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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February 8, 2017

오카모토 미노루(박정희) '조센징 토벌' 명령하면 ‘요오시!' 고함질러 '오카모토 미노루 두번째 창씨개명은 한국인의 흔적을 지워보려는 몸부림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 하면, 웬만한 지식층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조국의 경제를 살린 위대한 영웅’, ‘민주국가를 쿠데타로 전복한 반란군 수괴’, ‘ 권력을 악용해 수많은 정적을 없애고 유부녀를 포함한 수백 명 부녀자들을 농락한 희대의 바람둥이 독재자’, ‘최고 악질 친일파’, ‘골수 공산주의자’, 등 완전히 색다른 모습의 얼굴로 혼란스러울 정도다.

김현철 전 언론인
MBC 서울본사 기자
한국일보 시카고주재기자
중앙일보 마이아미지국장
한겨레 마이아미지국장
미주한겨레저널 창간 발행인
'시대의 어둠을 밝힌다' 저자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의 압력과 자사 이익에 눈이 멀어 시녀 노릇을 자임해 왔던 조선 중앙 동아 및 KBS MBC 그리고 일부 인사들의 저서 등의 어용언론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진실을 국민들에게 알릴 언론 본연의 자세’는 팽개치고 군사독재정권의 요구대로 대부분의 국민들을 ‘바보’로 세뇌시킨 결과, 이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위 사실 중 맨 첫 부분, 즉 ‘조국의 경제를 살린 영웅’ 이외의 사실은 믿으려 하지 않는 서글픈 세태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재작년에 어느 여론 조사 기관이 국내의 엘리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공무원 대상 여론 조사에서 ‘어느 신문을 가장 신뢰하느냐?’고 물었더니 ‘한겨레’, 그 다음이 ‘경향’, ‘한국’의 순서였음은 독자가 가장 많다는 ‘조’ ‘중’ ‘동’이 신뢰 면에서는 하위를 면치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국가기록원’, ‘민족문제연구소’, ‘미군정 정보보고서’, ‘전 미국여기자협회장이오, 한국인으로서는 맨 처음 백악관을 출입한 문명자(1930~2008) 원로 기자의 저서 ’내가본 박정희와 김대중‘ 등을 참고, 위의 어용 언론만 접하고 있는 대다수 인사들의 올바른 정세 판단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 박 전 대통령의 ’진짜 얼굴‘을 서툰 솜씨로나마 있는 그대로 그려 보려 한다.

1939년 3월 경북 문경보통학교(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박정희(당시 23세, 일본 명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교사는 나이가 많아서(20세까지만 가능) 일본군 만주 신경군관학교(2년제)에 입학이 어렵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保國 滅私奉公), 즉 "충성을 다해 일본에 보답하고, 나를 죽여 국가를 받들겠다."며 일왕에게 바치는 충성혈서(忠誠血書)를 써서 만주신경군관학교로 보내 입학 허가를 받아냈고 졸업식 때 수석 졸업자 연설에서 “대동아공영권을 성공시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사쿠라처럼 죽겠다”고 강조했는데 일제 하 36년 간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지망생 중 혈서로 일왕에 맹세한 경우는 ‘다카키 마사오’ 교사가 유일무이한 경우다.

만주신경군관학교에서 3등 안으로 졸업한 생도들에게 일본 정규 육사 편입 특전을 줌에 따라 일본육사 3년생으로 편입한 ‘다카키 마사오’ 소위는 졸업 후 관동군 23사단 72연대 소대장이 된다. 그 때까지도 자신의 이름에 불만이 많던 ‘다카키 마사오’ 소위는 당시 일본 연대장 오카모토(대좌=대령)의 성을 본 따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또 다시 개명한다.  

조선인(조센징)이 창씨 개명한 냄새가 나는 '다카키 마사오'(다카키(高木)란 성은 고령 박씨에서 따왔고 마사오(正雄)란 이름은 정희(正熙)를 변용 한 것) 보다는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가 창씨개명을 의심받지 않은 진짜 일본 이름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한국인의 흔적을 지워보려는 몸부림이었으니 진짜 친일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주에 주둔 중 ‘오카모토 미노루‘ 소위는 소대장으로 독립군(당시 중공 팔로군 소속) 소탕 작전에 무려 110회나 출전, 혁혁한 공로로 중위로 진급한다. 그 후 악질 친일파 조선인들로만 구성된 ‘간도토벌대’에 소속돼 중대장으로 더욱 큰 공을 세웠으니 그로 인한 애국지사들의 희생은 상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 때 조센징 중대장이 이끄는 일본군에 사살당한 독립군 전사들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이 민족반역자!’하고 절규하지 않았을까?

일본육군사관학교 교장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 장군은 “다카키 마사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고 그의 의심할 수 없는 친일 자세를 극찬한바 있다.

조선,동아,경향,MBC의 워싱턴 특파원을 역임했던 문명자 기자가 1972년 도쿄에서 어렵게 ‘다카키 마사오’와 함께 만주신경군관학교에서 생도로 있던 일본인 장교 출신 두 명을 찾아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조센징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우뢰같이 고함을 치곤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 아냐?’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고 회고 했다.

문기자는 그 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KCIA(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도쿄에서 정적 김대중을 납치해 동해바다에 수장하기 직전 헬리콥터로 급거 출동한 주한 미정보요원의 제지로 살해 계획이 실패한 후부터 철저한 ‘반 박정희’ 노선으로 선회, 백악관에 보고된 자료를 토대로 박 정권의 각종 비리와 인권유린 관련 기사를 낱낱이 폭로, 조국의 민주화를 적극 지원, 국내 언론을 무색하게 했으며 박정권이 없애버려야 할 ‘반한인사 제1호’가 된다.

그 후 문 기자는 박 정권으로부터 ‘빨갱이’(?)로 몰려 부모 친척의 장례식마저 참석할 수 없었다. 이 때 조선일보로 송고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굵직굵직한 박정권의 부정 비리 기사들은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그 기사를 미끼로 조선일보 사장은 청와대에서 계속 두둑한 사례를 받는 결과를 초래했기에 소속 언론사를 자꾸 바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인 기자로서는 처음으로 당시의 국제 거물인 중국의 뎅샤오핑을 비롯해 북한의 김일성 등과 단독 인터뷰를 했던 문 기자는 박정권이 자신을 ‘반한인사’ 또는 ’친북인사‘로 낙인찍는데 대해 “유신정권 때인 70년대까지는 ‘반한인사’로 불렸는데, 80년대 말 남북고위급(김대중 김일성) 회담이 본격화된 후 북한 취재에 나서면서 ‘친북인사’로 호칭이 바뀌더라. ‘반한인사’ ‘친북인사’란 한국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용어로, 전혀 타당하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반(反)박정희인사’나 ‘반(反)유신인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친북’도 그렇다. 남북은 같은 민족이다. 서로가 ‘친북’도 하고 ‘친남’도 해야 한다...” 고 받아쳤던 정의감과 패기로 가득 찬 원로 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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