 되면 경북 영일군에서만 애국기 7기를 헌납하게 된다.

김용주는 애국기 헌납 선동 기명 광고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1943년 9월 8일자 아사히신문에는 “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들이여”라는 제목의 광고가, 1944년 7월 9일자 아사히신문에는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이라는 광고가 실렸는데 모두 김용주의 이름이 실려있다. 

김용주는 국민총력경상북도수산연맹 이사로 선임되기도 했다. (매일신보 1941년 5월 20일자) 이 조직은 조선민중을 강력히 통제하고 동원하기 위해 조직된 전시 최대 관변통제기구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직역별 산하연맹이다. 그는 5개월 뒤인 1941년 10월 8일 친일파 문명기와 함께 국민개로운동을 독려하기도 했다. 국민개로운동은 일제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조선인을 동원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처럼 1차 사료를 제시해 김용주를 친일반민족자로 규정했다. 또한 최근 출간된 김용주 평전<강을 건너는 산>이 객관적인 사실이 다수 틀렸으며 친일행적을 감추고 친일세력을 미화했다고 평가했다.


해당 쪽에는 김용주를 애국자로 미화하는 부분도 있었다. 평전에는 “미군이 조선지역에 폭격을 시작하면 곧 전토에 계엄령이 발포되는데 계엄이 발포되면 즉시 특정 조선인 8명을 체포 총살하라는 지시가 왔다. 그 명단 중 제1호가 바로 포항의 김용주”라고 나온다. 하지만 연구소는 “일제가 전시계엄을 선포한 것은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을 치를 때 뿐”이라며 “근거없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번 자료 공개가 연좌제가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 “친일행위자의 후손이나 연고자가 친일인물을 기념하는 경우, 친일행적을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경우, 친일청산운동을 방해하는 경우에만 친일행적을 공개한다”며 “김무성 대표의 경우 이 세가지를 모두 충족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래는 김무성 아비 김용주의 주요 친일 행적을 시기별로 정리한 타임라인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자료를 바탕으로 뉴스타파가 작성했다.

  • 김용주 1905.7.29 – 1985.1.27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05. 7. 29.

    경남 함양군 함양면 신관리 출생
  • 1923.

    조선식산은행 본점 취직
    6개월 만에 포항지점으로 전출. 경북 영일군 포항읍 이주 정착.
    ※ 조선식산은행 : 1918년 설립한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식민 경제 지배에서 동양척식회사와 함께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했던 핵심 기관 중 하나.
  • 1924.

    ‘영일청년회’ 지육부장
    독서회 조직 및 노동야학 개설. 이후 교사로 참여
  • 1926. 5.

    독서회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5.28)
    검사분국으로 송치(5.30)됐으나 같은 날 무사방면
    출처 : 시대일보(時代日報) 1926년 6월 3일 2면
  • 1926.

    삼일상회(三一商會, 철도화물운송업) 설립
    “삼일 민족운동의 정신을 본받는다는 뜻에서 붙인 것인데, 일찍이 민족의식에 눈떠 청년운동에 열중했던 나의 심혼을 표시한 그 상호는 다분히 의식적이고 민족적인 인상을 풍기었다. ”
    출처 : 김용주 회고록 “풍설시대80년” 중
  • 1927. 7. 22.

    신간회 영일지회 정치부 간사
    ※ 신간회(新幹會) : 1927년 2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창립한 민족협동 독립운동 단체
    출처 : 조선일보(朝鮮日報) 1927년 7월 25일 2면 중외일보(中外日報) 1927년 7월 27일 4면
  • 1936. 3.

    포항 영흥학교 인계 경영 및 교장 취임
    출처 : 동아일보(東亞日報) 1936년 3월 24일 4면
  • 1936. 9. 20.

    경상북도 포항읍회 의원(민선) 당선
    출처 : 매일신보 1936년 9월 22일 조간 4면
  • 1937. 5. 10.

    경상북도 도회의원(영일군, 민선)
    1941년 5월 재선, 1945년 해방때까지 도회 의원 유지
    출처 : 조선총독부 관보 1937년 7월 6일 매일신보 1937년 5월 12일 석간 1면 매일신보 1941년 5월 12일 석간 2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0. 2. 23.

    “국체명징관 내에는 내선관계의 역사적 연원을 증명하는 자료를 진열하여 내선일체의 정신적 심도를 올려야”한다고 발언  – 12회 경북도회 회의

  • 김용주 의원, 설치를 고려하는 국체명징관 내에는 내선관계의 역사적 연원을 증명하는 자료를 진열하여 내선일체의 정신적 심도를 올릴 것.
  • ※국체명징관(國體明徵館) : 국체명징(國體明徵) 즉, 황도정신(皇道精神)의 보급이라는 미명 아래 조선인들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를 촉진한다는 목적으로 세운 건물.
    출처: 동아일보 1940년 2월 27일 자 석간 7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0. 2. 24.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 내선일체의 이상에 향하고 있으므로 옛날과 같이 불온사상을 가진 자는 한명도 있지 않으므로 반도 교육에 일대 전환할 시기인 줄 생각한다”고 발언 – 제12회 경북도회 회의
    김용주씨 (포항) 반도인은 황도정신에서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 내선일체의 이상에 향하고 있으므로 옛날과 같이 불온사상을 가진 자는 한명도 있지 않으므로 반도교육에 일대 전환할 시기인줄 생각한다.
    출처 : 매일신보 1940년 2월 26일(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0. 7. 11.

    김용주 창씨
    金龍周(김용주) – 金田龍周(가네다 류슈)
    출처 :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 1940년 12월 20일
  • 1940. 11. 10.

    일본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 초대받고 축전기념장을 받음
    1941년 친일파 김갑순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신문사에서 발행한 “광영록”에 김용주 수록 1941년 9월 일본동맹통신사에서 발행한 “흥아일본건국사”에 김용주 수록
    ※ 일본 기원 2600년 축전(紀元二千六百年祝典) : 1940년 11월 일본 도쿄와 조선총독부 등에서 열린 일본기원 2600년 기념식전 및 봉축회, 일본은 전시체제를 맞아 일본의 위대성을 대내외에 알리는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벌였다.
    출처 : 기원 2600년 축전기념 광영록(紀元二千六百年祝典記念光榮錄) – 조선신문사(朝鮮新聞社), 1941.10, 46쪽(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일본내각관보 1941년 11월 21일
  • 1941. 5. 17.

    국민총력 경상북도수산연맹 이사 선임
    水産團體도 結合, 翼贊體制를 整備, 慶北聯盟 結成式 擧行(수산단체도 결합, 익찬체제를 정비, 경북연맹 결성식 거행)
    ※ 국민총력 경상북도수산연맹 :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와 전쟁동원을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총독부의 최대 관변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산하 단체
    출처 : 매일신보(每日新報) 1941년 5월 20일 석간 3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1. 7. 16.

    국민총력 경상북도연맹 평의원, 도회의원 자격으로 임명
    1) 總力慶北聯盟, 新道議 網羅 後 最初 常會, 中心論題는 生活新體制(총력경북연맹, 신도의 망라 후 최초 상회, 중심논제는 생활신체제)
    2) 道會議員を評議員に加へ, 慶北, 聯盟役員の常會を開へ(도회의원을 평의원으로 가입, 경북, 연맹역원의 상회를 개최)
    ※ 국민총력 경상북도연맹 :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와 전쟁동원을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총독부의 최대 관변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의 지방 조직
    출처 1)매일신보 1941년 7월 28일 조간 3면 2)경성일보 1941년 7월 28일 조간 2면
  • 1941. 9월 이전

    대구국체명징관 1천원 헌납, 대구신사 2천원 헌납
    ※국체명징관(國體明徵館) : 국체명징(國體明徵) 즉, 황도정신(皇道情神)의 보급이라는 미명 아래 조선인들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를 촉진한다는 목적으로 세운 건물.
    출처 : 日本同盟通信社, 1941.9, 330~332쪽 (皇統[皇紀]二千六百年記念誌)興亞日本建國史 ; 朝鮮銃後奉公錄(황통[황기]2600년기념지) 흥아일본건국사 ; 조선총후봉공록)(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1. 9. 11.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참여
    ※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 일제가 침략전쟁을 진행하면서 조선인들의 전쟁 협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시체제기 최대의 조선인 민간조직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참여 주요 인물 지부장 : 장직상(중추원 참의) 이사장 : 신옥(신현구) 중추원 참의 상임이사 : 서병조(중추원 참의) 문명기(중추원 참의), 정해붕(중추원 참의), 김용주 등
    출처 : 朝鮮臨戰報國團發起人·役員 名簿, “朝鮮臨戰報國團槪要”(조선임전보국단발기인·역원 명부 “조선임전보국단개요”) 27쪽(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1. 10. 8~10.

    친일파 문명기(중추원 참의)와 함께 영덕과 영천 지역에서 개로운동을 독려
    개로운동을 독려, 중추원참의, 도의들이 선두서(皆勞運動을 督勵 中樞院參議, 道議들이 先頭서 ) 文明琦一郞·金田龍周 氏, 동행자 森 職組 書記 10월 8일, 10월 10일 영덕·영천 양 군(兩郡)에 (이하 생략)
    국민개로운동의 취지를 철저히 이해시켜 불노유한무직자(不勞有閑無職者)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여 전시체제와 개로체제를 확립하도록 되었다. 중추원참의, 도의원 시찰일정은 다음과 같다.
    출처 : 매일신보 1941년 10월 7일 경상판 조간 3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국민개로운동 : 일제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조선인의 노동력동원을 목적으로 조선인의 근로보국을 주장하면서 실시한 운동
  • 1941. 12. 7.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 임명 및 ‘황군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보낼 것’을 제안
    1) 臨戰報國團 慶北支部設立, 結成은 卄九日擧行(임전보국단 경북지부설립, 결성은 29일 거행)
    2) 一死報國을 盟誓, 臨戰報國團 慶北支部 結成式, 七日, 盛大하게 擧行(일사보국을 맹서, 임전보국단 경북지부 결성식, 7일, 성대하게 거행)
    출처 1) 매일신보(每日新報) 1941년 11월 24일 3면
    2) 매일신보 1941년 12월 9일 석간 3면 (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2. 1. 10.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사업부장 임명
    大邱府民號十機! -臨戰報國團 支部와 協力實現에 邁進(대구부민호 10기! -임전보국단 지부와 협력실현에 매진)
    출처 : 매일신보 1942년 1월 12일 2면
  • 1942. 2. 27.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미국과 영국을 격멸할 군용기 5대 헌납
    기사에는 임전보국단 경북지부의 단체명이 나오지만, 김용주 등 경북지부 간부들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임보단서도 활동. 경북서 5기를 헌납
    경북 영일군은 애국기 헌납에 압도적인 성과를 보인 대표적인 지역의 하나이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2달 후인 1942년 2월 경북 영일군에서만 총 8대의 군용기가 헌납되었다. 경북지역에서 2월말까지 30대 가량 헌납된 것을 감안하면 일개 군 단위의 실적으로는 놀라운 결과라 할 수 있다. 이후 8월말까지 전국에서 헌납된 비행기는 280여대에 달했다. 도청소재재지가 아닌 지방에서 헌납기 명명식이 거행된 곳은 5대 이상의 실적을 올린 함남의 원산과 경북의 영일 단 두 곳이었다.(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출처 : 매일신보 1942년 2월 27일 석간 3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2. 3. 11.

    “북지방면에서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해 밤낮으로 악전고투를 계속하고 있는 장병들에게 도민을 대표하여 감사전보를 발송하자”고 제안 – 제15회 경북도회 회의
    尨大 豫算을 俎上에, 慶北道會 開幕(第15會), 劈頭 感謝電報 發送을 決議(방대 예산을 조상[도마 위]에, 경북도회 개막(제15회), 벽두 감사전보 발송을 결의)
    출처 : 매일신보 1942년 3월 13일 경상판 석간 3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3. 9. 8.

    징병제실시에 대한 감사의 뜻을 결의하기 위한 광고를 기명으로 게재
    광고 왼쪽 아홉 번째 줄 金田龍周(김용주) 게재
    (廣告)待望의 徵兵制 實施,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半島의 靑少年들이여((광고)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들이여)

    “대망의 징병제 실시, 지금이야말로 정벌하라, 반도의 청소년들이여… 난폭하기 짝이 없는 숙적 미영을 지금이야말로 물리쳐 멸망시키자. 징병제 실시에 대한 반도 동포의 간절한 요망을 드디어 구현했다. 반도 동포도 내지 장병으로 자리매김하여 당당히 대동아전쟁의 전열에 끼게 된 것이다. 우리 반도의 정예여. 일시동인의 천황의 위덕(大御稜威) 아래, 우리 반도의 인재가 빈틈없는 전우애로 미영 격멸의 전선에 서는 날이 온 것이다. 이 기쁨, 이 감사, 시정 30여년 역사에 전례가 없는 대전환이며 영광이다. 지금은 세계 대동란이 한창인데, 팔굉일우의 대이상을 내걸고 대동아의 천지에 깊숙이 진군하여 황국의 흥폐를 양 어깨에 짊어진 황군이 숙적 미영 격멸에 혁혁한 전과를 거듭하는 가을. 2천 5백만 반도동포, 특히 젊은 반도청년에 거는 기대가 실로 크다. 일억의 환호와 축복 속에 있는 반도의 젊은이들이여. 궐연히 일어나라! 결전이 자네들을 부른다.”
    출처 : 아사히신문(朝日新聞) 남선판(南鮮版) 1943년 9월 8일 4면 아사히신문 중선판(中鮮版) 1943년 9월 8일 4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3. 10. 2.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에 참석
    경북도회 의원 40명 가운데 조선인 참석은 2명. 친일파 서병조와 함께 김용주 참석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기 위해 일본정신문화를 키워온 신사(神祠)를 건립해 감사의 뜻을 발휘해야 한다”고 발언.
    銃後의 戰列에 總立, 第二日 公職者大會에 滅敵의 熱火漲溢, 各議員들의 熱論(총후의 전열에 총립, 제2일 공직자대회에 멸적의 열화창일[맹렬히 넘치다] 각 의원들의 열론[열띤토론])
     
    김전용주(경북도회 의원)씨가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는 길은 일본정신문화의 양양으로 각 면에 신사(神社)와 신사(神祠) 를 건립하여 경신숭조 보은감사의 참뜻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하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귀축 미영 격멸에 돌진할 것을 촉진해야
    출처 : 매일신보 1943년 10월 3일 석간 2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3. 10. 2.

    경북도회 의원 자격으로 전선공직자대회(全鮮公職者大會)에 참석해 징병독려, 천황께 귀일 등 발언
  • 황국신민이 되기 위한 5가지 구체적인 방안 발언, 특히 일본에 강제 징용 될 조선 청년들의 부모를 향해 “반도의 부모가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을 가질 것을 강조하는 발언
  •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고루 일본정신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고,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화를 꾀하여 이로써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그 구체적 방책으로 다음 5가지 항목을 들고 싶습니다. 첫째, 각 면에 신사(神祠)를 건립하여 모든 민중으로 하여금 신을 공경하고 신앙생활을 하게끔 하면 일본정신의 진수에 철저히 젖어들게 할 수 있습니다…(중략)그러므로 앞으로 징병을 보낼 반도의 부모로서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께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과 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받들어 모시어 질 그 영광을 충분히 인식하여 모든 것을 신께 귀일하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신에 대한 신앙을 철저히 하여 현세의 신이신 천황께 귀일하는 것입니다.

  • 출처 : 徵兵制施行感謝 敵米英擊滅 決意宣揚 全鮮公職者大會記錄(징병제시행감사 적미영격멸 결의선양 전선공직자대회기록) 全鮮公職者大會事務局(전선공직자대회사무국) 1944년 1월(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 1944. 7. 9.

    일제에 전투 비행기 헌납 선전 광고 기명 게재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라는 제목의 비행기 헌납 광고 기명 게재 왼쪽 두 번째에 金田龍周(김용주) 이름 나옴.
    “결전은 하늘이다! 보내자 비행기를!,  승리냐 죽음이냐의 결전 시국은 확실히 승리냐 죽음이냐의 결전의 한 가운데로 돌입하고, 더욱이 적은 공군으로써 승패를 결정지으려고 한다. 이때를 맞이하여 우리는 혁혁한 전과의 그늘에서 산화한 고귀한 영령 또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적의 맹렬한 공습하에서 묵묵히 (조국)수호에 애쓰는 우리 아버지, 우리 아들, 우리 형, 우리 동생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과 그리고 “좀더 비행기를”이라고 외치는 필사의 요청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출처 : 아사히신문 남선판 1944년 7월 9일 4면(자료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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