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 11조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2008년 이후 대한민국에는 법 앞에서 모든 국민이 똑같이 평등한 것은 아니다. 노회찬은 대한민국에서 "만인이 평등해야 하는데 만 명만 평등하다"는 명언을 남겼다. <동물농장>의 조지 오웰이라면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 그러나 일부는 더 평등하다"고 말할 것이다.
더 평등한 "만 명" 중에는 예컨대 이건희처럼 자기가 더 평등하다는 사실을 가급적 숨기기 위해 대중적으로 저자세를 유지하는 축도 있다. 법 위에서 특권을 누리기만 하면 되지 굳이 그 사실을 떠벌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보는 영리함이다. 반면에 그런데 더 평등한 특권 계급임을 굳이 숨길 필요조차 없다고 보는 자들도 꽤 있다.
내가 아는 자들만 해도 이 지면을 채우고 남기 때문에, 셋만 거론한다. 나경원과 신영철과 이명박이다.
나경원은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자기 아버지가 "소유한"-학교가 개인 소유물인지 따지지 않는 항간의 말버릇을 짧게 개탄하기 위해 여기서는 따옴표만 붙이고 넘어간다-학교를 감사에서 빼달라고 17대 국회의원 정봉주에게 청탁한 사실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회피했다.
핑계인즉슨, "제 선거와 관련해 자꾸 아버님과 관련된 의혹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선 제가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법 앞에 평등한 박원순에 대해서는 이미 작고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40여 년 전에 13세 소년의 병역에 관해 어떤 의도를 가졌을지를 가지고 흑색선전을 감행한다. 법 앞에 더 평등한 나경원은 이 선거에서 자기 아버지 얘기는 빼달라고 당당하게 (즉, 뻔뻔하게) 요구한다.
이것은 박원순에 대한 흑색선전과 견줄 때 이중 잣대일 뿐만 아니라, 자체로도 언어도단이다. 정봉주의 증언이 이번 선거와 맺는 연관은 일차적으로 나경원이 국회의원이라는 헌법적 직위를 이용해 교육과학기술부의 감사라고 하는 공무를 방해했는지 여부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그의 아버지 나채성 "소유의 학교"에 어떤 비리가 있었는지 여부는 상관이 있더라도 단지 2차적인 상관뿐이다.
나경원이 내뱉는 말 가운데는 이처럼 진위를 검증하기로 하면 바로 들통 나는 자가당착과 언어도단이 많다. 자위대 기념 행사인지 "모른 채 갔다가 되돌아 왔다", 장애인 목욕 장면을 촬영해서 내보낸 후 "전속 사진사가 설치한 것, 나는 몰랐다" 등등, 목록이 길게 이어진다. 이런 식으로 발출되는 "몰랐다"는 소리에는 "더 이상 파헤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협박이 논리적으로 함축된다. "내가 너희를 수사할 권력은 있지만 네가 나를 수사할 권력은 없다"는 자만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자만에도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다. 신영철의 경우를 보면 이 자만의 근거를 엿볼 수 있다. 신영철은 대법관이 되기 위한 인사 청문회에서 명백한 위증의 죄를 범했다. 2008년의 촛불 집회 피의자를 담당하는 재판부 배정을 임의로 해놓고서도 "컴퓨터로 배당했다"며 위증한 것이다.
이 사실이 드러나자 대법원에서 진상 조사에 착수했지만, "재판 관여라 볼 수 있다", 즉 안 볼 수도 있다는 모호 어법으로 사건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신영철은 재판부 배당 관여와 위증 등, 적어도 두 차례 법을 어겼다. 그럼에도 처벌은커녕 사안 자체를 덮어버리기로 작정한 사법 체제에 의해서 대법관에 올라 법을 대변하고 있다. 더 평등한 자가 법을 대변하는 자리에 앉아 있으니 더 평등한 자들이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영철은 뭘 믿고 저럴 수 있었던 것일까? 법 위에 권력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은 정연주, 김정현, 김윤수, 황지우, 노종면 등을 법을 악용해서 해임했다. 정연주, 김정현, 김윤수는 해임 무효 판결을 받았지만 복직은 하지 못했다. 그랬던 이명박이 내곡동 사저 구입에 관한 추문이 터지자, 없었던 일로 뭉개고 넘어가려고 한다.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은 법이라는 갈고리로 걸어서 자리에서 쫓아내고, 자신과 관련된 의혹은 그냥 덮어버리고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법을 철저하게 권력의 도구로 악용하는 주인공이 청와대의 주인 노릇을 하기 때문에, 법률가를 자처하는 인간 중에 일부는 스스로 권력의 사냥개 노릇을 자청한다. 더 평등한 자들이 법 위에 군림해도 괜찮은 상태임을 눈치 채고, 뒤질세라 더 평등한 자의 일원이 되고자 기를 쓰는 셈이다.
법이 권력의 주구로 전락한 데에는 인민의 책임이 작지 않다. 인민이 법을 방기하지 않고, 스스로 주인노릇을 꼼꼼하게 챙겼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민이 법을 방기하지 않는 상태란 곧, 인민이 권력의 전횡을 용납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권력이 전횡을 부리는 방식은 폭력과 은폐다. 크레인 위에서 농성한 지가 300일에 육박하고 있는 김진숙을 무력으로 끌어내리지 못하고, 강정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진압하지 못하는 데서 나타나듯이, 이명박 정권도 폭력을 능사로 삼을 수만은 없는 한계를 약간은 느끼고 있다. 반면에 권력의 은폐는 2008년 이후 대한민국에서 일상사로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제 민의의 심판을 받겠다고 나선 나경원 캠프에 흑색선전과 잡아떼기는 거의 유일한 선거 전략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고찰로부터 10월 26일에 치러지는 서울 시장 보궐 선거의 중요한 의미 하나가 도출된다. 이 선거는 무엇보다도 은폐의 습성에 젖은 권력을 청소하는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권력의 은폐가 선거에서 심판받는다면 나머지 국민들보다 더 평등한 일부가 사라질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물론 이런 자들은 나머지 국민들보다 더 그악스러운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한 번의 선거로 사라지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단번에 사라지지는 않을지 몰라도, 더 평등한 신분을 대놓고 자랑하는 무모한 야만을 날마다 목격해야만 하는 참극만은 모면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2008년 이후 대한민국에는 법 앞에서 모든 국민이 똑같이 평등한 것은 아니다. 노회찬은 대한민국에서 "만인이 평등해야 하는데 만 명만 평등하다"는 명언을 남겼다. <동물농장>의 조지 오웰이라면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 그러나 일부는 더 평등하다"고 말할 것이다.
더 평등한 "만 명" 중에는 예컨대 이건희처럼 자기가 더 평등하다는 사실을 가급적 숨기기 위해 대중적으로 저자세를 유지하는 축도 있다. 법 위에서 특권을 누리기만 하면 되지 굳이 그 사실을 떠벌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보는 영리함이다. 반면에 그런데 더 평등한 특권 계급임을 굳이 숨길 필요조차 없다고 보는 자들도 꽤 있다.
내가 아는 자들만 해도 이 지면을 채우고 남기 때문에, 셋만 거론한다. 나경원과 신영철과 이명박이다.
ⓒ프레시안 |
핑계인즉슨, "제 선거와 관련해 자꾸 아버님과 관련된 의혹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선 제가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법 앞에 평등한 박원순에 대해서는 이미 작고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40여 년 전에 13세 소년의 병역에 관해 어떤 의도를 가졌을지를 가지고 흑색선전을 감행한다. 법 앞에 더 평등한 나경원은 이 선거에서 자기 아버지 얘기는 빼달라고 당당하게 (즉, 뻔뻔하게) 요구한다.
이것은 박원순에 대한 흑색선전과 견줄 때 이중 잣대일 뿐만 아니라, 자체로도 언어도단이다. 정봉주의 증언이 이번 선거와 맺는 연관은 일차적으로 나경원이 국회의원이라는 헌법적 직위를 이용해 교육과학기술부의 감사라고 하는 공무를 방해했는지 여부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그의 아버지 나채성 "소유의 학교"에 어떤 비리가 있었는지 여부는 상관이 있더라도 단지 2차적인 상관뿐이다.
나경원이 내뱉는 말 가운데는 이처럼 진위를 검증하기로 하면 바로 들통 나는 자가당착과 언어도단이 많다. 자위대 기념 행사인지 "모른 채 갔다가 되돌아 왔다", 장애인 목욕 장면을 촬영해서 내보낸 후 "전속 사진사가 설치한 것, 나는 몰랐다" 등등, 목록이 길게 이어진다. 이런 식으로 발출되는 "몰랐다"는 소리에는 "더 이상 파헤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협박이 논리적으로 함축된다. "내가 너희를 수사할 권력은 있지만 네가 나를 수사할 권력은 없다"는 자만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자만에도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다. 신영철의 경우를 보면 이 자만의 근거를 엿볼 수 있다. 신영철은 대법관이 되기 위한 인사 청문회에서 명백한 위증의 죄를 범했다. 2008년의 촛불 집회 피의자를 담당하는 재판부 배정을 임의로 해놓고서도 "컴퓨터로 배당했다"며 위증한 것이다.
이 사실이 드러나자 대법원에서 진상 조사에 착수했지만, "재판 관여라 볼 수 있다", 즉 안 볼 수도 있다는 모호 어법으로 사건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신영철은 재판부 배당 관여와 위증 등, 적어도 두 차례 법을 어겼다. 그럼에도 처벌은커녕 사안 자체를 덮어버리기로 작정한 사법 체제에 의해서 대법관에 올라 법을 대변하고 있다. 더 평등한 자가 법을 대변하는 자리에 앉아 있으니 더 평등한 자들이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영철은 뭘 믿고 저럴 수 있었던 것일까? 법 위에 권력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은 정연주, 김정현, 김윤수, 황지우, 노종면 등을 법을 악용해서 해임했다. 정연주, 김정현, 김윤수는 해임 무효 판결을 받았지만 복직은 하지 못했다. 그랬던 이명박이 내곡동 사저 구입에 관한 추문이 터지자, 없었던 일로 뭉개고 넘어가려고 한다.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은 법이라는 갈고리로 걸어서 자리에서 쫓아내고, 자신과 관련된 의혹은 그냥 덮어버리고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법을 철저하게 권력의 도구로 악용하는 주인공이 청와대의 주인 노릇을 하기 때문에, 법률가를 자처하는 인간 중에 일부는 스스로 권력의 사냥개 노릇을 자청한다. 더 평등한 자들이 법 위에 군림해도 괜찮은 상태임을 눈치 채고, 뒤질세라 더 평등한 자의 일원이 되고자 기를 쓰는 셈이다.
법이 권력의 주구로 전락한 데에는 인민의 책임이 작지 않다. 인민이 법을 방기하지 않고, 스스로 주인노릇을 꼼꼼하게 챙겼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민이 법을 방기하지 않는 상태란 곧, 인민이 권력의 전횡을 용납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권력이 전횡을 부리는 방식은 폭력과 은폐다. 크레인 위에서 농성한 지가 300일에 육박하고 있는 김진숙을 무력으로 끌어내리지 못하고, 강정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진압하지 못하는 데서 나타나듯이, 이명박 정권도 폭력을 능사로 삼을 수만은 없는 한계를 약간은 느끼고 있다. 반면에 권력의 은폐는 2008년 이후 대한민국에서 일상사로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제 민의의 심판을 받겠다고 나선 나경원 캠프에 흑색선전과 잡아떼기는 거의 유일한 선거 전략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고찰로부터 10월 26일에 치러지는 서울 시장 보궐 선거의 중요한 의미 하나가 도출된다. 이 선거는 무엇보다도 은폐의 습성에 젖은 권력을 청소하는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권력의 은폐가 선거에서 심판받는다면 나머지 국민들보다 더 평등한 일부가 사라질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물론 이런 자들은 나머지 국민들보다 더 그악스러운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한 번의 선거로 사라지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단번에 사라지지는 않을지 몰라도, 더 평등한 신분을 대놓고 자랑하는 무모한 야만을 날마다 목격해야만 하는 참극만은 모면할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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