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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May 15, 2017

"재인이는 인생이 훌륭한 사람" 50년 지기가 말하는 문재인 대통령

지각쟁이 文 대통령, 소아마비 친구 돕느라 지각 감수
사업실패 김 판사에 용돈 주고 공부 도움도
文, 2~3년 전 “대통령 돼야겠다” 사명감 드러내
문재인 대통령의 50년 지기 친구인 김정학 인천지법 부장판사가 15일 오전 자신의 집무실에서 문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50년을 지켜본 친구로서 재인이는 살아온 인생 자체가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정학(64ㆍ사법연수원 18기)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사법연수원 여섯 기수 선배인 문재인 대통령을 '재인이'라고 스스럼없이 불렀다.
김 판사가 뒤늦게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 한참 후배가 됐지만, 둘은 경남중ㆍ경남고를 함께 다니며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둘도 없는 친구사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있었던 문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김 판사는 그 동안 나서지 않았다. 대선 전에는 후보자인 문 대통령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이젠 그의 진면목을 알려야겠다 싶어 처음으로 한국일보 인터뷰에 응했다. 15일 문 대통령의 50년 지기 김 판사를 인천지방법원 집무실에서 만났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학 부장판사가 2013년 1월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 김정학 부장판사 제공
문 대통령은 학창시절 ‘지각생’이었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불편한 김 판사의 책가방을 들고 중ㆍ고교를 함께 등교하다 보면 어김없이 늦곤 했다. 김 판사는 “지각하게 생겼으니 먼저 가라 해도 끝까지 함께 갔다”며 “진짜 가버리면 제 마음이 얼마나 허전할지 알고 지각하는 편을 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서를 많이 하고 시사에 밝았던 문 대통령과 대화하다 보면 가파르고 먼 길이 짧게 느껴졌다고 한다. 경남고 1학년 때 김 판사는 소풍을 포기했지만 문 대통령이 “가자”며 김 판사를 이끌었다. 김 판사를 업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느라 소풍이 끝나고 나서야 도착했지만, 중간에 도시락을 까먹으며 보낸 시간이 김 판사에게는 최고의 시간이었다. 그는 “친구들은 재인이가 저를 업고 온 사실을 알고 귀갓길에는 서로 돌아가며 업어줬다”고 회상했다. “1학년 때는 둘 다 키가 작았어요. 나중에 재인이가 하는 말이 ‘내 키가 조금 더 크고 힘이 셌으면 정학이를 마음껏 업고 갈 텐데’ 하면서 속으로 울었다고 하더군요. 재인이는 고2 때 10㎝ 이상 훌쩍 컸지요.”
지난해 6월 네팔 지진 피해복구 작업에 참여한 문 대통령이 네팔 보고회를 열고 경남고등학교 동문들과 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정학 부장판사 제공
김 판사는 문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사업에 실패했을 때 고시공부를 권유하고 뒷바라지까지 한 이가 문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김 판사는 “앞날이 캄캄하던 그 때 재인이가 내 사정을 알고는 자기가 모든 비용을 다 댈 테니 고시공부를 시작하라고 했다”며 “내가 주저하자 후배를 보내서 ‘형님 꼭 모시고 내려오라고 한다’며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변호사로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다지 여유가 없을 때였지만, 이미 부산 구포에 고시원을 구해놓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새로 바뀐 고시서적과 용돈까지 대줬다. 김 판사는 ‘내가 불합격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언제까지 책임을 지려는 걸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졌고, 밤 늦게까지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고는 언덕 아래로 보이는 불빛을 보며 매일 각오를 다진 결과 2년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나란히 법조인의 길을 걸었지만, 김 판사는 인천지법에서 근무하고 문 대통령은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자주 보지는 못했다. 두 사람이 법정에서 판사와 변호사로 만난 건 한참 뒤 일이다. 김 판사가 1993년 창원지법 충무지원(지금의 통영지원)에서 형사단독 판사로 근무할 때 문 대통령이 변호인으로 법정에 섰다. 김 판사는 “판사와 변호사로 일합(一合)을 겨룰 걸로 기대했는데 단순도박 사건이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며 웃었다.
김정학 부장판사는 “30년 가까이 판사 생활을 하면서 ‘판사 10단’이 되는 것이 꿈인데 참 어려운 일 같다”고 말했다. 사법부 일원으로서 대통령에게 바라는 점을 묻자 그는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판사로서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김 판사는 문 대통령을 강인하고 낙천적인 친구로 기억했다. 1975년 데모로 쫓기던 중 김 판사 집을 찾은 문 대통령은 평소처럼 바둑을 두며 내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 판사는 “재인이가 ‘경희대도 데모를 시작했다’고만 말할 뿐 힘든 얘기는 안 했다”며 “제게 위로를 받는 듯 편안하게 찾아오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이후 유신 반대 시위로 구속됐다 풀려난 문 대통령은 강제로 특수전사령부 예하부대에서 복무할 때에도 불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근육질이 되어 나타난 문 대통령에게 “고될 텐데 괜찮냐”고 묻자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의외로 특전사 체질인 가봐”라며 웃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누구보다 인간적이고 서민을 이해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김 판사는 확신했다. 그가 보아 온 문 대통령의 모습은 순박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김 판사는 “2012년 대선 이후 어느 날인가 재인이가 약속에 늦어 이유를 물어보니 집에서 키우던 닭이 닭장에 안 들어가려고 해서 가두고 오느라 늦었다”며 “정원을 가꾸고 밭을 갈고 개, 고양이, 닭을 돌보다 보면 하루가 다 가는 게 딱 농부체질이라고 하더라”고 웃었다. 서울에서 일을 보고도 가축들이 눈에 밟혀 양산에 내려갈 정도였다는 것이다.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낸 문 대통령은 2008년 귀향하기 전 친구들과 점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노무현 정권에 대한 평가가 어떤지 알고 있다”며 “과(過)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나도 자유롭지 않다”고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고 한다. 김 판사는 “비서실장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고 참 맑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12년 대선 패배 이후에는 “나는 정치체질이 아닌 것 같다”고 했던 문 대통령은 최근 2~3년 전부터는 “내가 할 일이 생겼다. 대통령이 돼서 사회를 바꿔야겠다”면서 사명감을 드러냈다고 김 판사는 말했다.
김정학 부장판사는 “30년 가까이 판사 생활을 하면서 ‘판사 10단’이 되는 것이 꿈인데 참 어려운 일 같다”고 말했다. 사법부 일원으로서 대통령에게 바라는 점을 묻자 그는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판사로서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김 판사는 문 대통령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을 기회가 없었다며 안타까워했다. 문 대통령은 2008년 이후 부산에서 다시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생각보다 사건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앞서 월급도 사무실도 없는 정무담당 특별보좌관으로 활동하며 수입이 끊긴 지 오래였다. 김 판사는 “부산에서 사건이 없어 고생하는데 저 역시 여유가 없어 도움을 못 줬다”며 “노동ㆍ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던 재인이는 어려운 와중에도 돈 안 되고 복잡한 재심 사건을 맡아 법리를 묻더라”고 말했다.
2012년 대선 때는 김 판사가 서초구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아 더 조심스러웠다. 혹여 선거법에 위반될까 지지하는 발언도 못한 채 마음을 졸이며 개표 방송을 지켜봤다고 한다. 김 판사는 “그 동안 재인이에게 진 빚을 갚을 기회가 없었다”면서 ”판사 월급으로 경제적 도움을 줄 수는 없어도 젊을 때 진 빚은 언젠가 폼 나게 갚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판사는 문 대통령에게 촛불과 태극기로 나뉜 민심을 봉합하는 화합정치와 외교ㆍ안보 불안을 씻어달라고 부탁했다. 과거의 잘못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 비전을 먼저 제시해주길 바랐다. 늘 약자의 마음을 헤아려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인천=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mailto: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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