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준하와 함석헌 | |
ⓒ 함석헌기념사업회 |
장준하(1918~1975)가 패기 있고 기상이 활달한 '행동가'였다면 함석헌(1901~1989)은 촌색시 같이 수줍음을 잘 타는 내성적인 '사상가'였다. 장준하는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총을 들고 항일운동을 벌였던 반면 함석헌은 그의 격렬한 말과 글로 낙심에 빠진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고난을 극복할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었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장준하는 '야당정치인'으로 독재자 박정희와 정면대결을 벌였고 이 시기 함석헌은 '재야언론인'으로 박정희정권의 잘못을 누구보다 거침없이 비판했다.
장준하와 함석헌의 삶의 모습은 이렇게 겉으로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또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은 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 이승만·박정희 정권기에는 민주화운동가였다. 이 땅의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장준하와 함석헌은 '바늘과 실'처럼 한 마음 한 뜻으로 행동했고 그 과정에서 그의 가장 소중한 가족들은 말 못할 고초를 겪었다.
1975년 8월 17일 박정희 독재정권시절 장준하가 의문사 당한 후 함석헌은 장준하에 대한 인물평을 이렇게 했다.
"그(장준하)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 나라의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고쳐보려고 온갖 노력과 투쟁을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 함석헌의 평가처럼 장준하는 그저 삶의 매 순간을 오직 공익을 위해, 민족의 의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의 희생을 감수하며 온갖 노력과 투쟁을 한 이다.
나는 고상만을 지난 2004년 노무현정부 시절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직장동료'로 처음 만났다. 그때 그는 '장준하 의문사 사건' 조사관이었다. 1970년 대 말부터 '함석헌 환자'였던 나는 곧 정의감이 넘치는 '장준하 매니아' 고상만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고상만은 나의 후배이자 친구이면서 또 스승이 되었다.
그런 고상만이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를 발간했다. 이 책은 박정희 독재정권시설 중앙정보부가 불법으로 민간인들을 사찰하고 야당 국회의원의 전화를 도청하는 등 박정희 독재정권이 저지른 추악한 국가범죄에 대한 기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고상만의 말처럼 "중정이 장준하 선생을 상대로 한 사찰, 미행, 도청 그리고 사설 정보원 활용을 통한 정보 수집은 그때나 지금이나 해서는 안 될 정치 개입"이었다. 이렇게 박정희정권은 "국가의 안보와 상관없는 독재자의 권력 연장용 도구로서 국가권력을 이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처벌받아야 할 불법 행위이지 보호할 가치가 있는 국가 기밀이 아니다"라고 고상만은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에서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장준하에 대한 '중요 상황 보고'를 통해 친일장교 출신 독재자 박정희가 광복군장교 출신의 야당 국회의원 장준하를 얼마나 비열하게 불법으로 감시하고 탄압했는지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 고상만의 증언처럼 이 책을 통해서 "독재 권력이 국민의 인권을 어떻게 유린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똑똑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또한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추악한 불법범죄행위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에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커다란 불이익을 감수하고 당당하게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스승' 고상만의 용기에 깊이 감사드린다. 다음은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의 저자 고상만과 <함석헌평전>의 저자인 기자가 지난 몇 달간에 걸쳐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중앙정보부와 국가 권력기관 자료 토대로 책 썼다"
▲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책표지 | |
ⓒ 오마이북 |
"2015년 올해는 장준하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40주기를 맞이하는 해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는데 그 40주기에 선생님의 삶과 투쟁, 죽음에 대해 많은 이들이 잘 알 수 있도록 책을 쓰고 싶었다. 원래는 8월 기일에 맞춰 책을 내려 했는데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더 좋은 책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 지난 2012년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을 출간한 바 있다. 기존의 저서 그리고 다른 분들이 또 그동안 쓴 '장준하평전'과 이 책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전에 나온 장준하 선생님의 평전과 이 책의 큰 차이점은 증언을 하는 이가 다르다는 점이다. 이전의 평전들은 장준하 선생님의 유족이나 지인, 또는 동지들의 증언을 주요 토대로 삼았는데 이번에 내가 쓴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평전은 생전 장준하 선생님을 지독하게 감시했던 중앙정보부 등 국가 권력기관이 기록한 자료를 토대로 책을 썼다는 점이 큰 차이점이다. 이를 통해 장준하 선생님의 말씀을 그대로 담을 수 있었다. 나 역시 평전을 쓰며 매우 흥미로웠던 이유다."
- 20세기를 살다 간 장준하 선생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 특별히 젊은 세대들이 아는 일이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2015년 올해는 대한민국의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에 국가 차원에서 다양한 기념행사를 가졌는데 나는 장준하 선생님 자체가 '대한민국 광복 70년 역사'라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광복군으로, 또 해방후에는 <사상계> 언론인으로, 이어 독재 권력하에서는 민주 투사로, 이를 제도적으로 바꾸기 위해 국회의원을 지낸 장준하 선생님의 삶을 알게 된다면 나는 그것이 대한민국 광복 70년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지금의 젊은 세대가 장준하의 삶을 알아가는 것이 또 다른 역사 공부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을 가장 사랑한 사람, 바로 장준하였기 때문이다."
- 지난 1974년 1월 15일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징역 15년을 받고 민간인 신분임에도 군사재판을 받는다. 당시 박정희가 장준하 선생을 감옥에서 죽이려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런 소문이 사실이었나?
"사실이었다. 박정희는 장준하를 죽이고 싶었다. 이를 위해 제일 처음 한 일이 바로 1974년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한 것이다. 박정희는 이러한 긴급 조치 발동을 통해 장준하를 감옥에 15년간 갇아 두려고 했다. 당시 장준하 선생님은 56세였는데 만약 15년을 다 살고 나온다면 일흔이 넘는 나이가 된다.
이 당시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60세를 갓 넘었을 때였는데 협심증을 앓고 있어 건강이 좋지 않았던 장준하가 감옥에서 일흔을 넘겨 건강하게 나올 수 있다고 여긴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당시 미국 정부의 압력으로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를 불과 10개월 만에 석방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장준하 선생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결국 중단하지 않는 장준하 선생의 저항이 비극적인 의문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 장준하가 의문사 당하기 20여 일 전인 1975년 7월 말 그는 김대중을 찾아 갔다. 당시 그는 김대중을 찾아가 "당신이 못 움직이니 내가 움직이겠다"며 "희생을 각오하고 싸울 터이니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함석헌은 이를 놓고 "장준하가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죽음을 불러왔어, 저놈들이 둘이 합치면 어찌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했을 것이야"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장준하가 의문사 당하기 전 김대중과 화해한 것이 그가 의문사 당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하나?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은 매우 정확한 인식이었다. 실제로 2003년 12월 당시 나는 돌아가신 김대중 전 대통령님을 김대중도서관에서 만나 장준하 선생님의 사인에 대해 면담을 한 적이 있는데 이날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도 하신 말씀이 있다.
'장준하 선생님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피살되었다고 하는 의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물음에 대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나도 1973년에 암살당할 뻔했는데 장준하 선생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한 사실이 있다. 나 역시 박정희 권력하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님과 장준하 선생님이 화해하면서 거사를 논의하는 상황을 중정이 알게 되었고 결국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장준하 선생이 변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장준하 선생에 대한 국가기록 공개해야"
- 지난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이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 당한 날 당시 중앙정보부는 어떤 기록을 남겼나?
"단 한 장의 문서만 남겼다. 이는 대단히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 시간대 별로 별스럽지 않은 일조차도 장준하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기록으로 남겨놨던 중정이 정작 사건이 발생한 당일에는 사고가 발생하여 사망했다는 단 한 장의 문서만 남겨 놨다. 그리고 그 다음에 생산된 문서는 다음날인 18일 오전 7시 57분경, 장례 일정에 대한 협의를 담아 보고서를 작성했다. 무려 11시간동안 공백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사이 시간에 적어도 수차례의 추가 보고문이 있다고 확신한다. 의정부 지청 검사와 부검의 그리고 보안부대 고위 관계자가 사건 현장에 왔는데 이들이 무엇을 봤고 어떤 말을 했는지 기록하고 보고해야 하는데 이러한 내용이 일체 없다. 이는 중정 요원들조차 이상한 일이라고 조사과정에서 답한 바 있다. 지금이라도 이 기록은 반드시 공개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드시 진실을 밝힐 것이다."
- 장준하 사후 장준하 선생의 사인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던 국내기자는 연행, 구속되고 또 외신기자는 아예 추방되기도 했다. 장준하가 정말 단순 사고인 추락사를 당했다면 박정희는 왜 그토록 진실을 은폐하고 철저하게 언론을 탄압했을까?
"중정은 장준하 선생의 사인 의혹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많은 이들이 의혹을 제기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아니면 다른 어느 기관이 했나 살펴볼 것 같기도 한데 전혀 그러한 흔적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의혹을 제기한 <동아일보> 편집부 기자를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하는가 하면 의혹을 보도한 외신 기자를 추방하기도 한다. 장준하의 이름을 세상에서 지우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이러한 구체적인 내용을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에 잘 실었다.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놀라운 이야기들이 많다."
- 장준하는 박정희 독재정권하에서 모두 37번 연행되고 그중 3번 구속되었다. 그후 포천 약사봉에서 장준하 선생은 의문사 당했다. 그러나 당시 장안에서는 박정희가 죽은 장준하조차 두려워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는데?
"장준하의 사망 경위에 대한 보고는 대단히 엉성한데 반면 중정은 장준하 사후 장준하 선생의 유족과 동지들을 감시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예를 들어 함석헌 선생님이 장준하 선생 사후 두 달여 만에 명동에서 추모제를 하려고 하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1주기 기일 때는 더욱 그랬다.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장준하 선생을 박정희 권력이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알 수 있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죽은 사람조차 이렇게 두려워 할 지경이니 살아있는 장준하는 얼마나 무서웠겠나."
- 일제강점기에는 광복군 그리고 해방 후에는 언론인으로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정권에 맞섰던 장준하 선생이 마침내 1967년부터 정치인으로서 본격적인 현실참여를 결심하게 되는 중대한 계기는 어디에 있다고 보나?
"박정희 권력은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를 탄압했다. 판매방해와 세무조사로 이중, 삼중의 고통과 어려움을 줬다. 결국 장준하 선생은 더 이상 비판만으로는 박정희 권력을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것이 바로 국회의원 선거출마였다. 이를 통해 국회에서 싸워 박정희 권력의 부도덕성과 야만적인 탄압에 맞서고자 했다. 만약 장준하 선생에게 조금 더 많은 권한이 부여되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좋은 나라가 되었을 텐데... 많이 안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
- 장준하 선생은 부인과 3남 2녀의 가장이었다. 그러나 국회의원이 된 후에도 단 한 번 월급봉투를 집에 가져온 적이 없다고 한다. 또 그의 지인인 이행우 선생은 한 번 식사 시간에 우연히 장준하 선생 집을 방문하고 놀랐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국회의원인데 장 선생이 식사하는데 반찬이 깍두기 하나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다. 왜 장준하 선생은 그토록 가난했을까?
"높은 도덕성, 청렴성 그리고 가지지 못한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난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에서도 이러한 많은 일화가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장준하 선생은 국회의원 명함조차 만들지 않았다. 당시 국회의원 명함만 가지고 가도 마치 신분증처럼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시대였는데 장준하 선생은 그러한 부도덕한 일에 얽이지 않기 위해 아예 명함조차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이 책에 실린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와 국회의원 명함' 일화는 글을 쓰는 나조차도 먹먹한 감동을 느끼는 일이었다. 이처럼 정직하고 청렴한 정치인을 다시 만나고 싶다."
"장준하, 절대 추락사 하지 않았다... 명백하게 타살됐다"
▲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의 저자 고상만. | |
ⓒ 고상만 |
-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사건' 조사관을 지냈는데, 장준하 사건 조사관 입장에서 장준하 선생의 사인은 무엇이라고 추정하는가?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장준하 선생은 절대 추락사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명백히 타살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누가 죽였느냐'는 것으로 앞으로 국가차원의 조사 기구가 만들어져 그곳에서 책임있게 규명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여러 시나리오가 있는데 국가차원의 조사기구가 만들어진다면 내가 적극 지원하고 도와 남은 의혹을 명쾌하게 풀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자신 있다. 확실하게 진실을 규명할 것이다."
- 끝으로 장준하 선생이 한국역사와 사회에 남긴 소중한 유산은 무엇이라고 평가하는가?
"장준하 선생은 생전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고 말했다. 나는 그 말씀이 우리 사회에 남긴 소중한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역시 못난 후손이 되지 말아야 한다. 나라를 생각하는 애국심, 이웃을 생각하는 연대감, 그리고 사회적 약자와 더불어 함께 가겠다는 인권의식이 나는 장준하 선생이 나에게 준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시대는 다시 어둡지만 나는 긍정적으로 낙관한다. 장준하 선생이 꿈꾼 정직한 나라, 용기 있는 정의를 위해 나는 제2의 장준하처럼 살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한 명, 한 명 늘어난다면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다. 장준하 선생이 남긴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앞으로도 끊임없이 말하고 나 역시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함께 가자!"
* 저자 고상만은 인권 운동가,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 조사위원회'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등 의문사한 이들의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한다. 저서-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2012년), <다시, 사람이다>(책담, 2014년) 외 다수. 2012년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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