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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anuary 1, 2016

시론] 국가권력의 근거에 대한 물음

2016년 병신년 새해 첫날인 1일 행주산성에서 바라본 일출. 서울 하늘의 구름 사이로 태양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연합뉴스
2016년 병신년 새해 첫날인 1일 행주산성에서 바라본 일출. 서울 하늘의 구름 사이로 태양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연합뉴스
2015년 성탄절 저녁 동네 근처 산에 올라가 ‘러키 문’을 보았습니다. 1977년 크리스마스 이후 38년 만에 뜨는 보름달이었습니다. 달은 구름에 숨기도 하고 구름 사이로 나타나기도 하면서 고요히, 장엄하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날 정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서 시리아와 리비아 등 분쟁으로 고통받는 난민과 이주자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테러 희생자들을 위로하면서 분열과 갈등을 종식시킬 것을 호소하는 성탄 메시지를 낭독했습니다.
2015년 9월2일 터키 보드룸 해안에서 빨간 윗도리와 짧은 반바지 차림에 감색 운동화를 신은 세살배기 난민 어린이 알란 쿠르디의 익사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사진에 담은 29살 여성 사진기자 닐뤼페르 데미르는 “아이의 침묵하는 몸이 지르는 비명을 표현할 유일한 방법이 사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사진은 시간당 5만3000회 리트위트되었고, 12시간 동안 컴퓨터 및 스마트폰 화면에서 2000만회 검색되었으며, 국제사회의 자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 압둘라는 ‘우리 가족의 죽음이 다른 많은 난민 가족에게 문을 열어줬다. 어린 알란이 이루지 못한 꿈을 다른 알란들이 이루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침묵하는 몸의 비명을 듣는 마음
해변에 얼굴을 묻고 동그랗게 누워 있는 알란의 사진을 보면서 ‘세월호 아이들’을 생각한 이는 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침묵하는 몸이 지르는 비명’을 어떤 마음으로 들었는지, 사람마다 달랐을 것입니다. 캄캄한 절망 속에서, 절망을 껴안고, 절망을 정화하면서 ‘아이들의 침묵하는 몸이 지르는 비명’을 간절하게 표현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비난하고 조롱한 사람들도 있었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참사 전날 화물차 운전자로 세월호에 탄 김동수씨입니다.
배가 기울자 그는 4층 우현 출입문으로 내려와 근처에 있던 소방호스를 늘어뜨려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직전까지 물에 떠 있는 이들을 끌어올려 20여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의 일상이 무너졌습니다. 그의 기억 속에는 그가 구한 아이들이 아니라 구하지 못한 아이들만 남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미안해서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밤만 되면 구하지 못한 아이들이 쫓아와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지난 10월 이사한 집에서 ‘가장 추운 방’을 자신의 방으로 골랐습니다. 편하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12월14일에는 세월호 청문회에서 “위증”이라고 외치며 가방에 있던 가위(근육운동을 자주 하는 김씨는 몸에 운동용 테이프를 붙이기 위해 가위를 늘 갖고 다닌다고 합니다)로 자신의 배를 찔렀습니다. 자해의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그는 “증인들이 거짓으로 답하니까 내 안의 창자라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참혹한 고백이었습니다.
고통은 신비한 생명체입니다. 그 생명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이어줍니다. 예수라는 한 인간이 ‘그리스도’가 된 것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병자를 낫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기적은 사람을 살리는 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 사람만 살립니까?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살려야지요. 특정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한갓 마술일 뿐입니다. 기적의 신성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스스로 그 사람이 되어 그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는 그분의 모습에 깃들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는 두 시선
김동수씨가 자해한 것은 세월호 침몰과 함께 죽어간 아이들의 고통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일부 언론도 그런 관점에서 보도했습니다. 그들에게 “고통에는 중립이 없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도 이상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저는 공동체의 건강 상태를 가늠하는 여러 가지 척도 가운데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침몰 이후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을 참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절망의 풍경도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텅 빈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아버렸습니다. 그 황폐한 풍경 역시 쉽게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의 언어를 따르다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무구한 아이들의 죽음을 제대로 진혼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은 국가권력의 존립 근거에 대한 물음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물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공동체로부터 달아난 쌍용차 노동자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쌍용자동차가 2646명을 대상으로 구조조정을 통보한 2009년 4월부터 2015년 4월까지 해고 노동자와 가족 2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지병 등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전율스러운 것은 공동체가 건강한 생명체로 기능하기 위해 지녀야 할 최소한의 기준이 무너졌거나, 무너지고 있는 표징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몇몇 언론과 일부 시민들만 관심을 보였을 뿐 메이저 언론들을 비롯한 주류권력집단들은 텅 빈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목숨을 끊는 이들은 노동자들만이 아닙니다. 병영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청년들이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육체가 형성되기도 전에 영혼을 망가뜨리는’ 학교 시스템을 견디지 못한 청소년들이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국가 가운데 으뜸입니다. 10대와 20대, 30대의 사망 원인에서 자살이 1위입니다. 자살은 사회구조적 요인이 반영된다는 관점에서 ‘사회적 타살’로 간주합니다. 맹자는 “정치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흉기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양혜왕 상편>에서 말했습니다.
2015년 12월18일 투신자살한 한 서울대생은 유서에 “이 세상의 합리는 저의 합리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죽는다는 것이 생각하는 것만큼 비합리적인 일은 아닙니다”라고 썼습니다. 그의 유서에서 ‘헬조선’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렸습니다.
절망 속에 깃든 희망의 씨앗
사람은 언어를 통해 존재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언어 안에 거주한다고 생각하여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아르바이트 전문 포털 ‘알바천국’이 만 19살 이상 30살 미만 청년 98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청년들이 꼽은 2015년 한 해 가장 공감하는 신조어는 1위가 ‘금수저, 흙수저’, 2위가 ‘헬조선’이었습니다. ‘헬조선’이라는 말 속에 청년들의 마음이 그만큼 깊이 고여 있는 것입니다.
언어는 어떤 거짓도 ‘사실’ 혹은 ‘진실’의 모습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기괴한 생명체이기도 합니다. 언론의 언어가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회의 거울’ 역할을 하니까요. 우리의 언론 언어를 들여다보면 갈기갈기 찢긴 언어의 처참한 육신에 늘 절망합니다. 우리 사회가 갈기갈기 찢겨 있는 것은 언론의 언어가 갈기갈기 찢겨 있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우리가 간절히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농부 백남기씨입니다. 그는 2015년 11월14일 저녁 정부의 농업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농민들과 함께 서울 도심에서 시위하다가 경찰의 직사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1월24일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백남기씨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고 그날의 시위를 ‘불법 폭력사태’로 규정하면서 “복면시위는 못하도록 해야 한다. 아이에스(IS)도 지금 얼굴을 감추고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국가권력의 존립 근거에 대한 물음을 다시금 곱씹게 한 발언이었습니다.
정찬 소설가
정찬 소설가
저는 지금 다가오는 새해의 새벽을 바라보며 희망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절망 속에 희망이 씨앗처럼 깃들어 있음을. 절망이 희망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씨앗을 키우기 위해서는 절망에 짓눌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절망을 응시하고, 절망을 껴안으면서, 절망을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슬픈 길 속에서.
정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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