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초 연 난징 위안소 진열관 가보니…"잊지 않아야 미래도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관계자들과 함께 지난 23일 찾은 중국 장쑤(江蘇)성의 난징(南京)대학살기념관.
1985년 처음 세워진 뒤 1997년과 2007년에 걸쳐 확대 신축을 거듭한 기념관 곳곳에선 중국의 역사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문구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해 12월 13일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다음해 2월까지 12초마다 한 명씩, 무려 30만명(중국측 추산)을 살해했다. 시체가 7층으로 겹겹이 쌓인 채 발견된 '만인갱'과 "뛰어! 악마들이 오고 있다!"는 울부짖음마다 당시의 참혹함이 묻어있다.
갓난 손자의 주검을 안고 망연자실한 노인부터 강간 당해 실성한 여인의 실제 사진들은 조각상으로 재현됐다.
집단학살의 와중에 5만명에 이르는 부녀자들도 강간을 당한 채 희생되거나 목숨만 겨우 부지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곧바로 난징 곳곳에 마흔여 곳 넘는 위안소까지 만들어 욕구를 배설했다.
중국 정부는 대학살이 시작된 12월 13일을 지난해부터 국가추모일로 지정해 대대적인 추모행사를 여는가 하면, 지난 10월엔 관련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시켰다.
다만 우리 정부와 함께 추진했던 일본군 위안부 자료의 등재는 일본측의 방해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두 달이 흐른 지금, 한국과 중국은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일본군이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위안소로 운영했던 8개 건물 가운데 6곳을 개보수한 것으로, 3천㎡ 면적에 1600여점의 전시물과 680장의 사진이 생생하다.
난징대학살연구회 주청산 회장은 "일본군이 당시에 저지른 만행에 대한 공소 제기인 동시에 역사를 잊지 말고 평화를 사랑하자고 국민을 일깨우는 것"이라며 진열관의 의미를 설명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건물들이 주변에 즐비한 '금싸라기' 땅이지만, 중국 당국은 위안소 건물임이 확인된 2003년 곧바로 개발을 전면 중단했다.
임신한 채 찍힌 나체 사진으로도 잘 알려진 북한의 고(故) 박영심 할머니가 현장을 둘러본 뒤 "내가 끌려와 일하던 위안소가 맞다"고 증언하면서다.
난징에 체류중인 역사학자 신경란씨는 "리지항의 위안소 건물 8개 가운데 2개는 조선 여자들이, 3개는 중국 여자들이, 2개는 일본 여자들이 쓰는 식이었다"며 "위안부들은 매주 금요일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고, 일본군도 콘돔을 썼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전시물 가운데는 '돌격 앞으로'란 문구가 새겨진 일본군용 콘돔이나, 위안부 검사용 의료기기인 '내규기'(內窺器), 출산을 위한 시설과 도구들도 눈에 띈다.
지난 1일 열린 개관식에 참석한 윤주경 독립기념관장은 "한중 양국 여성들이 공동으로 피해를 겪었던 장소로, 일본군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증거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윤봉길 의사의 장손녀인 윤 관장의 얘기처럼 '공동 피해국'이어서 통(通)했던 한국과 중국이지만, 이제는 서로 통하기 힘든 길을 걷게 됐다.
그동안 한중 양국은 '반(反)인류 국가범죄'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가 차원의 사죄와 법적 책임을 일본에 요구해왔다. 반면 한일 양국은 28일 "최종적이자 불가역적"이라면서도, 법적 책임을 비켜간 합의를 도출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오래된 숙제를 풀었다"며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의 연내 타결에 애써 의미를 부여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북한 할머니까지 동상으로 세워가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남기려 애쓰는 중국과는 당분간 '간극'이 불가피하게 됐다.
제국주의 치하의 소녀들도 모자라, '역사의 기록'인 소녀상마저 위태롭게 만든 나라. 지금껏 공동 행보를 취해온 'G2' 중국이 앞으로 한국을 어떻게 바라볼지 '새로운 숙제'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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