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대통령 박근혜가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을 다시 구사했다. 그는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비선 최측근’으로 알려진 최순실이 연관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관해 “의미 있는 사업에 대해 의혹이 확산되고 도를 지나치게 인신 공격성 논란이 계속 이어진다면 문화 융성을 위한 기업들의 순수한 참여 의지에 찬물을 끼얹어 기업들도 더 이상 투자를 하지 않을 것이고 한류 문화 확산과 기업의 해외 진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박근혜는 “문화체육 분야를 집중 지원하고 우리 문화를 알리며 어려운 체육 인재들을 키움으로써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수익 창출을 확대하고자 기업들이 뜻을 모아 만들게 된 것이 두 재단의 성격”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박근혜의 이런 발언들이 왜 ‘유체이탈 화법의 극치’인지를 살펴보기 위해 최순실이 자신과 딸 정유라의 ‘사익(私益)’을 위해 K스포츠재단을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여러 언론이 취재를 통해 밝혀낸 사실들을 중심으로 짚어보기로 하자.
전국경제인연합(전경련) 회원사인 대기업들로부터 288억원을 ‘출자’받아 K스포츠재단이 설립된 바로 이튿날인 지난 1월 12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주)더블루케이라는 법인이 설립되었는데 최순실은 실제 소유주로서 ‘회장’이라고 불렸다. 그 회사의 사업목적은 K재단과 판박이나 다름없었다. 최순실의 측근들은 K재단에 출근 도장을 찍고 블루K로 가서 일했다. K재단의 돈을 빼돌리는 창구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던 블루K에 대해 최순실은 “블루K의 블루는 청와대를 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난 2월 말 독일에는 더블루케이라는 유한회사가 설립되었다. 그 회사의 사업보고서에는 유일한 주주로 최서원(최순실의 개명 뒤 이름)이 올라 있었다. 언론에 익명으로 제보한 그 회사 관계자는 한국과 독일의 블루K에 대해 “두 회사 모두 K스포츠재단의 돈을 합법적으로 독일로 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페이퍼컴퍼니로 최순실씨의 오랜 심복들이 일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
10월 18일자 한겨레에는 충격적인 르포가 나왔다. 기자 송호진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현지 취재를 통해 밝힌 사실들을 전하는 기사 제목은 ‘독일에서 꼭꼭 숨은 최순실 모녀는 20개 방의 저택에서 10여명의 지원단과 살고 있었다’이다. 정유라를 돕는 8~10명 가량의 지원단은 통역, 운전 등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는데, 그가 사용하는 말과 10마리 정도 개를 보살피는 것도 그들의 주요 ‘업무’라고 한다. 최순실이 올림픽 경마종목에서 딸이 금메달을 따게 만들려고 거액의 주거비와 인건비를 들이면서 ‘현대판 왕족’처럼 생활하는 것을 박근혜는 알고나 있었을까?
정유라가 누구인가? ‘부정 입학’으로 130년 전통의 이화여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가 하면 강의 출석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유치한 리포트를 내고도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보다 높은 학점을 받은 바로 그 사람이다. 어머니 최순실은 딸에게 제적시키겠다고 경고한 지도교수를 찾아가 “교수 같지도 않고 뭐 이런 게 다 있냐”라고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화여대는 지도교수를 교체해버렸다.
박근혜는 2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만들기 위해 대기업들로부터 800억원을 모으는 일을 주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정책조정수석 안종범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 의원 노웅래는 지난 9월 27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두 재단에 출연금을 낸 대기업 고위 관계자의 말이 담긴 녹취록을 공개했다. “안종범 수석이 전경련에 얘기해서, 전경련에서 일괄적으로 기업들에 할당해서 (모금)한 거다”라는 내용이었다. 실질적으로 강제모금을 했다는 뜻이다.
▲ 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
박근혜에게 최순실은 ‘영혼의 스승’ 최태민의 딸에 불과할까? 언론의 보도를 보면 최순실은 단순히 박근혜와 ‘언니, 동생’ 사이를 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최고의 실권자’임이 분명하다. 미국 LA에서 나오는 선데이저널 발행인 연훈은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부터) 이미 박근혜 정권에서 최순실이 스타렉스 밴을 타고 비밀통로를 통해 자유롭고 빈번하게 청와대를 출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청와대 경비까지도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미디어오늘에 밝힌 바 있다. 동아일보 논설위원 박제균은 9월 22일자 칼럼에 “항간에는 최씨가 청와대를 출입할 때 몰라본 파견 경찰이 ‘원대 복귀’ 조치됐다는 얘기도 돈다”고 썼다.
최순실은 청와대를 무상출입하는 것만이 아니다. 지난 19일 JTBC는 ‘박근혜 대통령을 만든 회사’ 대표로 알려진 국가대표 펜싱선수 출신 고영태를 인터뷰한 기사를 방송했다. 최순실과 함께 블루K를 설립해 이사를 맡기도 했다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회장이 제일 좋아하는 건 연설문 고치는 일”인데 “연설문을 고쳐놓고 문제가 생기면 애먼 사람을 불러다 혼낸다.” 인터뷰에 동석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 이 모는 “회장은 최순실이고, 대통령의 연설문을 일일이 고친다는 뜻”이라며 “애먼 사람은 청와대 비서관들”이라고 부연 설명을 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최순실은 단순히 박근혜의 ‘비선 실세’가 아니라 청와대 홍보수석을 제쳐놓고 연설문을 마음대로 고치는 ‘상왕’ 같은 존재인 셈이다. 박근혜가 최순실을 청와대 공식 참모로 기용하고 그런 일을 맡긴 것이 아니라 ‘국가원수’의 연설문을 사적인 측근이 좌지우지하게 했다면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탄핵소추를 당해야 마땅하다.
박근혜는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만약 어느 누구라도 재단과 관련해서 자금 유용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 엄정히 처벌을 받을 것”이라면서도 “더 이상 의혹이 생기는 일이 없도록 감독기관이 감사를 철저히 해서 모든 것이 투명하게 운영되도록 지도 감독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검찰이 엄정하게 수사를 하기보다는 관할 부처가 감사를 철저히 하라는 ‘지침’을 내린 것으로 들린다. 두 재단 설립 의혹에 대한 시민단체의 고발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지방검찰청 형사8부는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가 열린 바로 그날, 출입국 기록 등을 통해 최순실이 독일로 출국한 상태임을 확인했지만 소재는 파악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수사가 불가능하다면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기겠다는 뜻인가?
‘최순실 게이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인권변호사 출신 박찬운(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 10월 1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명쾌한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는 정부와 여당이 이 사건에 대해 침묵을 고수하는 데 대해 “관련자 모두가 사실상 자백한 거나 마찬가지다. 의제(擬制)자백했다는 말”이라고 주장했다.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므로 여기에 중요 부분을 소개한다.
“의제자백이란 말이 있다. 소송상 용어인데 당사자가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명백히 다투지 아니 할 때 자백으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 (···) 지금 야권과 언론은 연일 최순실이라는 대통령의 최측근(수족이 아닌 오장육부라고 함)에 대해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최순실이 청와대를 등에 업고 기업들로부터 수백억원의 삥을 뜯어 미르와 K스포츠 재단을 만든 다음 사유화했다는 것이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는 독일에서 승마훈련을 받는데 방 20개가 달린 호텔 전체를 얻어서 사용하고 재단 직원 10여명이 수행했다고 한다. 가히 국가원수급 예우다. (···) 이런 게 만일 다 사실이라면 그것은 부당행위를 넘어 범죄행위이고 그 책임은 종국적으로 대통령이 질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그 직을 유지할 수 없다. 내려와야 한다.”
10월 20일 리얼미터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박근혜에 대한 지지율은 전 주보다 4.2%포인트 급락한 27.2%로 나타났다. 취임 후 최저치이다. 부정평가는 3.5%포인트 오른 65.5%였다. 조사 대상자의 3분의 2가 그를 불신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박근혜는 ‘오불관언’이다. 최순실처럼 ‘진실한 사람’만 있으면 정권을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인가? 그가 어떤 일을 저지르든지 박근혜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다면 차라리 ‘나는 최순실 정권 밑에 살고 있다’고 고백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 이 글은 <뉴스타파>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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