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위 청탁금지법 매뉴얼 '경찰, 부서장에 경조사비 불가'
곳곳서 "사회상규 무시한 과도한 규제" 불만 목소리
(수원=연합뉴스) 최해민 기자 = 경기남부지방경찰청 모 부서 소속 경찰관 A씨는 얼마 전 난감한 일을 겪었다.
부서 과장(총경)이 부친상을 당해 문상을 가려다가 동료 직원들로부터 "청탁금지법 때문에 부조금은 내면 안 된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A씨는 감찰부서에 문의했지만, 경기남부청 감찰계도 "안 그래도 경찰청과 국민권익위에 전화로 물어봤는데 '직무 관련성' 때문에 부조금을 내면 안 된다는 해석을 받았다"고 답변했다.
5만원을 부조금으로 내려던 A씨는 결국 생각을 접었다.
A씨는 "공직자로서 부정청탁을 방지한다는 법 취지는 누구보다 공감하지만, 전통적인 미덕까지 문제 삼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며 "어떤 상관보다 청렴하기로 소문난 과장이 아버지를 여의고 가슴 아파하는데 5만원 부조금도 못하는 게 이 법의 취지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A씨 사례처럼 직무 관련성이 있으면 한 푼의 금품도 주고받아서는 안 된다는 '청탁금지법 제8조' 규정에 대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과도한 규제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온다.
법 조항을 그대로 해석하자면, 교수에게 캔커피 하나를 건넨 대학생, 시골 마을 교사에게 정성 들여 키운 호박 하나를 건넨 할머니, 담임교사에게 카네이션을 선물한 학생조차 법을 위반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찰 조직 안에서는 부서장의 경조사에 부조금을 한 푼도 낼 수 없어 사회상규에 맞지 않는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높다.
경찰이 국민권익위 매뉴얼을 기반으로 작성해 배포한 내부 지침을 보면, 경조사비는 시행령이 정한 10만원 내에서 허용되나 직무와 관련된 사이면 대가성 여부를 불문하고 10만원 이하라도 제재대상이 될 수 있다.
이 지침에서 뜻하는 '직무 관련성'은 뇌물죄에 대한 대법원 판례를 준용하고 있는데, 판례를 보면 "뇌물죄에서 말하는 직무에는 법령에 정해진 직무뿐 아니라 그와 관련 있는 직무, 과거에 담당했거나 장래에 담당할 직무 외에 사무분장에 따라 현실적으로 담당하지 않는 직무라도 법령상 일반적인 직무권한에 속하는 직무 등"이라고 돼 있다.
쉽게 말해, 과거에 담당했고 현재 담당한 직무와 관련 있는 사람과 앞으로 담당할지 모르는 직무와 관련된 사람까지 모두 다 포함해 '직무 관련자'로 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엔 또 하나의 예외 조항이 있는데, 직무 관련성이 있어도 원활한 직무수행, 사교, 의례 등 목적이 인정되면 10만원 이하의 경조사비 수수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경찰은 적용되는 조항과 예외 조항을 모두 검토한 뒤에야 국민권익위가 별도로 배포한 공직 기관 직종별 매뉴얼에 '8가지 경조사 자가진단 리스트'를 근거로 부서장의 경조사엔 부조금을 내선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8가지 체크리스트 중 7번째 항목은 "인사·예산·감사 또는 평가 등을 직접 받는 소속기관 공직자 등이 제공하는 경조사비"로 기술돼 있다.
경기남부청 감찰계 관계자는 "국민권익위가 배포한 직종별 체크리스트는 단 1개만 해당해도 경조사비를 수수할 수 없게 돼 있다"며 "관혼상제에 따른 품앗이 성격인 경조사비까지 원천 차단한 이 규정이 과도한 규제라는 의견들이 많아 서면으로 권익위에 질의해 놓은 상태다"고 말했다.
이어 "어찌 됐든 권익위가 정한 가이드라인이 통용되고 있는 만큼 문제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경조사비 규정을 보수적으로 적용해 부서장에게 부조금을 주지 않는 게 좋겠다고 안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경기남부청 안에서는 총경급만 보더라도 지방청 수사과장, 기동단장, 용인동부서장 등이 자녀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
한 경찰관은 "어떤 법이 제정될 땐 그 법이 우리 사회에 이상적으로 뿌리내린 모습이 예측 가능하고, 그 모습이 사회적으로 유익해야 한다"며 "청탁금지법이 이상적으로 정착한 대한민국 사회는 부정청탁이 사라질진 모르나, 정이 없고 팍팍한 사회가 될 것 같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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