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서도 그저 열심히 공부만 하는 ‘평균 서울대생 인생’을 살 줄 알았던 여학생은, 목소리가 크고 술을 잘 마신다는 이유로 주변의 권유를 받아 단과대 학생회장을 맡았다. 말만 지지부진하게 늘어지는 ‘말 잔치’를 가장 싫어했고, 일이 ‘빠르게 잘’ 해결되는 걸 좋아했다. “열심히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괴로워하지 않는, ‘정상성’이라는 틀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총학생회장 선거에도 출마했다. 23년 동안 비밀로 해 왔던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공개했다. 지난달 20일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김보미씨(23·소비자아동학부) 이야기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김보미씨가 지난달 26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에서 기자와 만나 당선소감과 함께 앞으로의 활동계획을 밝히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
지난달 26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총학생회실에서 김보미 회장을 만나 당선 소감과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들어보았다.
-당선 후 1주일간 어땠나. 무척 바빴을 것 같은데.
“정신이 정말 없었죠. 축하인사도 많이 받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다가 이젠 좀 새로운 사업에 여유 있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됐어요. 다음주부터 임기가 시작하니까 집행부도 꾸려야 되고…. 할 일이 산적한 상태예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일이 시작됐다!’ 그래도 전 집중해서 일할 때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라 빨리 일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예요.”
-사람들이 성소수자의 당선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면 하는가.
“전 그게 별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굉장히 별일이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제 커밍아웃보다 주목해주셨으면 하는 건, 다른 학교들은 계속 학생회 선거가 무산되고 있는 마당에 이례적으로 결선투표 없이 당선자가 확정됐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 다른 조직에서도 그러하길 바라고요.”
-어떤 의도로 커밍아웃을 했나.
“소수자 이슈, 다양성 이슈는 항상 저의 문제였으니까요. 고등학교 때는 ‘대학 가면 공부만 열심히 해야지’ 했는데, 성소수자 모임에서 활동을 하고, 학내에 장애인권동아리가 생기는 걸 보면서 이 학교에 다양한 소수자들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불합리한 상황에서 내 권리를 얘기하는 것이 절대 ‘노이즈’가 아니라 당연히 할 수 있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네이버 댓글을 보면 종종 ‘굳이 커밍아웃했어야 하느냐’는 글들이 있어요. 그걸 볼 때마다 ‘왜 (성적 지향을) 밝히는 게 문제가 되지?’ 말하지 말라는 공간에서 정체성을 드러낸 것, 그런 용기를 다른 분들도 가졌으면 해요. ‘그걸 왜 말해?’라는 자체가 소수자에 대한 억압이니까. 다른 소수자 분들, 예를 들어 장애인 분들 같은 경우엔 차이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만 성소수자는 그게 아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나 자신이 이렇다’라고 말하는 것은 곧 차이를 드러내는 거고, 분위기에 저항적인 의미가 있었어요.”
-대학교에서 성소수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
“요즘은 새내기 시절에 선배들한테 젠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다른 사람의 성적 취향을 먼저 판단하는 언행을 삼가는 것도 그중 하나고요. 그런데도 분명 1년 정도 지나면 (주위에 커밍아웃을 했음에도) ‘너 남자친구 있어?’하며 물어보는 친구들이 생겨요. 사람이 결코 20년 이상 사회화된 방식을 벗어나긴 어렵거든요. 미팅에 대신 나가달라는 부탁도 있고, 일상적으로 그런 일들이 많아요. 그게 막 불쾌하고 싫고 짜증 난다거나 이런 건 아니에요. 한숨 한 번 쉬고 다시 처음부터 설명해 주는 거죠(웃음). 성적 지향은 굉장히 사적인 영역이잖아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게 절대 사적으로 남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공개된 성소수자가 되는 것에 두려움은 없나.
“두려움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누구든 절 알아보고 ‘어, 쟤 레즈비언 아니야?’ 이렇게 볼 수 있으니깐. 그런데 그만큼 편해진 것도 있어요. 성적 지향을 공개하지 않아서 오는 불편한 일들이 많이 줄어들었고요. 걱정은 주변에서 더 많이 하죠. 가족이나 친구들이 ‘너 어떻게 살래, 나중에 취업할 때 김보미 검색하면 다 나올 텐데 어떡할래’ 그럴 때 갑자기 무섭긴 해요. 정리를 하자면, ‘생각보다 두렵진 않다. 그러나 가끔 나에게도 두려움이 엄습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김보미는 잘해 나갈 거다’ 대충 이렇게 정리가 되겠습니다.”
-주변에 커밍아웃을 응원해준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당연하죠. 적어도 제가 생활하는 이 울타리 반경 안에서는 응원과 지지를 많이 보내 주시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에 제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대자보가 누군가에 의해 찢겼다는 얘기를 들으면, 아 이걸 수용하기 어려워하시는 분들도 꽤 있구나라고 생각이 들죠.”
-가족들의 반응은 어떤가.
“부모님은… 이해를 해 나가시고 계세요. 그러다 보니 시간이 많이 필요하세요. 제가 (커밍아웃) 했던 그 전 주 일요일에 집에도 해버렸는데, 집안에 폭탄 20개를 투하한 느낌이에요. 그래도 다른 부모님들에 비해 많이 이해를 해주시는 건 맞아요. 제가 너무 급작스럽게 배려를 못 했으니까, 최대한 맞춰 드리고 싶어요.”
-‘다양성’을 슬로건으로 들고 나왔고 커밍아웃도 그 일환인 것으로 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이끌어 갈 건가.
“이곳이 자신이 어떤 성질을 가진 사람인지 전혀 상관없는 공간이 됐으면 해요. 먼저 인권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서 학교 측과 협의해 규정으로 만들 생각이에요. 단순히 선언적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제정을 하는 거죠. 차별금지법도 마찬가지잖아요. 공약 중 하나로 ‘시민사회교육’이라는 것도 있어요. 나와 타인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들 위주로 콘텐츠를 짜서 학교랑 조율한 다음 필수교양으로 지정해 보려고 해요. 대학에 와서라도 배워야 될 것들이잖아요.”
-이전 학생회들은 운동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갈수록 학생들의 일상적 필요에 부응하는 학생회들이 당선되고 있다.
“1980~90년대엔 ‘민주화’가 시대의 요구였고 학생회도 거기에 부응한 거죠. 사회가 바뀌면서 학생회도 따라가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당선된 것도 학생들이 소수자에 대한 존중, 다양성에 대한 요구가 있지 않았나…. 앞으로도 변화에 발맞추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겠죠.”
-졸업 후 계획은.
“제가 태어나기 전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직업은 그 수단 중 하나고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어요. 인권단체에서 일할 수도 있고, 연구원이나 변호사가 될 수도 있고. 성적이 나빠 로스쿨에서 받아줄지는 모르겠지만… 인권과 관련해서 한국에는 연구가 많이 없어요. 인권 관련법을 제정했을 때 공신력 있는 논문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그런 과정에 기여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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