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충남지사가 ‘대연정’을 제안했다. 유권자들의 기억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에 제안했던 ‘대연정’ 당시로 돌아간다. 안희정이 노무현과 노무현 정권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부터 볼 필요가 있다.
안희정은 노무현 당선 당시 “젊은 세대가 정권의 주역이 된 것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40년 만”이라며 “그때는 군인들이 총칼 들고 한강을 건너 정권을 장악했지만 우리는 노사모와 노란 목도리를 매고 한강을 건넜다”고 했다. 노무현의 당선을 박정희의 리더십에 대치하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야심을 밝히며 “서른여덟 살의 나이에 JP(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공화당의 당의장을 했다”고 말해 자신을 노무현의 2인자 자리에 위치시켰다. 2017년 대선을 앞둔 안 지사는 여전히 ‘젊은 리더십’으로 통한다. 방향은 다르지만 새 시대에 대한 열망을 젊은 지도자가 이뤄낸다는 스토리를 꿈꾼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의 한계는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했다’는 말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냉정한 평가다. 정권교체와 개혁이 절실한 이 시점에 변화를 주도해야할 제1야당 대선후보의 ‘대연정’ 제안, 이는 민주당 몰락의 씨앗이 될지 모른다.
‘대연정’은 상반된 이념을 가진 정당이 연합하는 것으로 이념이 비슷한 정당이 연합하는 ‘소연정’과 구분된다. 대연정은 승자독식을 전제한 대통령제에서 정치적 책임성을 담보하기 힘든 구조를 만든다. 대통령제는 원내 소수정당이라 하더라도 정부 구성이 가능하다. 심지어 내각제적 요소도 있어서 의원들이 장관에 임명될 수도 있다. 당연히 소수 여당도 개혁을 할 수 있다. 반면 독일과 같이 비례대표제를 기반으로 의회를 꾸리는 내각제 국가는 기민련과 사민당 등이 과반을 얻지 못하면 내각 구성이 안 된다. 두 주요 정당이 여타 소수정당과 연정하지 못할 경우 대연정은 필요한 선택이다. 한국 정치현실과 다르다.
▲ 노무현 대통령이 2006년 11월28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최근의 정치상황에 대한 입장을 밝힌뒤 잠시 눈을 감고 있다 ⓒ연합뉴스 |
결국 노무현의 ‘대연정’처럼 새누리당(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대한민국 기득권층에 직접 날을 세우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FTA와 이라크 파병 등을 거치며 자신의 지지층에게 외면 받은 뒤 지지율 추락을 거듭했다.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통해 이를 돌파하려했지만 실패해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도 탈당했다. 민주진영 정치인들은 한국의 보수기득권층에게 선의로 다가간다고 해서 보호받지 못한다. 노무현 정권과 노무현은 둘 다 비극으로 끝났다.
중도노선은 만병통치약인가
노무현, 그를 계승하겠다고 나온 안희정 뿐 아니라 현재는 더불어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야당은 ‘중도통합론’을 만병통치약처럼 들고 나온다. 민주당은 왼쪽, 새누리당은 오른쪽에 있으니 민주당이 조금 오른쪽으로 이동해 중도층 표심을 잡자는 전략으로 얼핏 들으면 맞는 말이지만 역사상 이것이 성공한 때는 없다. 민주당 후보를 대통령(노무현)으로 만들었는데 한나라당이 지배하는 의회독재라는 말이 나왔다.
17대 총선에서 시민들은 열린우리당을 단독과반을 만들어줬다. 민주노동당 10석까지 보태줬다. 반민특위 이후 두 번째 기회가 왔던 것일지 모른다. 일제 침략과 분단, 전쟁과 학살, 독재와 대통령직선제에 한정된 민주화 등이 이어진 정치지형을 바꿀 기회였다. 노무현 정부와 17대 국회가 고친 것은 사학법 일부에 불과했다. 역풍이 불었고, 9년 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면까지 밀려왔다.
▲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예비후보 등록을 마친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간담회에 앞서 발언 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한국의 이념상황을 세계적으로 보면, 진보정당으로 분류되는 정의당 강령은 유럽 중도우파에도 미치지 못한다. 해방공간 당시 민족주의자 등 우파들이 모여 만든 제헌헌법보다 후퇴해있다. 이런 진보세력을 상대로 ‘종북몰이’해온 70여년의 역사는 야당이 돌파해야 할 과제다. 어쩌면 2017년 헌정사상 세 번째 기회가 온 건지도 모른다. 거대야당, 더구나 지금처럼 여권이 스스로 몰락한 상황에서 안 지사는 낭만적인 세상을 꿈꾼다.
중도통합론은 이철승이 유신시대 야당 신민당 당수로 있으며 내세운 논리다. 1960년 당시에는 ‘사쿠라(변절자를 가리킴)’라고 비판했다. 일본어를 없애자는 분위기 탓에 용어가 없어지면서 ‘사쿠라’는 중도통합론으로 진화했다. 당시 이철승은 신민당이 정권창출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다녔다. 조갑제는 2011년 5월 이철승에 대해 평가하며 “이철승이 사쿠라라고 몰렸고 이후 정치 행로에서 불리하게 작용했는데 되돌아보면 이철승의 중도통합론이 맞았다”며 “지금은 (이철승이) 애국세력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도통합론은 결국 우파에게 지지받을 수밖에 없는 이념이다.
사쿠라-중도통합론-2중대
이철승의 대적자로 김영삼이 나섰다. 유신 말기 시민사회는 김영삼을 중심으로 ‘야당성회복투쟁동지회’를 만들었고 신민당은 선명야당을 내세웠다. 1978년 12월 10대 총선에서 신민당은 집권당보다 1.1% 높은 득표율을 얻었다. 시민들은 중도통합이 아닌 선명야당을 선택했다. 야당의 덕목은 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은 1차 투표에서 1등했던 이철승을 꺾고 선명야당의 리더가 됐다. YH사건-김영삼 의원직 제명-부마항쟁으로 이어진 대정부 투쟁은 10·26으로 이어졌다.
시민들은 선명야당을 알아본다. 광주에서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이 했던 것처럼 유력 야당정치인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를 통해 민주한국당이라는 어용야당을 만들고 ‘북한의 조선노동당에 맞서려면 여야가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명목으로 ‘우당(友黨)’이라 불렀다. 여당과 제대로 싸우지 않는 야당을 ‘2중대’라고 부른 것은 이때부터다.
1985년 2월 총선, ‘우당’은 몰락했다. 1중대 민정당과 2중대 민한당 그리고 수많은 평론가의 기대를 깨고 선명야당 신민당(한번 쓴 당명은 다시 못쓴다는 법 때문에 신한민주당으로 등록하고 약칭 신민당으로 사용)으로 민한당 의원들이 이동했다. 11대 국회에서 82석이었던 민한당은 사라졌다. 민심은 권력이 조작할 수 없다.
▲ 1990년 1월22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가운데)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을 갖고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창당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3당야합이라고 비난받는 3당합당 이후 정국도 마찬가지다. 1990년 3당합당, 1991년 분신투쟁 이후 이어진 1992년 14대 총선. 3당합당으로 민자당은 299석 중 221석, 의회의 74%를 독식했다. 하지만 다음 총선 때 민자당 149석, 민주당(평민당과 꼬마민주당이 총선 후 합당) 97석으로 시민들은 선명야당을 회복해줬다. 시민들은 선명야당을 알아본다. 다음 대선인 1997년엔 최초로 정권교체를 시켰다. 민주진영이 싸우겠다고 했을 때 시민들은 외면한 적 없었고, 민주진영이 이런저런 상황을 탓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늘리려고 ‘우클릭’을 시도하면 찬바람이 따라왔다.
진보와 보수를 아울러 지지를 받았던 경험은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고서 잠시 있었다. 그는 집권초기 금융실명제 실시,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 등 강도 높은 개혁을 단행했고, 그 때 90%가 넘는 지지를 받았다. 안 지사가 꿈꾸는 “정치 회복”, “시대적 과제”, 대연정으로 꿈꾸는 국민통합은 그의 최근 행보처럼 모호한 메시지로 얻는 게 아니다. 부정한 것에 칼을 뺄 수 있는 단호함에서 가능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미 원내 1당이다. 보수진영이 분열한 상황에서 정권교체에 성공한다면 다시 개혁의 조건이 완성될 수 있다.
타협이나 협치는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할 단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불출마 하루 전 “협치”를 위해 개헌을 제안했다. 그의 말은 민심에 가닿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 캠프 정무팀장을 맡았던 안 지사는 불법대선자금을 모은 혐의로 1년형을 받았다. 2004년 5월4일 한겨레에 따르면 그는 “그 타협이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치고 대통령에게 누가 됐다”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민주화운동을 하고 제도권에서 야당 생활을 하면서 어찌됐든 (대선에서) 꼭 이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지, 출세하려고 이런 일을 한 건 아니었다”며 눈물을 보였다. 안 지사의 “타협”은 좀 더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안희정이 노무현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면 시민들은 약자와 소수자를 위해 일해 줄 것을 요구할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국면이 터지자 1988년 5공청문회에서 부패한 권력에 명패 집어던지던 노무현이 소환됐다. 그리고 노무현을 계승하겠다는 문재인 안희정이 야권의 1-2위 자리를 차지했다. 노무현은 결국 투쟁의 근육을 잃으며 스러졌다. 시민들이 안희정에게 원하는 건 대연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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