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 초대 통일부총리를 지낸 한완상 전 부총리(80)는 YS의 정치적 아들을 자처하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서청원 최고위원에 대해 "제발 정치적 아들이니 이런 소리 안했으면 좋겠다"고 일침을 가했다.
25일 <경향신문>에 따르면, 한 전 부총리는 지난 23일 압구정동 자택에서 <경향>과 행한 인터뷰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무성 대표와 서청원 최고위원이 친박이냐 아니냐로 다투는 것을 보면, 어떻게 위대한 민주투사 밑에서 저런 제자가 나올 수 있는가 싶다"며 이같이 말했다.
한 전 부총리는 더 나아가 “여당은 YS가 한국정치사에서 그어놓은 민주화 여정의 업적, 그것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지금 여당의 주요 정치인들은 내가 보기에는 YS가 가열차게 싸웠던 대상인 중도통합론자들이다”라며, 이들을 박정희 정권때 유신체제를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중도통합론을 주장해 사쿠라로 불렸던 이철승씨 등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야당에 대해서도 “야당은 근본적으로 이명박·박근혜 정부 8년 동안 역사가 체계적으로 후퇴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면서 "이런 역사적 조건에서 무슨 밥그릇 싸움인가"라고 질타했다.
그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 대해선 "문재인 대표는 YS를 벤치마킹해야 한다"면서 "YS가 어떻게 박정희 정권과 대치해서 국회의원 자리를 제명당하기까지 하면서 역사 후퇴를 막으려 했는지를”이라며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주문했다.
한편 한 전 총리는 YS의 대통령 취임 연설문 초안을 짤 정도로 두터웠던 YS와의 인연에 대해선 “서울대 문리대에 육문회(育文會)란 모임이 있었는데 대학 교수 시절 그곳에서 만났다"면서 "YS가 야당 총재하면서 중요한 연설할 때 가끔 나보고 연설문을 써달라고 했다. 특히 유신체제를 끌어안고 가자는 이철승씨의 중도통합론과 싸울 때 나와 자주 만났다”고 밝혔다.
그는 취임 연설문 작성 경위와 관련해선 “취임 연설문을 맡아달라고 해서 팀이 구성됐다. 나는 ‘신한국비전’을 중심으로 써야겠다 생각했다"며 "우선 김영삼 정부는 유신군부통치를 확실히 종식하는 문민정부로 자리매김했다. 이름도 몇공화국이 아니라 ‘김영삼 정부’로 했다. YS가 건방지다고 안할까 하셔서 내가 미국도 ‘케네디 정부’ 식이라고 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두번째 국가엘리트가 되려면 재산축적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게 나중에 금융실명제, 공직자재산공개로 나온다"면서 "세번째는 한국병 치유다. 한국병의 징후는 편법주의이고, YS가 분개했던 가장 큰 편법은 군사쿠데타였다. 그래서 역사왜곡 바로잡기를 문민정부가 하자 해서 군사쿠데타 주역들과 군부 세력을 법정에 세웠다”고 말했다.
그는 YS의 대북정책에 대해선 “YS는 취임사에서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 선언은 북쪽에도 충격을 주고 남쪽에도 충격을 줬다. 이 원칙에 따라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를 북송했다"면서 "당시 국회에서 ‘우리 동맹국이 미국과 일본인데, 북한이 더 낫단 말이요’라며 우리를 엄청 괴롭혔다”며 YS가 취임초에는 대북정책에 전향적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는 이어 "93년 3월 이인모씨 보내고 다음날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했다. 김영삼 정부 대북정책은 초장부터 태풍 속의 편주같이 위태로워졌다. 이때부터 남쪽의 냉전 수구세력과 북쪽의 강경 군부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강화됐다"면서 "문제는 YS가 남북관계가 개선이 안되면 민주적 개혁이 안된다는 것을 몰랐다. 남북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반기면서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5년의 어두운 면이 거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YS 자신도 어머니가 공산주의자 총에 돌아가셨다. 반공적인 정서가 있었는데 박정희 정권과 싸울 때는 잠복해 있었다. 하지만 핵문제 때문에 남북관계가 악화되니 그걸 끌어내고 싶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면서 "그걸 빌미로 개혁을 좌절시키려는 세력들이 권력 중심부로 들어오고 개혁은 물건너갈 수밖에 없었다”고 안타까와했다.
그는 YS의 임기말에 대해선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미국 클린턴 정부와의 관계도 냉온탕을 왔다 갔다 했지만 대부분 안좋았다. 하나회 청산의 신선한 바람이나 공직자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에서 온 감동이 결국은 동력을 상실하면서 민주개혁 쪽으로 못갔다"면서 "YS도 점점 보수화되다가 결국 97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를 하게 된다. 내가 대학총장 때인데 ‘YS 정권의 집단치매증’이라고 썼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게다가 97년 국제통화기금(IMF) 벼락까지 맞았다"면서 "그해 말에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YS가 ‘우리 경제의 기초가 튼튼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거덜날 줄 몰랐다’, ‘하루 빨리 청와대에서 나갔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랬겠나”고 탄식했다.
그는 YS정권 5년에 대해선 “3당통합 때 YS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지라고 하더라. 나는 반신반의했다. 이후 호랑이를 잡긴 잡더라. 호랑이를 잡아서 법정에 세우기도 하고. 그런데 자기가 법정에 세운 호랑이들이 키운 냉전세력, 언론에 포위되서 결국 개혁의 동력을 잃어버린 게 아쉽다”고 총평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YS라고 하는 인물은 우리 정치사에서 한 시대의 인물이다. 이 분은 책은 많이 안 읽었지만 직관력이 대단했다. 박정희 정권을 보면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다. 촌철살인이다. 다만 직관적 소통에 논리적, 비판적 소통까지 합쳤으면 더 좋았겠지만"이라며 "또 YS는 여백의 인간이다. 여백이 많으니, 좋은 사람의 아이디어를 얻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소통을 잘한 것이다. 그 여백의 크기는 DJ보다 YS가 컸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여백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YS의 소통능력은 대단하다. 내가 3김에 대해 비판 칼럼을 많이 썼다. 김종필 전 총리(JP)는 만나면 ‘내가 한 박사 글은 언더라인하면서 읽습니다’라며 내가 얼굴을 들 수 없게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악수를 하다가 내가 손을 꽉 잡으면 뿌리치고 가신다. YS는 어깨를 껴안으면서 귀속말로 ‘어이, 한 박사 나 좀 봐줘’ 이런다. 부족한 거 알고 있으니 좀 봐달라는 것이다”라고 에피스드를 공개하기도 했다.
25일 <경향신문>에 따르면, 한 전 부총리는 지난 23일 압구정동 자택에서 <경향>과 행한 인터뷰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무성 대표와 서청원 최고위원이 친박이냐 아니냐로 다투는 것을 보면, 어떻게 위대한 민주투사 밑에서 저런 제자가 나올 수 있는가 싶다"며 이같이 말했다.
한 전 부총리는 더 나아가 “여당은 YS가 한국정치사에서 그어놓은 민주화 여정의 업적, 그것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지금 여당의 주요 정치인들은 내가 보기에는 YS가 가열차게 싸웠던 대상인 중도통합론자들이다”라며, 이들을 박정희 정권때 유신체제를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중도통합론을 주장해 사쿠라로 불렸던 이철승씨 등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야당에 대해서도 “야당은 근본적으로 이명박·박근혜 정부 8년 동안 역사가 체계적으로 후퇴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면서 "이런 역사적 조건에서 무슨 밥그릇 싸움인가"라고 질타했다.
그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 대해선 "문재인 대표는 YS를 벤치마킹해야 한다"면서 "YS가 어떻게 박정희 정권과 대치해서 국회의원 자리를 제명당하기까지 하면서 역사 후퇴를 막으려 했는지를”이라며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주문했다.
한편 한 전 총리는 YS의 대통령 취임 연설문 초안을 짤 정도로 두터웠던 YS와의 인연에 대해선 “서울대 문리대에 육문회(育文會)란 모임이 있었는데 대학 교수 시절 그곳에서 만났다"면서 "YS가 야당 총재하면서 중요한 연설할 때 가끔 나보고 연설문을 써달라고 했다. 특히 유신체제를 끌어안고 가자는 이철승씨의 중도통합론과 싸울 때 나와 자주 만났다”고 밝혔다.
그는 취임 연설문 작성 경위와 관련해선 “취임 연설문을 맡아달라고 해서 팀이 구성됐다. 나는 ‘신한국비전’을 중심으로 써야겠다 생각했다"며 "우선 김영삼 정부는 유신군부통치를 확실히 종식하는 문민정부로 자리매김했다. 이름도 몇공화국이 아니라 ‘김영삼 정부’로 했다. YS가 건방지다고 안할까 하셔서 내가 미국도 ‘케네디 정부’ 식이라고 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두번째 국가엘리트가 되려면 재산축적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게 나중에 금융실명제, 공직자재산공개로 나온다"면서 "세번째는 한국병 치유다. 한국병의 징후는 편법주의이고, YS가 분개했던 가장 큰 편법은 군사쿠데타였다. 그래서 역사왜곡 바로잡기를 문민정부가 하자 해서 군사쿠데타 주역들과 군부 세력을 법정에 세웠다”고 말했다.
그는 YS의 대북정책에 대해선 “YS는 취임사에서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 선언은 북쪽에도 충격을 주고 남쪽에도 충격을 줬다. 이 원칙에 따라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를 북송했다"면서 "당시 국회에서 ‘우리 동맹국이 미국과 일본인데, 북한이 더 낫단 말이요’라며 우리를 엄청 괴롭혔다”며 YS가 취임초에는 대북정책에 전향적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는 이어 "93년 3월 이인모씨 보내고 다음날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했다. 김영삼 정부 대북정책은 초장부터 태풍 속의 편주같이 위태로워졌다. 이때부터 남쪽의 냉전 수구세력과 북쪽의 강경 군부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강화됐다"면서 "문제는 YS가 남북관계가 개선이 안되면 민주적 개혁이 안된다는 것을 몰랐다. 남북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반기면서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5년의 어두운 면이 거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YS 자신도 어머니가 공산주의자 총에 돌아가셨다. 반공적인 정서가 있었는데 박정희 정권과 싸울 때는 잠복해 있었다. 하지만 핵문제 때문에 남북관계가 악화되니 그걸 끌어내고 싶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면서 "그걸 빌미로 개혁을 좌절시키려는 세력들이 권력 중심부로 들어오고 개혁은 물건너갈 수밖에 없었다”고 안타까와했다.
그는 YS의 임기말에 대해선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미국 클린턴 정부와의 관계도 냉온탕을 왔다 갔다 했지만 대부분 안좋았다. 하나회 청산의 신선한 바람이나 공직자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에서 온 감동이 결국은 동력을 상실하면서 민주개혁 쪽으로 못갔다"면서 "YS도 점점 보수화되다가 결국 97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를 하게 된다. 내가 대학총장 때인데 ‘YS 정권의 집단치매증’이라고 썼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게다가 97년 국제통화기금(IMF) 벼락까지 맞았다"면서 "그해 말에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YS가 ‘우리 경제의 기초가 튼튼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거덜날 줄 몰랐다’, ‘하루 빨리 청와대에서 나갔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랬겠나”고 탄식했다.
그는 YS정권 5년에 대해선 “3당통합 때 YS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지라고 하더라. 나는 반신반의했다. 이후 호랑이를 잡긴 잡더라. 호랑이를 잡아서 법정에 세우기도 하고. 그런데 자기가 법정에 세운 호랑이들이 키운 냉전세력, 언론에 포위되서 결국 개혁의 동력을 잃어버린 게 아쉽다”고 총평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YS라고 하는 인물은 우리 정치사에서 한 시대의 인물이다. 이 분은 책은 많이 안 읽었지만 직관력이 대단했다. 박정희 정권을 보면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다. 촌철살인이다. 다만 직관적 소통에 논리적, 비판적 소통까지 합쳤으면 더 좋았겠지만"이라며 "또 YS는 여백의 인간이다. 여백이 많으니, 좋은 사람의 아이디어를 얻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소통을 잘한 것이다. 그 여백의 크기는 DJ보다 YS가 컸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여백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YS의 소통능력은 대단하다. 내가 3김에 대해 비판 칼럼을 많이 썼다. 김종필 전 총리(JP)는 만나면 ‘내가 한 박사 글은 언더라인하면서 읽습니다’라며 내가 얼굴을 들 수 없게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악수를 하다가 내가 손을 꽉 잡으면 뿌리치고 가신다. YS는 어깨를 껴안으면서 귀속말로 ‘어이, 한 박사 나 좀 봐줘’ 이런다. 부족한 거 알고 있으니 좀 봐달라는 것이다”라고 에피스드를 공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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