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뭐라 그러는 거야?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답답한 마음에 통역을 다그치던 미국의 여성 대통령이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며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잠시 내년에 있을 한·미 두 여성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을 상상해봤다.
퍼스트레이디 출신의 두 정치인은 유사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많다. 일단 한 사람은 자타가 인정하는 지능을 갖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그냥 ‘반지성주의자’다. 무엇보다 둘은 성장 과정이 다르다.
힐러리 로댐 클린턴은 1947년 시카고의 보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남편 빌 클린턴을 만난 예일 대학 로스쿨에 진학하기 전까지는 열렬한 공화당원이었다. 그녀는 불과 31세에 아칸소 주의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45세에는 백악관 안주인 자리에 앉으며 권력의 맛을 알게 된다. 빌 클린턴 정권 8년간 그녀는 단순히 대통령의 조력자가 아닌 국정 운영의 동반자로서 수많은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면서 불가피하게 공화당과 이전투구를 벌이며 ‘투사’ 이미지를 얻었다. 힐러리 클린턴은 정권 말기 섹스 스캔들로 레임덕에 빠진 남편과 무관하게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2008년에는 대권을 노렸다 실패하지만 오바마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냈다. 그리고 올해 다시 지상 최고 권력의 자리에 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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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
힐러리 클린턴은 퍼스트레이디, 국무장관을 거쳐 올해 다시 지상 최고 권력의 자리인 미국 대통령에 도전한다. |
이런 과정을 거치며 한때 진보와 변혁을 대표했던 힐러리 클린턴은 지킬 것이 많은 기득권의 상징이 돼버렸다. 미국인들은 오히려 이번 대선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후보가 트럼프라고 본다. 문제는 그녀의 이념적 변질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정확하게 어떤 가치관과 신념을 대변하는 정치인인지 알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권력 의지에 비해 대통령 선거에는 재능이 없다. 2008년 상대적으로 무명이던 오바마에게 패했다. 2016년에도 무소속 출신인 버니 샌더스와 접전을 벌였고, 압승을 낙관했던 상대인 트럼프와의 전선에서도 현재 안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수많은 이단아들이 출연한 미국 정치사에서도 보기 드문 돌연변이다. 트럼프는 변칙 복서가 아닌 불법 복서다. ‘오바마는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라거나 ‘테드 크루즈의 아버지가 케네디 대통령 암살에 관여했다’ 따위 그의 ‘픽션’들은 사실관계나 상식을 초월한다. 하지만 이런 황당무계하고 저속한 공격들은 그가 이번 선거에서 내러티브를 주도하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클린턴 캠프에서도 기상천외한 트럼프를 이기려면 창의적인 전략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은 듯하다. 이번 대선을 ‘안티 트럼프’ 프레임으로 단순화해 ‘파시스트 사업가’에 대한 찬반투표(referendum)로 몰고 가는 것이 과연 현명한 전략인가 하는 의문도 제기된다. 그래서 더 이상 트럼프를 무식하다고 무시하지 않는다. 이제 그는 매우 현실성 있는 위협이기 때문이다.
힐러리 클린턴의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근본 원인은 유권자들이 그녀를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예민한 이슈들에 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고수해왔다. 그리고 어떤 원칙이나 설명도 없이 특정 정책에 대한 견해를 종종 바꿔왔다.
사실 비밀과 거짓말을 빼면 클린턴 부부를 논할 수 없다. 남편 빌을 항상 따라다니던 문제가 성추문이라면, 힐러리를 괴롭히는 스캔들은 주로 돈 문제다. 국무장관 시절 수많은 규정을 위반한 것으로 드러난 이메일 스캔들, 버지니아 주지사를 통해 소개받은 중국인 사업가로부터 조건을 알 수 없는 거액의 기부금을 받은 점, 빌 클린턴 정권 시절 깔끔하게 털지 못한 화이트워터(빌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 시절, 부인 힐러리의 친구들과 함께 설립한 화이트워터 부동산 개발회사 관련 사기사건 의혹) 비리 혐의들은 모두 클린턴이 공개하기 꺼려하는 자금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편 이 같은 수많은 악재들은 이제 미국인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서 이미 그녀의 지지도에 어느 정도 반영돼 있다는 의견도 많다.
미국인 55.4% “힐러리 비호감”
힐러리 클린턴은 소득불평등과 경제양극화를 고쳐야 한다며 유세장에서 목청을 높이지만, 골드먼삭스로부터 강연 세 번에 67만5000달러(약 7억8000만원)라는 거금을 받아 챙겼다. 그 강연들의 내용을 공개하라고 버니 샌더스와 언론은 요구하지만, 그녀는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있다. 월스트리트를 대변하는 대선 후보는 트럼프가 아닌 클린턴이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을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 <허핑턴 포스트>에 따르면 미국인 중 55.4%가 힐러리 클린턴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녀에게 조금 위안이 되는 사실은 트럼프 역시 비호감이라는 것이다.
논리적이지만 설득력이 없고, 친절하지만 따뜻하지 않은 힐러리 클린턴의 연설은 한 단어 한 단어가 조심스럽게 꿰맞춘 무미건조한 판결문 같아서 감동적이지도 흥미롭지도 신선하지도 않다. 여러 보좌관이 모여서 쓴 티가 나 마치 고전 히트곡들을 샘플링한 리믹스 음원처럼 들린다. SNS상에서도 그녀는 구시대의 어휘에 딱딱한 어투로 글을 올린다. 트럼프의 자극적인 트위터와 달리 클린턴의 포스팅은 궁금하지가 않다. 클린턴의 유튜브 바이럴 동영상들 역시 어색하기 그지없다. 토크쇼에 나온 그녀의 모습은 과하게 연출된 느낌을 줘서 홍보회사 직원들이 가공해낸 인물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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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Photo
미국 민주당 진보 세력의 상징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위)이 클린턴의 러닝메이트 후보로 거론된다. |
경직된 인상을 주는 클린턴에 비하면, 트럼프와 샌더스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부동산 갑부는 돈이 많아서, 민주적 사회주의자는 신념이 확실하기 때문에, 틀에 갇혀 있거나 무언가에 얽매여 있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 같은 인상을 준다. 미국인들은 이런 거침없고 진솔한 정치인들에게 호감을 느끼고 공감한다. 생각해보라. 세 정치인 중 누구와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면 즐겁겠는가?
흥미로운 점은, 민망한 사건에 엮여 거짓말을 넘어 위증까지 감행하면서 탄핵 문턱까지 갔던 남편 빌 클린턴은 아직도 인기가 좋다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지원 유세가 아닌 공동 유세를 펼치는 전직 대통령은 힐러리 클린턴의 러닝메이트라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권력’이라는 목표 앞에서 그들 부부는 하늘이 맺어준 ‘영혼의 동반자’ 같아 보인다.
약점이 많은 힐러리 클린턴에게는 진짜 러닝메이트, 즉 매력적인 부통령 후보가 절실하다. 역사적으로 미국 대선에서 부통령 후보는 선거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구실을 한 경우가 많다. 1960년 케네디의 부통령 존슨이 대표적인 성공 사례였다면, 2008년 존 매케인의 세라 페일린 부통령 후보가 그 정반대의 경우였다.
전통적으로 부통령 후보 지명은 세 가지 요소를 고려한다. 가장 보편적인 기준은 본선에서 경합주(swing state)의 승리를 가져올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다. ‘특정 지지층’을 염두에 둔 선택 역시 자주 쓰는 전략이다. 마지막으로 당의 단합을 위한 선택이다. 이념적으로 나뉘어 있는 2016년의 민주당은 이 범주에 해당될 수 있다. 클린턴을 괴롭히는 샌더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보듬지 않고는 본선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론조사기관 유고브(YouGov)에 따르면 샌더스 지지자의 61%는 클린턴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지난 몇 달간 동일한 설문으로 이뤄진 진행된 조사를 분석해보면, 클린턴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샌더스 지지자들의 수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이런 현상은 민주당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샌더스는 노골적으로 클린턴이 후보가 되면 진보 세력을 대변하는 인물을 부통령으로 지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 들어 언론이, 민주당 진보 세력의 상징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에게 지나칠 정도로 초점을 맞추는 이유다.
샌더스 지지자 20% “트럼프 찍겠다”
그런데 문제는, 클린턴과 민주당이 원하는 것은 샌더스의 정책이 아니라 그의 지지자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속셈을 간파한 샌더스 진영은 더 강경하게 돌아서고 있다. 샌더스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반영되지 않는다면 판을 완전히 깨겠다는 분위기다. 대다수가 무당파인 샌더스 진영은 민주당에 대한 충성도가 없다. 잃을 게 없다고 믿는 그들은 11월 선거일에 기권할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워싱턴 포스트>와 ABC가 공동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샌더스 지지자 중 20%는 대선에서 트럼프를 찍겠다고 밝혔다. 경선 이후 당내 통합과 봉합은 쉽지 않을 수 있다.
현실정치가 현명한 타협이라면, 투표는 차악의 선택에 가깝다. 이번 미국 대선처럼 두 후보 모두 경쟁적으로 비호감인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둘 중 누가 영혼을 팔았는지, 누가 메피스토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클린턴이 비록 신뢰하기 어렵고 비호감이긴 하지만 내년 초에 백악관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를 싫어하는 미국인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클린턴이 전당대회를 치르며 샌더스의 지지층을 끌어안는다면 지지율 역시 상승할 것이다.
1992년 이후의 모든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는 예외 없이 18개 주요 주에서 승리하며 242명 선거인단(당선을 위해서는 270명 선거인단이 필요하다) 이상을 확보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한 당이 8년 이상 집권한 경우는 단 한 번밖에 없다. 레이건의 후임자 조지 H. W. 부시가 당선된 1988년 대선이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퇴임하는 레이건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질 줄 몰랐기 때문이다. 2016년의 오바마 역시 레임덕을 모른 채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현직 대통령의 본격적인 지원 유세가 시작되면 민주당 후보는 승기를 잡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모두 예측일 뿐이다. 선거에는 늘 돌발변수가 따른다. 기득권과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무식한 후보가 지도자로서 신뢰가 덜 가는 후보를 꺾고 대통령이 되는 악몽을 한국 유권자들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미국 유권자들이라고 그런 거사를 이뤄내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옳든 그르든, 좋든 싫든 대의민주주의라는 제도는 한정된 범위 내에서 유권자들에게 선택을 떠맡긴 후, 일반 시민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그래서 때론 위험한 결과가 나오는지도 모른다.
안보 매파인 클린턴이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되든, 보호무역주의자인 트럼프가 ‘미국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출몰하든, 지구 반대편 한반도의 변화는 불가피해 보인다. 이제 막바지로 치닫는 미국 대선은 막장 코미디에서 시작해 어느새 서스펜스 스릴러로 바뀌어버렸다. 결말이 엽기적인 호러로 변해 우리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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