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동향을 뒷조사한 파일, 즉 블랙리스트가 작성된 정황이 드러났다. 한 현직 판사가 블랙리스트를 둘러싼 의혹에 대해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글을 보내왔다.
판사는 블랙리스트 같은 비공식적이고 자의적인 인사 자료가 작성되어서는 안 되는 최후의 집단이다. 판사 뒷조사 파일이 작성된 정황이 최고 요직인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발탁된 A판사의, 판사직을 건 용기로 드러났다. ‘그런 뒷조사 파일을 관리하는 일을 할 수 없다.’ 이런 마음으로 사직서를 쓴 결의를 무마하기 위해 전대미문의 심의관 발령 당일(2월20일) 겸임해제(원래 법원으로 복귀)가 이루어졌다. 이는 당연히 뒷말을 낳았고 결국 기사화되었다. 3월7일 대법관인 고영한 당시 법원행정처장이 공지를 올려 무마에 나섰다. ‘A판사에 대한 부당한 지시는 없었으며 A판사가 원하지 않으므로 겸임해제 사유를 밝힐 수 없다.’ 법원행정처나 그 출신 일부 고위 법관들을 중심으로, A판사의 개인적 사정으로 겸임해제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거짓말이었다. A판사는 행정처에서 자신에게 겸임해제 경위를 밝히는 걸 원하는지 물어본 사실이 없다는 취지의 담담한 글을 올렸다. 공분이 일었다. 의혹이 명확함에도, 근거 없는 의혹 제기를 자제해달라는 거짓말이 담긴 고영한 대법관의 공지는 불에 기름을 부었다. ‘본연의 업무에 매진하는 법관에 대해 감사드린다’는 공지의 마지막 부분은, 일선 법관은 사법행정에는 관심을 끄고 재판 업무나 잘하라는 것이냐는 반발감을 불러일으켰다. 판사들이 들고일어났다. 진상조사가 청원되고, 판사회의가 여기저기서 개최되어 진상조사 논의 등에 참여할 법원 대표들을 뽑았다.
법원 내부 판사 약 500명이 가입된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연세대가 공동개최하는 토론회가 3월25일에 예정되어 있었다. 제왕적 대법원장, 비대화된 법원행정처를 통한 승진·관리구조의 개선방안을 미국·독일의 사례와 비교해 논하는 학술대회였다. 많은 법관이 사법행정·재판과 관련해 대법원장, 행정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취지의 설문 결과도 발표할 예정이었다. 판사 약 3000명에게 설문에 대한 답변을 요청한 이메일의 수신자에는 대법원장도 포함되었다. 대법관과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인 법원행정처 처장, 차장, 실장들이 대외비 문건 두 개와 메모를 만들어 수차례 회의를 열었다. 토론회와 설문조사 결과의 언론 배포를 막기 위함이었다. 올해 2월, 사문화된 연구회의 중복가입금지 조치를 실시하려던 것도 국제인권법연구회 가입 판사 수를 급감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판사들의 반발로 철회되었다. 그 과정에서 행정처는 국제인권법연구회 기획팀장인 A판사를 심의관으로 발탁해 3월25일 토론회와 설문 결과 발표를 무산·축소하는 일을 맡기려 했다. 부당한 지시였다. 의혹은 판사 동향을 뒷조사한 비밀번호가 걸린 파일이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컴퓨터에 있다는, 블랙리스트 논란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전국법관회의, 판사 블랙리스트 조사 의결했지만
의혹을 조사하는 법원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가 4월18일 법원 코트넷(내부 전산망)에 진상조사 보고서를 올렸다(<시사IN> 제502호 ‘제왕적 대법원장 권한 분산해야’ 기사 참조). 그런데 꼬리 자르기라는 의심을 살 정도로, 말단의 실행을 맡은 이 아무개 상임위원의 구체적 책임만 진상보고서에 언급되었다. 행정처 의사 결정 조직 차원의 사법행정권 남용이 있었는데, ‘행정처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라고만 했다. 실행한 아랫사람은 있는데 윗사람 중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가 없었다. A판사는 이 아무개 상임위원으로부터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컴퓨터에 저장된, 비밀번호 걸린 판사들 뒷조사 파일’에 대해 들었다고 진술했다. 대법원장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이인복 전 대법관이 이끄는 진상조사위원회가 기획조정실 컴퓨터 자료를 행정처에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전권을 위임받은 위원장의 요구를 거부한 행정처장의 행위는 항명이었다. 아니면 대법원장의 전권 위임이 말뿐이거나, 대법원장이 뒤로는 기조실 컴퓨터 자료를 주지 말라고 지시했거나. 이 아무개 상임위원은 진상조사위원회 판사 뒷조사 파일에 관한 말 자체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누구 말을 믿어야 하나? A판사는 환청에 시달린 건가. 진상조사위원회는 이 아무개 상임위원의 말을 믿었다. 블랙리스트 같은 파일은 없다고 했다.
위원장인 이인복 전 대법관에 대한 평소 신망에도 불구하고, 진상조사위 결론에 수많은 판사들이 고개를 저었다. 판사회의가 더 많이 열렸고, 이번에는 전국법관대표회의에 들어갈 대표들도 수십명을 뽑았다. 대표 수십명이 모여, 회의 개최 예정일까지 잡고 대법원장에게 전국법관대표회의 수용을 요청했다. 거부당하면 대표들끼리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열기로 했다. 대법원장은 마지못해 수용했고 6월19일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열렸다. 사법부 역사 60여 년 동안 발생한 사법 파동 중 이렇게 많은 판사회의가 열린 적이 없었다. 95% 이상의 판사들이 모두 선거 등 민주적인 방법으로 뽑혀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연 적도 없었다.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는 충분한 토론 끝에 84대14라는 압도적 찬성으로 블랙리스트 논란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결이 이루어졌다. 토론이 없는 일방적 진행이었다는 왜곡된 보도가 잘못임은 회의록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행정처장·차장·실장들과 기타 관여자에 대한 인적 책임 규명 의결, 전국법관대표회의 상설화 의결도 압도적 찬성으로 이루어졌다. 사필귀정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가 이상했다. 발단은 익명 게시판이었다.
그 무렵 행정처는 법원 코트넷 내부 게시판에, 도입 경위가 의심스러운 ‘익명 게시 요청’ 기능을 신설했다. 처음에는 실명을 부담스러워하는 일선 법관들과 진심으로 소통하고 싶어 하는가 생각했다. 첫 글부터 이상했다. 블랙리스트 논란 추가 조사나 전국법관대표회의의 정당성을 흔드는 글들이 익명으로 줄지어 올라왔다.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 대표가 많다’ ‘전국법관대표회의가 민주적 정당성이 있느냐’ ‘외부에서 집안싸움을 이용해 사법부를 흔드는 위기에서 단결해야 한다’ ‘추가 조사로 일을 키우는 게 사법부 독립을 해칠 것이다’ 등등. 압도적 비판 여론에 실명으로 축소·무마가 필요하다는 글을 쓸 용기를 못 내던 분들이었다. ‘아래’가 아닌 ‘위’를 위한 익명 게시판의 활용이라고 의심을 살 만했다. 행정처 고위 법관들이나 고등부장 이상의 고위 법관들 대다수가 블랙리스트 논란 추가 조사와 전국법관대표회의에 비판적이다. 조선·동아·중앙일보 등 일부 언론도 ‘판사노조화 우려’ ‘특정 연구회 출신 비율이 높다’는 식의 색칠하기 기사, 사실을 왜곡한 ‘일방적 회의 진행’ 따위 기사를 쏟아냈다. 회의 다음 날인 6월20일, 이런 기사를 인용해 전국법관대표회의 결의를 공격하는 익명 글들이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출근한 판사들을 맞았다. 여기에 반발하는 글들이 폭발적으로 게재되었다. 익명으로 다시 반박하는 글들과 부딪치며 양쪽에서 일부 과한 표현이 나왔다. 언론은 ‘집안싸움’ ‘법원 내홍’ ‘키보드 워리어’ 따위 선정적인 보도의 먹잇감으로 이를 이용했다. 이렇게 보면 참 성공적인 흔들기였다. 그 와중에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가 결과를 내놓았다. 이 아무개 상임위원의 징계만 건의하고, 행정처 실장들에게는 면죄부를 주었다. 고영한 대법관(전 법원행정처장)에게는 ‘주의 촉구’라는, 전가의 보도인 구두경고를 권했다. 블랙리스트 논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대법원장은 윤리위 결정을 방패막이로 전국법관대표회의의 블랙리스트 논란 추가 조사와 책임 규명 결의를 거부하고, 제도 개선에 관한 전국법관대표회의 상설화 결의만 수용했다.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였다. 허탈했다. 3~4개월 동안 3000명 판사들이 기울인 노력은 뭔가.
방패막이로 전락한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
사실 이는 진상조사 직후 대법원장이 이 아무개 상임위원만 대기발령을 내고 사건을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에 회부할 때 이미 예상된 시나리오였다. 대법원장이 모든 위원을 임명, 위촉하는 공직자윤리위원회는 대법원장·행정처로부터 독립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회부 직후, 문화체육관광부 블랙리스트 작성 핵심 연루자로 지목된 박명진 전 문화예술위원장이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인 사실이 밝혀져, 급히 사퇴하는 희극이 발생했다. 이 모든 결론의 전조였는지도 모른다.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는 2009년 신영철 전 대법관의 촛불 사건 재판 개입 때, 탄핵 사유가 될 만한 심각한 징계 사유를 구두경고로 끝내는 방패막이로 활용된 전력이 있다. ‘진상조사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 회부→구두경고’의 시나리오는 무서울 정도로 동일하다. 새 위원장으로 위촉된 전효숙 전 헌법재판관의 신망도 무기력했다.
역사는 반복되려고 하는데, 나는, 판사인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일부 언론은 이쯤에서 ‘법원 집안싸움’을 접고 합심해 제도 개선 논의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대법원장의 블랙리스트 논란 추가 조사 결의 수용 거부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실명 글을 법원 코트넷 내부 게시판에 올렸다. 같은 취지의 글들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한다.
자신의 과오를 숨김없이 밝히고 책임지는 철저한 자성, 그런 자성을 거부한 대법원장과 행정처는 제도 개선을 논할 자격이 없다. 개혁 대상이 철저한 자성을 회피하며 개혁 주체로 나서는 적반하장의 태도로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추가 조사로 사법부의 다른 비밀이 유출될 수 있다는 막연한 우려보다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해소의 공익이 훨씬 크다. 최근 부산 문 아무개 전 판사에 대한 비위 사실 통보에도 행정처가 구두경고로 넘어간 것이 도 넘은 ‘제 식구 감싸기’라며 비판받았다. 판사 블랙리스트 논란을 묻어두고 간다면 이와 뭐가 다를까. “판사 블랙리스트 논란은 덮어두고 가면서, 문체부 블랙리스트는 판관으로서 단죄하려 하는가, 내로남불 아니냐”라는 비아냥도 듣고 싶지 않다. 나는 이미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조사에 대한 명확한 거부 의사를 밝힌 대법원장에게 기대를 접겠다. 추가 조사를 다시 요구한들 또 거부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나는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고, 직접 행동에 나서겠다. 결국 사법부가 블랙리스트 논란을 묻어두고 간다면 나는 판사의 직을 내려놓을지 고민하겠다.
차성안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판사)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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