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장작더미 속에 내던져진 사람들
"그날 엄청 눈이 많이 왔제,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졌은게…"
"그날 엄청 눈이 많이 왔제,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졌은게…"
취재진의 물음에 백발이 성한 노인은 몸서리치는 그때의 악몽을 더듬었다. 1951년 1월12일(음력 12월5일), 왠지 모르게 기분이 들떴다. 여기에 하얀 눈까지 더해지면서 어린애들은 마냥 신나했다.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 윤경중(79세) 씨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불갑산 토벌작전을 앞두고 모평 주민 일부는 마을을 떠나있었다. 윤 씨도 부모님과 함께 매형집이 있는 용산리 성뫼로 피했다. 하지만 당시 시골사람들은 어찌 그리도 우직했는지, 고향을 떠나면 안 될 것처럼 여겨 그냥 집에 머문 경우가 상당했다. 여기에 스스로 떳떳했기에 마을을 떠날 필요성 또한 못 느꼈다. 윤 씨의 할머니, 작은 어머니, 종형 그리고 당숙과 당숙모도 이런 이유로 고향에 남았다.
섣달 초나흗날(음력 12월4일) 윤 씨는 큰어머니 제사 때문에 모평을 찾았다가 마을 어귀까지 따라나선 사촌 형 윤형중(당시 15세)을 설득해 성뫼로 함께 왔다. 설득보다는 억지로 끌고 오다시피 해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 이튿날 모평에서 사달이 발생한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총소리가 콩 볶는 소리처럼 요란하게 들려요. 그래서 봤더니 분명 모평 쪽이에요."
윤 씨의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금세 굳어졌다. 총소리를 들은 아버지도 안절부절못했다. 불안함 마음을 부여잡고 윤 씨는 사촌 형과 모평으로 갔다. 마을 입구 쌍구룡에 들어서니 검은 연기와 함께 논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이 얼핏얼핏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서곡에 불과했다.
잔등에서 바라본 마을의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하얗게 쌓인 눈 위로 시체들이 내팽개쳐져 있고, 검붉은 핏자국은 흰옷을 적신 채 눈밭에 질펀했다. 윤 씨는 "시체가 말도 못하게 많았다. 마치 나락을 훑고 짚 무더기를 여기저기 내던져 놓은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저 멀리 논두렁을 보니 쓰러진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 작은 어머니, 종형, 당숙, 당숙모도 함께 있었다. 윤 씨는 이날 13명의 가족을 잃었다. 그의 아버지는 "어떻게든 데리고 나왔어야 했는데…"라며 땅을 치고 통곡했다.
추운 날씨에 시체가 굳어 가매장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윤 씨는 "꽁꽁 얼어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폈다. 어떤 경우엔 팔을 분질러 옷을 입히기도 했다"고 처참했던 당시 기억을 끄집어냈다.
윤 씨는 마을입구 구릉에 연기가 피어나는 것을 보고 홀리듯 그곳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매캐한 냄새에 속이 뒤틀렸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 보지 말았어야 할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활활 타고 있던 장작더미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시체들이 검게 타고 있었다. 군인들은 불을 쬐라며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냈고, 일제히 총격을 가했다. 일부 살아있는 사람을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기도 했다.
"살 꼬실라지는 소리가 픽픽 나고, 골 튀는 소리가 퉁퉁거렸지…."
윤 씨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대검으로 난자…하나하나 차근차근 죽였다"
장재수(80·광주 북구) 씨는 65년 전 그날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눈앞에서 군인의 대검에 아버지가 난자됐고, 어머니와 두 동생을 비롯한 가족 8명이 끔찍한 죽임을 당했다. 그는 길섶에 엎드린 채 가족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저 떨어야만 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미안함, 나만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그를 더욱 비통하게 만들었다.
현재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광주전남북연합유족회' 회장을 맡고 있는 장 씨의 집은 전쟁 당시 용천사(해보면 광암리) 바로 밑에 있었다. 빨치산 본거지인 용천사는 군경의 우선 토벌대상 지역이다. 이 때문에 장 씨 가족 모두 살림을 뒤로한 채 해보면 대창리로 피해있었다. 92살 고령의 할머니만이 '설마하니 늙은이를 어떻게 하겠어'라며 터를 지켰다. 골방에 있던 할머니는 결국 군인이 지른 화마 속에서 시커먼 잿더미가 됐다.
군인이 마을에 들이닥친 것은 한 해의 끝자락, 1950년 12월31일이었다. 면소재지로 이동하라며 대창리 주민 수십 명을 쌍곡리 쌍구룡에 집결시킨 군인들은 길옆으로 사람들을 앉힌 뒤 한사람씩 불러내 총살시켰다. 이유는 하나, '너희 중 빨갱이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장 씨의 아버지 장진섭(당시 48세) 씨가 '죄 없는 사람들을 왜 죽이느냐'며 울부짖었다. 총살로는 안 되겠다고 싶었는지 대검을 장착한 병사를 부른 중대장이 이내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장 씨 아버지 복부를 그대로 난자했다.
놀란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작은아버지 내외가 쓰러진 아버지를 부둥키며 통곡하자 군인들은 이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엎드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장 씨만이 현장에서 살아남았다. 허나 모진 목숨을 부지한 그날의 죄스러움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쓰러진 아버지를 안고 가족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는디, 군인들이 거기다 대고 기관총을 긁어부렀다. 막내(당시 1살)가 어머니 등에 업혀 있었고, 동생 재님(당시 11살)이와 이님(당시 8살)이도 그 자리에 있었다. 총 맞은 어머니가 다리를 덜덜 떨면서 죽는데, 정말 징그런 꼴 봤다. 나는 무서워서 그대로 엎드려 있다가 살았다. 결국 나만 빼고 가족 모두가 몰살된 것이다."
분노에 찬 장 씨의 눈에 금세 이슬이 맺혔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소란을 떨기 시작한 5중대는 점심때부터 '인간사냥'을 시작했고, 오후 4시경 본부중대가 있는 면소재지(해보면)로 향했다. 한 차례 화마가 휩쓸고 간 쌍구룡에는 70여 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결국, 며칠 못가 누나네 집으로 이동했다. 매형이 신광지서 경찰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신세질 순 없었다. 그러던 차에 사람들이 광암리 마을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오게 됐다.
까맣게 폐허가 된 집, 그리고 홀로 세상에 남겨진 15살 소년. 누가 가자고 할 것도 없이 자연스레 불갑산으로 흘러들었다. 입산(入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길 없는 그는 그렇게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이들과 산중 생활을 시작하게 됐고, 이곳에서 '대보름작전'을 만나게 된다. 이후 생사를 건 탈출 끝에 산을 빠져나왔고, 또 다시 누나 집으로 숨어들었다.
"전쟁이 그렇게 대충 끝났다."
지난날을 회고한 장 씨가 말미에 한 말이다. 전쟁은 전장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또한 총칼을 든 군인들만의 몫도 아니다. 아군과 적군 사이에 끼어있는 양민들은 몇 갑절 이상의 피와 고통, 그리고 가슴 메이는 아픔과 살 떨리는 공포를 겪어야만 한다. 이들에게는 이것이 진짜 '전쟁'이고 또한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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