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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November 17, 2015

무서운 평행 이론, 1953 창경호 vs. 2014 세월호 [국민참여를 통한 세월호 진상규명] 꼬리 자르기 수사, 솜방망이 처벌, 다른 참사에 대한 '초대장'

300명이 넘게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1953년 창경호 침몰 사고, 150톤급인 창경호가 실을 수 있었던 화물은 100톤가량으로 알려졌으나 사고 당시에는 무려 200톤이 넘는 짐을 실었고, 승선 정원 240명을 훌쩍 뛰어넘은 300명이 넘게 승선해 사고로 이어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선장, 선원 그리고 선주 이렇게 13명만 기소됐고, 과적과 과승을 단속하지 않았던 공무원 중에는 기소된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1970년 12월에는 제주도 성산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남영호가 전라남도 여수시 소리도 인근에서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선박회사 측은 승객 정원이 295명이었음에도 338명의 승객을 태웠다. 과승이었다. 또 적재적량은 130톤이었으나 540톤이 넘는 화물을 적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선주인 강 씨 일가가 해운회사 외에 미곡상·양조장 등을 운영하던 서귀포의 대표적 유지였던 까닭에 사고를 두고 정경유착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남영호의 경우 구조 과정도 매우 부실했다. 침몰 당시인 1시 20분부터 25분 사이에 비상주파수로 수차례 구조 신호(SOS)를 타전했으나, 전달되지 않았다. 일본 어선이 위 구조 신호를 먼저 확인해 일본 순시선에 알렸고, 일본 순시선이 우리나라 해경대에 이 사실을 알렸는데 우리나라 해경대는 응답이 없었다고 한다. 일본 순시선이 기타큐슈의 해상보안본부를 통해 우리나라 해경대에 연락할 것을 요청했고, 위 해상보안본부에서는 12시 30분까지 부산과 제주의 우리나라 해경대에 무선으로 연락했으나 응답이 없었다. 12시 <교도통신>에서 사고 사실을 보도했으나 이때도 우리나라 해경대는 '연락을 받은 바 없다'는 입장만 밝혔다.

그러나 이후 조사를 통해 여수어업무선국에서 사고 당시 이미 남영호의 구조 신호를 받고도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법원은 직무 유기로 기소된 해운국 공무원과 해경 등 4명에 대해서는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이들이 과적을 제대로 단속하지 않고 무선을 못 받은 것은 인정되지만, 고의로 직무를 유기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사고 직후 검찰이 고위 공무원과 해운회사 간의 유착 고리, 정부의 늑장 대응 사유 등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채 이들 말단 공무원만 기소했을 때 언론들은 "'송사리'만 잡고 수사 매듭"이라며 비웃었다. 그런데 이들 송사리마저 무죄로 풀려난 것이다.

1993년 10월 10일, 362명의 승객을 태운 서해훼리호가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침몰했다. 초기에는 사망·실종자를 140명으로 추정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망자 수가 크게 늘어 최종적으로 292구의 시신이 인양됐다. 승객은 정원인 221명을 훨씬 초과해 탑승했고, 승무원은 규정된 인원인 12명보다 5명이 부족했다고 한다. 운항 횟수를 늘려달라는 요청을 지속적으로 무시해 과승의 구조적 원인을 제공하는 동시에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승에 대해서는 제대로 감독하지 않았다. 서해훼리호 사고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물어야 했지만 제대로 처벌받은 공무원은 없었다. 당시 군산해운항만청 계장이 선박 검사를 부실하게 한 책임으로 업무상 과실 치사 혐의로 기소됐으나 집행 유예 판결을 받는 데 그쳤다. 

ⓒ프레시안(최형락)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때는 서울시동부간선사업소장이 금고 1년 6개월에 처해지긴 했으나 서울시에서 성수대교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공무원들 대부분이 집행 유예를 선고받는 데 그쳤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경우 역시 삼풍백화점 대표 등 23명이 기소됐으나 서울시에서 삼풍백화점의 안전을 책임졌어야 할 공무원 대부분이 집행 유예를 선고받는 데 그쳤다. 1999년 23명이 숨진 씨랜드 화재 사고의 경우 인허가 관련 비리 혐의를 받았던 군수는 처벌되지 않았다. 192명이 숨진 2003년의 대구 지하철 참사의 경우 참사 당시 역사 내에 있었던 비상유도등, 피난로, 소화 설비 어느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 사고가 참사로 번지는 주요 원인이었다고 평가됐지만 그 책임을 져야 할 대구 지하철공사의 공무원들 중 재난 대처 책임 소홀을 이유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오로지 기관사와 관제사만 참사의 책임을 지고 기소됐다.

밥 먹듯이 반복되는 대형 인명 참사. 이 대형 참사에서 또 하나 반복되고 있는 것은 위에서 본 것처럼 감독 혹은 관리를 해야 할 공무원에 대한 꼬리 자르기식 수사와 솜방망이 처벌이었다. 이러한 꼬리 자르기식 수사와 솜방망이 처벌로는 정책을 결정하거나 혹은 관리나 감독을 내실 있게 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사람들로 해금 기존의 문제를 바꾸도록 하기 어렵다. 사고는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고, 설사 사고가 일어나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데 어떻게 눈앞에 보이는 편함과 이익을 포기하겠는가.

세월호 참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참사가 발생했을 당시에도 국가는 골든타임을 넘어서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사라진 것처럼 보였고, 그 공백에는 혼란과 혼동만이 있었다. 이 혼란과 혼동이 사고를 참사로 변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 실패의 책임을 현장에 나와 있었던 해경 123정장에게만 모두 지웠다. 과연 타당할까? 꼬리 자르기의 반복은 아닐까?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찰청에서 지원 의사를 밝히지만 해경은 해경과 해군이 모두 구조 가능하다며 이를 거절한다. 


중앙 119의 인력 투입 역시 특별한 이유 없이 거절한 데 이어 미군의 제안도 거절했다. 해경은 미국 해군이 구조 장비가 없어서 자발적으로 철수한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미 해군 공식 뉴스 사이트의 "미 해군은 사고 인지 후 즉시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배의 방향을 전환했다. 그러나 한국군이 출동하는 것의 효율성이 미군의 자산 이용 필요성을 앞서므로, 우리는 한국 현장 책임자의 요청이 있으면 지원을 제공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미국이 구조 장비가 없어서 자발적으로 철수했다는 정부 발표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또한 문화재청 소속 수중발굴선이 사고 당일 현장에 투입됐다가 별다른 임무 없이 쓰레기를 수거하거나 민간 잠수사를 지원하는 등의 일만을 하며 1주일을 대기하다 22일이 돼서야 수색 작업에 참여한 사실이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진성준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공개한 국방부 자료를 보면, 해양경찰이 해군의 최정예 잠수요원인 해난구조대(SSU) 대원과 UDT 요원조차 "민간업체(언딘)의 우선 잠수를 위해 접근 통제"한 것으로 나타났다.


침몰 이튿날인 4월 17일 물살이 느린 정조 시간에 19명의 정예요원이 대기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민·군을 통틀어 UDT와 SSU는 최고의 해난 구조 장비와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초기 투입되지 못한 것이다. 해양경찰은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해군의 활동을 첫날부터 통제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해군은 세월호 침몰 당일인 16일 오후 2시 9분께 사고 현장에 도착해서 오후 6시에 SSU 요원 6명을 투입해 세월호 내부에 하잠색(잠수사들을 위한 인도선)을 처음 설치했다. 그러나 해군이 설치한 하잠색을 해양경찰 잠수팀과 언딘이 우선 사용함에 따라 결국 해군은 동시에 구조작업을 펼치지 못하게 됐다.

이러한 결정들을 할 수 있고, 했던 것은 현장에 나와 있었던 해경 123정장이 아니었다. 그 윗선이다. 더 나아가 해경 123정장은 적절한 지시를 받았는지도 의문이다.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의하면, 당시 목포해양경찰서장은 관련 규정(수난구호법 제5조 제2항 및 동법 시행령 제5조 제2항)에 따라 지역구조본부장으로서 현장을 지휘하는 책임자임에도 사고 발생 초기에 아무런 지휘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현장 상황과 동떨어진 지시만 하는 등 현장 지휘를 태만히 했음이 밝혀졌다. 또한 서해지방해양경찰청장은 수난구호법 제5조 등에 따른 광역구조 본부장으로서 사고 발생 후 가용할 수 있는 구조 인력이 시급하게 현장으로 이동될 수 있도록 해야 함에도 이를 제대로 지시하지 않고, 사고 초기 현장과 어떠한 교신도 하지 않았으며, 123정이 현장에 도착한 9시 43분경 뒤늦게 현장 보고를 받고도 적절한 구조 지휘를 하지 않았다. 

123정장에 대한 사건에서 법원 역시 123정장에 대해 약한 형을 선고하면서 그 이유로 "피고인을 '현장지휘관'으로 지정한 후에도 해양경찰청 상황실에서는 사고 당일 9시 36분경 피고인에게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2분 22초 동안 통화하고,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상황실 등에서도 피고인과 TRS로 20여 회 통신해 보고하게 하는 등 피고인으로 해금 구조 활동에 전념하기 어렵게 했으며, 평소 해경들에게 조난 사고에 대한 교육 훈련을 소홀히 하는 등 해경 지휘부나 사고 현장에 같이 출동한 해경들에게도 승객 구조 소홀에 대한 공동 책임이 있으므로, 피고인에게만 피해자들의 사망․상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가혹한 점"을 들 정도로 해경 지휘라인의 책임에 대해 인정했다(광주고등법원 2015. 7. 14. 선고 2015노177 판결).

위와 같이 구조 실패의 책임을 해경 123정장에게만 물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이 두 간부를 포함해 해경 지휘라인 중 어느 누구도 구조 실패를 이유로 기소하지 않았다. 꼬리 자르기가 세월호 참사에서도 또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세월호 참사에서도 하나도 달라진 것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함없음은 또 다른 참사에 대한 '초대장'이 될 것이다. 정말로 보다 안전한 사회에서 살고 싶다면 세월호 참사에서만큼은 꼬리 자르기가 반복돼서는 안 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잘못한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직후 <동아일보>도 옆의 기사들을 기획해 연재했다. 참사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깊은 고민뿐만 아니라 피해자 가족에 대한 배려까지도 모두 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동아일보>의 지금 모습은 그 당시와 같을까? 아래 연재 기사의 제목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참사 당시 우리가 느꼈던, 생각했던 것을 우리가 계속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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