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이 '통치행위'라며 면죄부를 줬던 대법원에 정면으로 맞서는 하급심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11부(부장판사 김기영)는 지난 11일 긴급조치 9호 피해자 송상환씨와 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에게 모두 1억5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했다. 긴급조치 발령 자체가 위법이므로 국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였다.
목포에서 선원 생활을 하다 1968년 5월 북한 경비정에 납치된 송씨는 6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후 광주교도소 미결수 방에서 지내던 그는 ▲ 동료들에게 박정희 대통령 관련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 '북에선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다'고 하는 등 북 체제를 찬양했다는 혐의로 1977년 징역 2년 확정판결을 받는다. 법원은 그가 긴급조치 9호와 반공법,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과거사 피해자 두 번 울린 대법원
2011년 송씨는 당시 수사관들이 자신을 때리는 등 불법을 저질렀고, 긴급조치 9호 자체가 위헌이라며 재심을 청구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단 뒤 재심 재판부는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해 5월, 이 판결이 확정되자 송씨는 형사보상금 청구소송에 이어 국가배상금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헌법에 어긋나는 긴급조치 9호를 근거로 자신을 영장 없이 끌고 가 때리고, 전과자로 만든 국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지난 3월,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영장 없이 20여 일 동안 갇혔던 최문규씨의 국가배상금 청구소송을 대전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항소심 재판부(대전지법 민사합의2부·재판장 심준보 부장판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 자체가 위법하므로 국가는 최씨의 손해를 배상해야한다고 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판단이 잘못됐다고 봤다.
대법원은 긴급조치가 나중에 위헌으로 판명 나긴 했지만 1970년대 유신헌법에 근거한 긴급조치권 행사는 문제가 없다고 봤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여서 "이 일은 국민 전체에 대한 관계에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해 법적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이 판결은 긴급조치 피해자들을 두 번 울렸다. '유신헌법에 따라 영장 없이 피의자를 체포·구금한 수사기관이나 유죄판결을 선고한 법관의 직무행위는 1970년대만 해도 합법'이었다는 또 다른 대법원 판결과 함께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눈감아주는 근거로 쓰였기 때문이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설훈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 긴급조치 위반으로 무고한 옥살이를 했던 피해자들은 두 개의 대법원 판결 탓에 국가배상금 청구소송에서 줄줄이 패소했다.
지금까지 분위기라면 송씨 역시 패소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의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1부는 대법원과 다르게 판단했다.
재판부는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긴급조치를 발령할 수는 있다고 봤다. 하지만 그 요건은 국가의 중대한 위기상황 등에 한해야 하는데, 1975년 3월 13일 긴급조치 9호 발령 당시는 '비상사태'가 아니었다고 봤다. 발령 요건부터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내용 역시 문제였다. 긴급조치의 뿌리, 유신헌법은 형식상으로나마 표현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 등을 보장한다. 또 국가가 국민의 기본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도록 했다. 하지만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 등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행위를 두고 어떤 비판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재판부는 이 내용이 유신헌법조차 보장한 표현의 자유 등을 제한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긴급조치 발령은 정당?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어겨"
재판부는 무엇보다 "긴급조치 9호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한다"고 비판했다. 유신헌법전문에도 나오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모든 폭력적·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국민의 자치·자유·평등에 기초해 법치주의를 유지하는 것인데, 긴급조치 9호는 그 목적이 국민 탄압, 효과는 국가의 자의적 지배 강화라는 얘기였다.
이어 재판부는 "긴급조치 9호 발령행위는 그 내용이 헌법을 명백히 위반함에도 대통령이 국가긴급권을 행사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시작부터 끝까지 유신헌법을 위반한 긴급조치 9호의 발령을 강행했다. 재판부는 이 일이 "대통령의 헌법수호의무를 위반한 것"이라며 "고의 내지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라고 했다. 대법원 판결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정면으로 맞선 결론이었다.
16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긴급조치 변호인단은 이번 판결을 두고 "반가운 소식"이라고 했다. 이들은 논평에서 "최근 하급심 법원도 대법원 판결에 복종해 그나마 (국가가 책임져야한다는 피해자들의 주장을) 인용한 1심 판결을 뒤집었다"며 "(이번 소송도) 기대가 많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어 "이번 판결을 계기로 하급심 재판부의 성찰과 대법원의 전향적 판결을 기대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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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11부(부장판사 김기영)는 지난 11일 긴급조치 9호 피해자 송상환씨와 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 대한민국'은 원고에게 모두 1억5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했다. 긴급조치 발령 자체가 위법이므로 국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였다.
목포에서 선원 생활을 하다 1968년 5월 북한 경비정에 납치된 송씨는 6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후 광주교도소 미결수 방에서 지내던 그는 ▲ 동료들에게 박정희 대통령 관련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 '북에선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다'고 하는 등 북 체제를 찬양했다는 혐의로 1977년 징역 2년 확정판결을 받는다. 법원은 그가 긴급조치 9호와 반공법,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과거사 피해자 두 번 울린 대법원
▲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출입문 위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 오른손에 천칭저울을 글고 왼손에는 법전을 안고 있다. | |
ⓒ 권우성 |
2011년 송씨는 당시 수사관들이 자신을 때리는 등 불법을 저질렀고, 긴급조치 9호 자체가 위헌이라며 재심을 청구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단 뒤 재심 재판부는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해 5월, 이 판결이 확정되자 송씨는 형사보상금 청구소송에 이어 국가배상금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헌법에 어긋나는 긴급조치 9호를 근거로 자신을 영장 없이 끌고 가 때리고, 전과자로 만든 국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지난 3월,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영장 없이 20여 일 동안 갇혔던 최문규씨의 국가배상금 청구소송을 대전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항소심 재판부(대전지법 민사합의2부·재판장 심준보 부장판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 자체가 위법하므로 국가는 최씨의 손해를 배상해야한다고 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판단이 잘못됐다고 봤다.
대법원은 긴급조치가 나중에 위헌으로 판명 나긴 했지만 1970년대 유신헌법에 근거한 긴급조치권 행사는 문제가 없다고 봤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여서 "이 일은 국민 전체에 대한 관계에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해 법적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이 판결은 긴급조치 피해자들을 두 번 울렸다. '유신헌법에 따라 영장 없이 피의자를 체포·구금한 수사기관이나 유죄판결을 선고한 법관의 직무행위는 1970년대만 해도 합법'이었다는 또 다른 대법원 판결과 함께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눈감아주는 근거로 쓰였기 때문이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설훈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 긴급조치 위반으로 무고한 옥살이를 했던 피해자들은 두 개의 대법원 판결 탓에 국가배상금 청구소송에서 줄줄이 패소했다.
지금까지 분위기라면 송씨 역시 패소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의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1부는 대법원과 다르게 판단했다.
재판부는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긴급조치를 발령할 수는 있다고 봤다. 하지만 그 요건은 국가의 중대한 위기상황 등에 한해야 하는데, 1975년 3월 13일 긴급조치 9호 발령 당시는 '비상사태'가 아니었다고 봤다. 발령 요건부터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내용 역시 문제였다. 긴급조치의 뿌리, 유신헌법은 형식상으로나마 표현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 등을 보장한다. 또 국가가 국민의 기본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도록 했다. 하지만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 등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행위를 두고 어떤 비판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재판부는 이 내용이 유신헌법조차 보장한 표현의 자유 등을 제한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긴급조치 발령은 정당?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어겨"
▲ 긴급조치 위헌 결정에 환영하는 유신 피해자 2013년 3월 21일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 제1호, 제2호, 제9호에 대해 전원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리며 공식 사망선고를 했다. | |
ⓒ 유성호 |
재판부는 무엇보다 "긴급조치 9호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한다"고 비판했다. 유신헌법전문에도 나오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모든 폭력적·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국민의 자치·자유·평등에 기초해 법치주의를 유지하는 것인데, 긴급조치 9호는 그 목적이 국민 탄압, 효과는 국가의 자의적 지배 강화라는 얘기였다.
이어 재판부는 "긴급조치 9호 발령행위는 그 내용이 헌법을 명백히 위반함에도 대통령이 국가긴급권을 행사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시작부터 끝까지 유신헌법을 위반한 긴급조치 9호의 발령을 강행했다. 재판부는 이 일이 "대통령의 헌법수호의무를 위반한 것"이라며 "고의 내지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라고 했다. 대법원 판결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정면으로 맞선 결론이었다.
16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긴급조치 변호인단은 이번 판결을 두고 "반가운 소식"이라고 했다. 이들은 논평에서 "최근 하급심 법원도 대법원 판결에 복종해 그나마 (국가가 책임져야한다는 피해자들의 주장을) 인용한 1심 판결을 뒤집었다"며 "(이번 소송도) 기대가 많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이어 "이번 판결을 계기로 하급심 재판부의 성찰과 대법원의 전향적 판결을 기대한다"고 했다.
▲ 긴급조치 9호 발령 당시 기사. | |
ⓒ 조선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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