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문 열린 어버이연합, 반격의 서막… 전경련 자금 지원 등 어버이연합 둘러싼 다양한 의혹의 중심에 선 추선희 사무총장 추적 르포
건물 앞에는 폐건축 자재가 가득 늘어섰다. 계단을 따라 오래된 창문틀과 자루에 담은 잡동사니 따위가 내려와 트럭에 실렸다. 5월11일 오후 2시, 대한민국어버이연합 사무실이 위치한 서울 종로구의 ㅆ빌딩은 리노베이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현관에 쌓인 물건을 피해 2층 어버이연합 사무실로 올라갔다. 문은 잠겨 있었다. 여러 차례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30분쯤 기다렸다. 중절모에 푸른빛이 도는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할아버지 한 명이 잠겨 있는 사무실 문고리를 몇 차례 헛돌렸다. ㅈ(82) 할아버지였다. 한동안 자리에 머물던 그는 방금 올라온 계단으로 발걸음을 되돌렸다.
“이제 다 고소해버릴 거야”
할아버지를 건물 앞 횡단보도 부근에서 붙잡았다. 기자라고 밝히자 핀잔부터 시작했다. “기자들은 민주노총에 수십억원 주고 박원순이 하던 단체에 1천억원 넘게 주는 것은 보도 안 하고 착한 사람들이 노인네들 돕겠다는 것만 공격하냐?”
2년 전부터 어버이연합 사무실에 나왔다는 할아버지는 열혈 회원이었다. 제20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일부 지역구 공천장에 도장을 찍지 않고 부산 영도행을 선택하자 항의시위를 벌이며 삭발을 했다. 중절모를 벗어 아직 까끌까끌한 머리카락을 내보였다.
그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자금 지원과 ‘집회 알바’ 등 어버이연합을 둘러싼 다양한 의혹의 중심에 있는 추선희 사무총장을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무료급식 하면서 먼저 자기가 음식을 먹어보고 노인들 입맛에 맞는지 살필 정도로 착한 사람이다. 머리도 참 좋다. 성명서를 어떻게 그렇게 잘 쓰는지 모르겠다.”
추 총장은 자신이 사용하던 휴대전화 여러 대를 아예 해지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언론에선 추 총장이 20일 가까이 잠적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사무실에 자주 나온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피하나? 내일 오전 11시쯤에 와봐.” 할아버지는 자신 있게 말했다.
할아버지의 말대로 다음날 아침, 어버이연합 사무실 문이 열렸다. 5월12일 오전 10시께 찾은 이곳에는 40명에 가까운 노인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추 총장의 행방을 묻자 어버이연합의 간부로 보이는 한 할아버지가 나섰다. “서울남부지검에 고소하러 갔어. 이제 다 고소해버릴 거야. 우리 사무실에 걸려 있는 저 태극기, 저 태극기를 욱일승천기로 바꿔서 (인터넷에) 올리는 애들도 있어. 우리가 그런 단체야?” 곳곳에서 노인들의 역정이 쏟아졌다.
“잠적설도 다 오보야. 확인도 안 해보고 멀쩡한 사람을 잠적했다고 기사를 써.” 하지만 할아버지는 추 총장이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오늘은 안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할아버지들은 계속 문을 열고 들어와 사무실의 빈자리를 하나씩 채웠다.
심인섭 어버이연합 회장과 이종문 부회장 등 주요 간부들의 모습도 보였다. “보도가 나온 뒤에도 찾아오는 사람들은 줄지 않았다. 아무 변화 없이 건재하게 잘 운영되고 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심 회장이 말했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은 상황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어버이연합 때문에 시끄러우니까 다른 사무실 사람들의 불만이 많다. 최근에도 회사 하나가 이사 갔다. 건물주도 어버이연합 쪽에 사무실을 빼달라고 문서를 보낸 것으로 안다.” ㅆ빌딩 앞에서 만난 한 입주민이 말했다.
안보강연장에 나타난 추선희 총장
어버이연합 사무실은 보름 전만 해도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최근에는 찾아오는 기자가 거의 없다고 한다. 관련 보도도 덩달아 줄었다. 여러 의혹이 잠잠해지자 어버이연합은 반격을 시작했다.
추 총장은 5월11일 예능프로그램 작가로 활동하는 유병재씨를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서울서부지검에 고소했다. 유씨는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5월7일 ‘고마워요 어버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 동영상에는 한 할아버지가 군복을 입은 채 가스통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 등이 담겼다. 또 집회를 다녀온 뒤 일당 2만원을 받는 모습도 그려졌다. 어버이연합 쪽은 이같은 내용이 허위사실인데다 어버이연합에 모멸감을 줬다며 고소장을 제출했다.
이튿날인 5월12일에도 추 총장은 개그맨 이상훈씨를 서울남부지검에 고소했다. 5월8일 KBS <개그콘서트>에서 동료 개그맨이 “계좌로 돈을 받기 쉬운 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라고 묻자 이씨가 “어버이연합”이라고 대답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전경련의 어버이연합 자금 지원을 풍자한 것이다. 어버이연합 쪽의 말을 종합해보면 고소는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여러 의혹 제기가 잠잠해지자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어제 추 총장이 종묘공원에서 강연했는데 왜 미련하게 똥구멍만 따라다니고 있어?” 5월13일 오전 10시쯤 찾아간 어버이연합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는 추 총장의 행방을 묻자 ‘꼴 좋다’는 듯 웃었다.
어버이연합 회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추 총장은 5월12일 오후 2시부터 서울 종로구 종묘공원에서 1시간 가까이 ‘안보강연’을 했다고 한다. 종묘공원 안보강연은 어버이연합을 둘러싼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평일 오후 1시부터 한두 시간씩 100여 명이 참여하는 가운데 정상적으로 열리고 있다고 했다. 웃음은 잠시였다. 큰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기자랑 이야기하지 마!” “내보내!”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높아지던 찰나에 한 할아버지가 기자의 손목을 붙잡고 회비 납부 내역을 붙여둔 벽 쪽으로 이끌었다. 할아버지는 자기 이름이 적힌 유공자등록증을 꺼냈다. “자, 여기 봐. 오늘 내가 2만원 냈지? 여기 이거 내 이름 맞지? 우리가 회비 내서 운영하는 거야. 왜 자꾸 와서 귀찮게 해. 이제 나가.” 얼핏 본 회비 납부 내역에는 2만원, 3만원씩 돈을 낸 회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숫자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저기서 “내보내”라는 목소리가 커지자, 보다 못한 한 할아버지가 기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전날 추 총장이 서울남부지검에 고소장을 내러 갔다고 말해준 할아버지였다. “분위기 안 좋은 거 알잖아? 며칠 있다가 오면 그때 이야기하자고.” 할아버지는 끝내 건물 밖으로 나와 기자가 횡단보도 앞까지 가는 모습을 본 뒤에야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제대로 시작도 안 한 검찰 수사
30분쯤 지난 오전 11시30분께, 추 총장은 ㅆ빌딩 건물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기자가 가까이 다가서자 주변에 있던 노인들이 고함을 치며 밀어냈다. 추 총장은 그만하라고 손짓하며 입을 뗐다. 캐주얼 정장을 입은 그는 무척 피곤한 표정이었다. 말하는 중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잠적이 아니라 사무실에 매일 나와 있는데 안 만나는 것뿐이다. 어버이연합은 어르신들이 매일 폐지 주워오고 회비 내고 하면서 운영되고 있다. (지금 나오는 보도 내용은) 다 틀리다. (내가 이야기하면)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할 말 없다. 검찰에 가서 말하겠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어버이연합 사무실로 올라갔다.
추 총장은 검찰에서 모든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지만 수사는 지지부진하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4월21일 전경련과 어버이연합이 금융실명제법 위반과 조세포탈을 한 의혹이 있다며 서울중앙지검에 수사를 의뢰했다. 이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부장 심우정)에 배당됐다. 수사가 의뢰된 지 20일이 넘었지만 아직 전경련이나 어버이연합 관계자 소환 등 관련 수사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민주노총 등 6개 시민사회단체 역시 5월3일 어버이연합과 전경련 관계자를 비롯해 추 총장과 집회 개최 등 여러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진 허현준 청와대 행정관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은 민주노총의 고발 등과 관련해서도 수사 초기 단계에 이뤄지는 고발인 조사조차 벌이지 않고 있다.
김삼수 경실련 정치·사법팀장은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국민적 의혹이 큰 사건인데 검찰이 오랜 기간 수사에 나서지 않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의 어버이연합 개입 의혹 때문에 수사를 지지부진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고 말했다. 남정수 민주노총 대변인도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검찰이 계속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면 수사를 촉구하기 위한 여러 행동을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검찰이 계속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어버이연합 의혹과 관련한 태스크포스(TF)팀을 꾸렸다. 이춘석 의원과 박범계 의원이 각각 위원장과 간사를 맡고 최근까지 3차례 회의를 열었다. 국민의당도 협조하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제20대 국회가 개원하면 야당들은 이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에 본격적으로 나설 전망이다.
여소야대로 힘의 역학관계가 뒤바뀐 국회가 개원하는 날짜는 5월30일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 야당이 추가 의혹을 밝혀내고 검찰이 오랫동안 제대로 된 수사 결과를 내놓지 못한다면 특검을 도입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야당 TF 꾸리고 추가 의혹 조사 의지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개원을 하면 어버이연합뿐 아니라 보수단체와 국정원 혹은 청와대와의 관계 등을 전반적으로 확인할 예정이다. 국가기관이 보수단체 등을 활용해 여론 형성에 개입하는 행태를 내버려두면 다음 대선 때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같은 악습을 끊어내야 한다”며 진상 조사에 의지를 보였다.
정환봉 기자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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