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사드 배치와 관련해 중국의 무역보복은 없다고 일관해왔다. 하지만 안종범 전 수석의 업무수첩을 보면 정부가 중국의 무역보복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드 배치로 인한 중국의 무역보복을 지난해 10월에 이미 인지하고 WTO 제소도 검토한 것으로 확인됐다. 사드 배치 논의 초기부터 일관되게 무역보복 가능성을 일축하던 박근혜 정부가 배치 발표 3개월 만에 자신들의 예측이 틀렸음을 인지했다는 의미다.
<시사IN>이 입수한 안종범 전 수석의 업무수첩 ‘10-8-16 VIP-⑥’ 메모를 보자(오른쪽 사진). 한반도 사드 배치를 발표하고 3개월이 지난 2016년 10월8일 대통령(VIP) 지시를 뜻한다. ‘2. 외교 라인-중국 지도부 보복 의지 감지. 중국 기업 압박해서 한국산 사지 마라. 총리·산업장관 노력 무위. 근본적으로 법적으로 해결? WTO 제소? ex)훙샹그룹 미국이 제기는 OK. 기업 불이익 사례 수집+기업 대처→언론→WTO 제소. 다만 중국 국민과의 우호는 유지’라고 안 전 수석은 썼다. 훙샹그룹은 북한 핵 개발에 연루된 것으로 지목돼 미국이 제재 조치를 취한 중국 기업이다. 같은 날 대통령은 ‘LG, 삼성 배터리 중국 방해. 행정지도. 외국 기업은 인정’도 언급한다. 삼성SDI와 LG화학이 중국의 전기차 배터리 모범기준 인증에 뚜렷한 이유 없이 탈락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튿날인 2016년 10월9일에도 박 대통령은 중국 제소를 언급한다. ‘중국 제소→산자 장관 의논. 기업 골탕 사드 배치 후. 개성공단 북한 문제. 언론에 알렸음. 기업→언론→WTO→시장 다변화’(10-9-16 VIP-①). 종합하면 박근혜 정부 외교 라인이 늦어도 지난해 10월 초 중국 지도부의 보복 의지를 감지했고, 이에 총리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노력했으나 무위로 돌아간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WTO 제소 검토를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사드 배치 논의 초기부터 전문가들은 중국의 경제 보복을 우려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일관되게 ‘낙관론’을 폈다. “중국도 WTO 국가이고 (중략) 정치적 문제의 대책으로서 무역보복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2016년 2월19일).” 사드 배치 발표로 중국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뒤에도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한·중 관계가 고도화돼 쉽게 경제 보복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우려의 소지는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황교안 국무총리, 2016년 7월19일).” 여당도 정부의 ‘장담’을 거들었다. “지금 시중에 떠도는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경제 보복은 중국 지도부의 한반도 정책과 배치되는 이야기다. 저는 지금의 중국 지도부가 정경 분리 원칙하에 신중하게 움직일 것으로 알고 있다(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 2016년 8월5일).”
보복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된 후에도 정부는 확대해석이라고 일축했다. “비공식이든 공식이든 이것이 경제 보복이라고 얘기하기는 아직은 상당히 이르다(윤병세 외교부 장관, 2016년 9월26일).” “당분간 잠시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고 있지만 그렇게까지 우리가 크게 우려할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예의 주시하고 있다(김장수 주중 한국 대사, 2016년 10월10일).” “그런 것(비관세 장벽)이 조금 보이는 것이 있는데 과연 그것이 사드 배치에 직접 관련이 있느냐는 문제는 또 판단을 해봐야 되겠지만 (중략) 중국이 직접적인 무역보복 같은 조치를 사드 배치 때문에 하기는 조금 제한적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희들의 판단이다(유일호 부총리, 2016년 12월20일).”
정부는 ‘낙관’만 한 것이 아니라 야당 등의 반대 의견을 묵살하고 왜곡했다. 사드 배치 지역을 발표한 다음 날 박 대통령은 일련의 문제 제기를 “불필요한 논쟁”(2016년 7월14일)이라고 규정했다. 청와대가 성주의 사드 반대 집회에 ‘외부세력’ 낙인을 찍으려 한 메모도 안종범 전 수석 업무수첩에서 발견되었다(<시사IN> 제487호 ‘성주 집회는 외부세력 탓이라 해라’ 기사 참조). 박 대통령은 사드 배치 논란과 관련해 “불순세력” “북한과 맥락을 같이하는 황당한 주장” 따위로 뜬금없이 색깔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황교안 총리는 사드와 관련한 인터넷상 ‘괴담’을 중범죄로 보고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공언했다. 지난해 9월12일 여야 3당 지도부와 만나서도 박 대통령은 “대안을 내놔보라”며 우려를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중국의 보복을 인지하고 대책 검토까지 한 10월8일 이후에도 박 대통령은 “사회 일각에서는 사드 배치를 대안 없이 반대하고 있다”(2016년 10월13일)라고 말했다.
그러던 정부가 최근 ‘뒷북 대응’을 하고 있다. 지난 1월5일 외교부는 추궈훙 주한 중국 대사를 불러들여 사드 보복 조치에 대해 항의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월13일 제1차 한·중 자유무역협정 공동위원회에서 사드 보복 조치를 중국에 항의했다. 1월20일 정부는 범정부 비상경제대응 태스크포스(TF) 회의를 열어 한·중 통상점검 TF를 꾸리기로 했다.
야당 반대 의견 ‘불필요한 논쟁’이라며 무시
그러면서도 여전히 중국의 무역보복 여부에 대해서는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월19일 유일호 부총리는 중국이 한국산 화장품, 양변기 등을 수입 불허한 조치를 두고 “지금으로선 (사드 배치와) 연결고리가 없다”라고 말했다. 대통령 권한대행 황교안 국무총리 역시 같은 날 “(사드 배치로 인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전년 대비 약 5% 증가한 14만명의 중국 관광객이 방한할 것으로 예상된다”라며 중국의 보복이 과장됐다는 인식을 보였다.
안 전 수석의 메모는 중국의 무역보복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박근혜 정부가 지난해 10월 초 이 판단이 틀렸음을 감지하고 대책을 논의한 정황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위시풀 싱킹(wishful thinking:희망적 예측)’ 결정의 사례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보복 가능성 등 예상되는 위험을 국민에게 알리고 사드 배치의 불가피성을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대신 총리와 부총리가 나서서 보복이 없을 거라고 수차례 반복해 말했다. 이는 보복이 존재함을 인지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김흥규 아주대 중국정책연구소장은 “정부가 초기에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위험을 감지한 이후에도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 국민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심지어 속였다고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안이하게 대응했다”라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수첩에 적힌 ‘WTO 제소’ 대책에 대해서도 “실효성이 별로 없다. 중국은 소위 ‘준법투쟁’, 즉 원래 있던 법적 절차를 더 엄격하게 집행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괴롭혔기 때문에 제소가 거의 안 되고, 제소한다고 해도 3~4년 이상 걸린다. 기업들이 이미 어려움을 겪은 뒤다”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1월16일 3개월도 더 전에 검토했던, WTO를 통한 제재를 의미하는 ‘다자 차원의 대응’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김흥규 소장은 “아직도 정부는 중국의 무역보복을 공식 인정하지 않고 ‘팩트인지 알아봐야 한다’는 등 안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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