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해야할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
안타깝습니다!
동문 선배님!
선배님은
살인마 전두환이 저지른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임에도
살아있는것 자체가
부끄럽다고 보상을 거부했지요!
한평생 민주화 운동에~
애들 이름도
백두산
백도라지
백민주화로 지었지요!
벌떡 일어나세요!
=======================
경찰 물대포를 맞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씨(69)의 삶은 누구보다 치열했다.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를 정면으로 관통했다.
백남기씨는 해방 2년 뒤인 1947년 8월 전남 보성군 웅치면에서 태어났다. 이곳서 9대째 살아온 그의 부친은 경찰 공무원을 지낸 뒤 웅치면 면장을 지냈다. 그는 광주서중, 광주고를 거쳐 1968년 중앙대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간 그는 3선 개헌, 유신 등 장기집권을 강행하던 박정희 정권과의 가열찬 싸움을 시작했다.
중앙대는 앞서 굴욕적 한일수교에 반대하며 치열히 싸웠던 서청원(현 새누리당 최고위원), 이재오(현 새누리당 의원) 등 기라성 같은 '6.3세대'를 배출했던 학생운동권의 주요 주축중 하나였다. 그는 중앙대에서 법대 학생회장을 맡아 활동하다가, 군을 대학내에 상주시킨 1971년 10월 위수령 사태에 반발해 시위를 벌이다 제적됐다. 1차 제적이다.
그는 그후 복교했으나 1973년 10월 교내에서 유신 철폐 시위를 주도했고 공안당국의 수배가 내려지자 1974~75년 명동성당에 피신을 했다. 이때 그는 명동성당 이기정 신부에게서 세례(세례명 임마누엘)를 받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된다.
그는 1975년 유신정권에 맞서 전국대학생연맹에 가입해 활동하다 2차 제적을 당했다. 그는 그후 가르멜 수녀원과 인천의 포도밭 농장인 일흥농원 등에서 날품팔이 등을 하다가 그후 가르멜 수도원에서 수도사 생활을 하던 중,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1980년 3월 다시 복교할 수 있었다.
복교한 그는 '민주화의 봄'때 또다시 치열히 활동했다. 그는년 어용 학도호국단을 폐지시키고 재건 총학생회 1기 부회장을 역임, 그해 5월8일 '박정희 유신잔당(전두환, 노태우, 신현확) 장례식'을 주도하고 5월15일에는 중앙대생 4천여명과 함께 서울역까지 도보 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이틀 뒤인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의 기습적 계엄 확대로 기숙사에서 계엄군에게 체포됐다. 7월말 중앙대는 또다시 그에게 퇴학 처분을 내렸다. 3차 제적이다.
그는 1980년 8월 수도군단보통군법회의에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다가 1981년 3월, 3·1절 특사로 가석방됐다.
그는 고향인 보성군 웅치면으로 내려가 농군이 됐다. 그해 11월 그는 부인 박경숙씨(세례명 율리아나)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슬하에 아들 하나, 딸 둘 등 세 자녀를 두었는데 그들의 이름을 '백두산' '백도라지' '백민주화'라고 지었다.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해서다.
1983년 정치활동 규제자에서 해금 및 복권이 됐으나, 그의 선배 서청원-이재오 등이 정치의 길을 걸은 것과는 달리 계속 농민의 삶을 살았고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1986년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한 그는 다음해 가톨릭농민회 보성,고흥협의회 회장을 거쳐 1989~1991년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장, 1992~1993년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을 맡는 등 농민의 권익 보호를 위해 앞장섰다.
쌀, 밀, 콩 농사 등을 짓던 그는 생명운동의 일환으로 우리밀 살리기에도 적극적이어서, 1992년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준)을 주도했고 1994년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공동의장을 맡기도 했다.
쌀값 폭락 등으로 농민들이 궁지에 처하자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 대선때 수매가 현실화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위해 지난 14일 아침밥을 먹고 광화문에서 열리는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경찰의 직사 물대포를 맞고 참변을 당했다.
그의 막내딸 '민주화씨'는 지난 16일 네덜란드에 체류중 아버지의 참변 소식을 듣고 페이스북에 올린 편지를 통해 "아빠는 세상의 영웅이고픈 사람이 아니야.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지"라고 말했다. 그의 치열했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딸의 증언이다.
안타깝습니다!
동문 선배님!
선배님은
살인마 전두환이 저지른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임에도
살아있는것 자체가
부끄럽다고 보상을 거부했지요!
한평생 민주화 운동에~
애들 이름도
백두산
백도라지
백민주화로 지었지요!
벌떡 일어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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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물대포를 맞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씨(69)의 삶은 누구보다 치열했다.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를 정면으로 관통했다.
백남기씨는 해방 2년 뒤인 1947년 8월 전남 보성군 웅치면에서 태어났다. 이곳서 9대째 살아온 그의 부친은 경찰 공무원을 지낸 뒤 웅치면 면장을 지냈다. 그는 광주서중, 광주고를 거쳐 1968년 중앙대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간 그는 3선 개헌, 유신 등 장기집권을 강행하던 박정희 정권과의 가열찬 싸움을 시작했다.
중앙대는 앞서 굴욕적 한일수교에 반대하며 치열히 싸웠던 서청원(현 새누리당 최고위원), 이재오(현 새누리당 의원) 등 기라성 같은 '6.3세대'를 배출했던 학생운동권의 주요 주축중 하나였다. 그는 중앙대에서 법대 학생회장을 맡아 활동하다가, 군을 대학내에 상주시킨 1971년 10월 위수령 사태에 반발해 시위를 벌이다 제적됐다. 1차 제적이다.
그는 그후 복교했으나 1973년 10월 교내에서 유신 철폐 시위를 주도했고 공안당국의 수배가 내려지자 1974~75년 명동성당에 피신을 했다. 이때 그는 명동성당 이기정 신부에게서 세례(세례명 임마누엘)를 받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된다.
그는 1975년 유신정권에 맞서 전국대학생연맹에 가입해 활동하다 2차 제적을 당했다. 그는 그후 가르멜 수녀원과 인천의 포도밭 농장인 일흥농원 등에서 날품팔이 등을 하다가 그후 가르멜 수도원에서 수도사 생활을 하던 중,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1980년 3월 다시 복교할 수 있었다.
복교한 그는 '민주화의 봄'때 또다시 치열히 활동했다. 그는년 어용 학도호국단을 폐지시키고 재건 총학생회 1기 부회장을 역임, 그해 5월8일 '박정희 유신잔당(전두환, 노태우, 신현확) 장례식'을 주도하고 5월15일에는 중앙대생 4천여명과 함께 서울역까지 도보 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이틀 뒤인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의 기습적 계엄 확대로 기숙사에서 계엄군에게 체포됐다. 7월말 중앙대는 또다시 그에게 퇴학 처분을 내렸다. 3차 제적이다.
그는 1980년 8월 수도군단보통군법회의에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다가 1981년 3월, 3·1절 특사로 가석방됐다.
그는 고향인 보성군 웅치면으로 내려가 농군이 됐다. 그해 11월 그는 부인 박경숙씨(세례명 율리아나)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슬하에 아들 하나, 딸 둘 등 세 자녀를 두었는데 그들의 이름을 '백두산' '백도라지' '백민주화'라고 지었다.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해서다.
1983년 정치활동 규제자에서 해금 및 복권이 됐으나, 그의 선배 서청원-이재오 등이 정치의 길을 걸은 것과는 달리 계속 농민의 삶을 살았고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1986년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한 그는 다음해 가톨릭농민회 보성,고흥협의회 회장을 거쳐 1989~1991년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장, 1992~1993년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을 맡는 등 농민의 권익 보호를 위해 앞장섰다.
쌀, 밀, 콩 농사 등을 짓던 그는 생명운동의 일환으로 우리밀 살리기에도 적극적이어서, 1992년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준)을 주도했고 1994년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공동의장을 맡기도 했다.
쌀값 폭락 등으로 농민들이 궁지에 처하자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 대선때 수매가 현실화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위해 지난 14일 아침밥을 먹고 광화문에서 열리는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경찰의 직사 물대포를 맞고 참변을 당했다.
그의 막내딸 '민주화씨'는 지난 16일 네덜란드에 체류중 아버지의 참변 소식을 듣고 페이스북에 올린 편지를 통해 "아빠는 세상의 영웅이고픈 사람이 아니야.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지"라고 말했다. 그의 치열했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딸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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