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대국민담화와 신년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예상대로 불통과 독선, 재탕을 넘어 삼탕까지 이어진 정책 자화자찬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시작 전에 유출된 질문지와 별 차이가 없었던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질문 순서와 질문 내용을 보면 기자회견이 아닌 드라마를 찍었다고 봐야 할 정도였습니다.
청와대 정영국 대변인은 ‘지금부터는 기자 여러분들의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지명을 받으신 분들은 소속과 이름을 밝히고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하실 기자 분들은 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는 말을 했습니다. 질문하실 기자는 손을 들어 달라는 말을 질문마다 했지만, 미리 정해 놓은 순서와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뻔히 순서대로 질문을 받을 거면 그냥 지명하지 굳이 손을 들라고 말하고, 또 자신들의 질문을 받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왜 기자들은 손을 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청와대와 출입기자들의 짜고 치는 고스톱을 보면서 과연 미국은 어떻게 백악관 출입기자들이 취재를 하고 질문을 하는지 알아봤습니다.
‘허니문처럼 달콤해? 집요한 백악관 출입기자’
2013년 7월 20일 헬렌 토머스라는 여성 기자가 92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헬렌 토머스는 ‘백악관의 전설’이라 불리는 기자로 1961년부터 2010년까지 무려 10명의 대통령이 거쳐 간 백악관 기자실에서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그녀가 앉는 백악관 브리핑룸 기자석의 맨 앞자리는 이름까지 새겨진 지정석이 됐고, 89세 생일 때는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케이크를 들고 그녀를 축하하기도 했습니다. 헬렌 토머스가 대통령으로부터 생일 케이크를 받았으니, 대통령들과 아주 친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백악관의 골칫덩이 중의 하나였습니다.
백악관의 브리핑 시간이나 대통령 기자회견에는 항상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통에 백악관 대변인은 그녀의 질문을 ‘고문’이라고 하기도 했고, 조시 W 부시 전 대통령은 아예 토머스의 질문을 외면하는 반항(?)을 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백악관 출입기자들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새로 대통령이 취임하면 백일까지는 대통령과 정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허니문 기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취임 초에 언론이 무조건 비판을 하기보다 어느 정도 일을 할 시간을 준 다음에 비판하겠다는 의도입니다.
헬렌 토머스 기자는 2008년 질병으로 반년 만에 복귀하자마자, “앞으로 오바마 대통령과의 허니문은 아마 하루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하며 허니문 기간이 끝난 뒤에는 날카로운 질문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미국 백악관 기자들은 대통령에게 집요할 정도의 질문을 하는데, 가끔 질문 중에는 한국인의 사고방식이나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꿈도 못 꿀 질문을 해댑니다.
카터 대통령과의 허니문이 끝나자마자 백악관의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기자: “현재 대통령의 직계가족 중 출가한 사람들까지 백악관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경비는 대통령 월급에서 지급됩니까? 아니면 백악관 예산으로 충당하고 있습니까?”
백악관: “기자는 백악관 시스템을 모릅니까? 대통령의 기혼 자녀의 생활 경비는 대통령 월급에서 나가고 있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대통령의 세금납부 명세서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의 가족이 백악관에서 사는데 무슨 월급과 세금명세서가 필요하냐는 의문이 들겠지만, 미국 문화상 미혼 자녀는 백악관 생활이 가능하지만, 기혼 자녀는 분가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기자는 아들,며느리,손자와 함께 살고 있던 당시 카터 대통령이 혹시 세금으로 자녀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했고, 이에 대변인은 소득세 납부명세서까지 받고서야 물러났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지자 백악관 대변인은 “오렐 섹스는 있었으나 성행위는 없었다”고 클린턴을 변명하는 논지의 브리핑을 합니다. 그러자 백악관 출입기자였던 ABC의 샘 대니슨은“오렐 섹스는 섹스가 아닌가? 그렇다면 섹스와는 뭐가 다른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백악관에서 때아닌 섹스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대한 논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의 윤창중 대변인 성추행 사건과 비교하면 백악관 기자들이 얼마나 집요하고 철저한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백악관 기자들이 집요한 질문을 할 수 있는 배경은 미국 대통령들은 짧게는 몇 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가량 기자들의 다양한 질문을 받고 답변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대통령과 기자의 질문과 답변 시간이 많으니 당연히 날카롭고 깊이 있는 질문이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백악관에는 기자들의 질문과 대통령의 답변 모두가 동영상으로 녹화되고 대부분의 행사 자료가 백악관 홈페이지에 녹취록 전문과 함께 올라간다는 점입니다.
백악관 브리핑 자체가 대부분 공개되기 때문에 기자들은 더 날카로운 질문을 통해 국민이 알고 싶은 이야기를 끄집어내려고 노력하고, 대변인이나 대통령은 곤혹스럽지만 그래도 답변을 많이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미국 언론이 완벽한 언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미국에서도 기자들이 정치권력이나 로비스트에 유착된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일정이 자세히 공개되거나 청와대에서 벌어지는 브리핑을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만큼은 한국보다 훨씬 개방적입니다.
‘청와대 출입기자, 그들은 충견에 불과했다’
대통령을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했던 백악관 출입기자들과 비교하면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어떠했을까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의 대한민국에서 권력자를 가까운 거리에서 취재하는 청와대 출입기자는 예로부터 정치권력의 핵심이라고 부를 정도로 출세와 성공의 자리였습니다.
예전에는 청와대 출입기자를 1호 기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권세와 위력, 상징성이 대단했습니다. 1호 기자이면 기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해야 하지만 그들은 기자가 아닌 충견에 불과했습니다.
청와대 출입기자를 하다가 정치에 입문한 케이스도 많고, 이런저런 요직으로 내려간 경우도 종종 있어서 청와대 출입기자는 대체로 언론과 권력의 다리 역할을 하는 인물로 선정됐습니다.
대통령과 언론사의 매개체 역할을 하다 보니, 박정희 정권부터 청와대 출입기자는 기자로서의 취재 능력이나 실력보다 철저히 권력자의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로 결정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시작된 출입여부 승인제도와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제와 보도지침은 청와대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쓸 수 있는 사람들로만 채워졌고, 노태우 정권까지 청와대 출입기자는 청와대가 결정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김영상 정권까지 청와대의 입으로 채워졌던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언론사가 각자 알아서 출입기자를 선정하고 청와대는 일절 개입하지 않는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보면 대통령을 감시하기 보다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시절처럼 화려한 미사여구로 대통령을 찬양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MB정권 시절 청와대 관련 기사는 언제나 열심히 일하고 국격을 높이는 대통령으로 묘사됐습니다. 누가 보면 마치 기자가 아니라 청와대 홍보실에서 제작한 홍보 영상으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최영철 KBS 청와대 출입기자는 MB재임 시절 청와대의 입으로 받아쓰기를 잘하더니, 퇴임 행사 생중계 방송에 출연해서 “이 대통령은 마지막 라디오연설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일꾼’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했다”며 “일꾼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이 대통령”이라는 극찬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정권부터 청와대 출입기자에게 각종 혜택과 금품을 제공하던 관행은 참여정부 시절 근절되는가 싶더니, MB정권에서 청와대 출입기자에게 해외연수를 시켜준다거나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는 등의 혜택으로 바뀌며 부활했습니다.
MB정권은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당근과 채찍을 통해 잘 조련시켰습니다. 해외연수와 대통령 표창이라는 당근을 주기도 했으며, 청와대 출입기자 등급제를 통해 밀착 취재와 편의 제공을 말 잘 듣는 기자 순서로 배당하기도 했습니다. 철저히 청와대 입맛에 길든 청와대 출입기자 사이에서도 별종 기자가 나오는 데, 이럴 경우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자체적으로 징계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2008년 YTN 돌발영상이 이동관 수석이 “제가 이 말을 하지 않은 것으로 해주세요’라는 화면까지 내보내자, 청와대 출입기자단 간사로 구성된 춘추관 운영위원회는 YTN기자들에게 ‘3일간 청와대 출입금지’라는 징계를 내렸습니다.
만약 청와대가 백악관처럼 행사와 브리핑 내용을 동영상으로 녹화해서 홈페이지에 올리고 있었다면, YTN 징계는 아예 성립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례를 통해 정보의 공개와 은폐, 조작이 청와대에서부터 자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자의 밥이 된 백악관, 청와대에 조련된 애완동물들’
박근혜 정권 들어서면서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아예 청와대 내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내부 관계자(?)의 입을 빌려 노무현 대통령의 사생활을 줄기차게 까발리던 출입기자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찍소리도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청와대를 보면 인터넷도 없던 시절의 구중궁궐보다 더 깜깜합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언론과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윤창중 성추행 사건입니다. 2013년 5월 MBC는 9시 뉴스에서 윤창중 사건을 연일 Top으로 보도합니다. 그러다가 5월 15일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주최하는 언론사 정치부장 만찬이 있자마자 그날 저녁에는 생뚱맞게 북극 소식이 Top으로 보도됩니다. 앞서 빌 클린턴과 르윈스키 스캔들 사건의 백악관 기자회견과 비교해보면 대한민국 청와대와 언론의 관계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기자 간담회는 물론이고 기자들의 질문과 답변을 받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청와대 대변인과 비서실장도 기자들의 질문을 회피하거나 17초짜리 대국민사과문을 대독하는 일들을 벌입니다.
만약, 백악관에서 이런 식으로 17초짜리 사과문을 대독하고 질문도 받지 않고 나간다면 아마 그날 언론은 백악관을 비판하는 기사로 폭주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하게 지나갔습니다.
|
▲헬렌 토머스가 취재하고 만났던 역대 미국 대통령들. 백악관 브리핑룸에서 열리는 대통령 기자회견은 맨 앞자리에 있던 헬렌 토머스의 ‘대통령님 안녕하십니까?’로 시작 “감사합니다. 대통령님’으로 끝을 맺는 것이 관례였던 시절이 있었다. |
아이엠피터는 2013년부터 1인 언론사를 만들까 심각하게 고민하다 언론사 등록이 무산되자 정치미디어라는 형태로 ‘The 아이엠피터’라는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헬렌토머스처럼 청와대 출입기자로 취재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2006년 헬렌 토머스는 부시 대통령에게 “이라크 침공으로 수천 명의 미군과 이라크인들이 죽었다. 모든 침공 이유는 거짓으로 드러났다. 이라크를 침공한 진짜 이유가 뭔가”라고 질문을 해서 부시를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청와대 출입기자 중에 대놓고 저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기자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청와대에 의해 조련된 순한 애완동물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헬렌 토머스가 청와대 출입기자였다면 그녀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런 질문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순서대로만 질문을 받을 거면 왜 손을 들라고 했습니까? 사람 놀립니까?. 기자회견을 하지 않는 이유는 말을 못해서입니까? 머리가 나빠서입니까?”
“북핵을 예측 못 했다고요?. 북핵실험이 있기 전 국방부 직할부대인 국군화생방방호사령부가 영변 5MWe 원자로에서 삼중수소 생산 가능성과 이를 통한 수소폭탄 전 단계인 핵융합무기 실험을 예측한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못한 게 아니라 안보에 무관심한 정권 아닙니까?”
“국민과 한 약속은 파기할 수 없다면서 왜 대통령은 공약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까?”
“대선부정 관련 재판이 계속 지연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시 대통령이 막고 있는 거 아닙니까?’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언론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언론을 쥐고 있는 사람이 청와대입니다. 그래서 저런 질문을 절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헬렌 토머스는 “언론은 정례적으로 대통령에게 질문할 수 있는 특권을 갖고 대통령에게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아이엠피터도 한 20년 뒤에 청와대 출입기자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대통령 앞에서 국민이 알고 싶은 속 시원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일개 정치블로거인 아이엠피터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대통령에게 일문일답할 수 없는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나는 국민을 대표해 거칠고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는 헬렌 토머스의 말 때문입니다.
대통령과 국민과의 직접 대화 기회가 없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기자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는 것은 대통령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백악관은 사전 질문 내용과 차례, 답안을 외워 답변하지 않기에 대변인을 ‘사자떼의(기자) 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과연 국민을 대표해 대통령에게 거칠고 어려운 질문을 하고 있습니까? 청와대 출입기자는 권력자에 의해 조련된 말 잘 듣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대통령을 항상 물어뜯을 수 있는 사자가 돼야 합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