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역사교육 연구자들이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흥사단 강당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역사·역사교육 연구자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이 선언에는 역사 원로교수·교수·강사·대학원생 1167명이 이름을 올렸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국정교과서 논란
‘중학교 역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여부를 결정짓는 정부 발표가 임박한 가운데, 보수와 진보를 망라한 역사·역사교육계 연구자들이 9일 국정화 시도 중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전국의 역사 교사들과 서울대 역사 관련 5개 학과 교수들, 독립운동 단체, 학부모, 교육감들에 이어 전문가 집단인 역사 원로교수·교수·강사·대학원생 1167명이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서 사실상 정부·새누리당을 빼면 국정화를 주장하는 세력을 더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새정치민주연합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 특위’(도종환 위원장)를 만들고 일부 보수언론도 ‘민주적 다양성과 개방성을 억압하는 국정교과서론 세계의 인재와 자본을 끌어들이는 매력국가가 될 수 없다’며 반대하고 나선 상황이라 박근혜 정부가 국정화를 강행하면 사회적 갈등이 심각할 전망이다.
정부·새누리당은 공개적으론 아직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여부를 결정한 바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초읽기’에 들어간 게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실제 <동아일보>는 이날 정부 고위관계자의 말을 따서 “당정청 협의를 통해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사실상 기정사실화됐고 발표 시점을 조율하는 단계”라고 보도했다. 교육부는 즉각 “보도 내용은 사실과 다르며 중등 역사 교과서 국정화 여부는 결정된 바 없다”고 반박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당 안팎에서 국정화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상황에서 정작 정부는 입을 닫은 채 군불을 때며 ‘여론의 동향’을 살피는 모양새다.
시민사회와 전문가들은 이달 들어서만 일곱번째 실명 선언을 발표하며 연일 ‘국정화 반대’의 고삐를 죄고 있다. 2일 서울대 역사 전공 교수들과 전국 역사 교사들, 4일 독립운동 단체, 7일 학부모 1만3042명, 8일 수도권·남부권 시·도교육감 10명, 9일 충청권 교육감 4명에 이어 9일 역사·역사교육 연구자들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역사·역사교육 연구자 선언’을 발표했다.
연구자들은 9일 오전 서울 흥사단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교과서는 교과서 집필·편찬은 물론 수정·개편까지 교육부 장관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독점적인’ 교과서”라며 “국정제 회귀는 40여년에 걸친 민주화 운동의 성과, 대한민국이 이룩한 사회·문화적 성취 그리고 시민, 연구자들의 열망과 노력을 부정하는 처사”라고 밝혔다.
학계 원로·교수 1167명 실명반대
이달 들어 벌써 7번째 집단선언
교사·학부모·시도 교육감 등 망라
“친일세력의 역사세탁 작업 일환
강행땐 집필거부·대안교과서 마련”
정부는 발뺌·군불때기 양동작전
이들은 “1992년 헌법재판소가 국사의 경우 다양한 견해를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며 정부·새누리당에 ‘헌법정신 수호’를 주문했다. 서울대 역사 전공 교수들도 2일 “역사(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는 헌법 정신과 합치하지 않으며, 국가와 사회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역사·역사교육계 연구자들의 공동 선언은 보수와 진보를 두루 아우르는 선언인데도, 이례적으로 국정화 시도의 배후에 친일·독재 세력이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연구자들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는 친일·독재의 역사와 무관치 않은 세력이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은폐하거나 미화하려는 ‘역사세탁’ 작업의 일환이라는 비난이 일고 있다”며 “역사교육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비정상적인 행동들”이라고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선언 발표자인 정용욱 한국역사연구회장(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은 ‘국정화 불가’는 이미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가 현장에서 0%대 채택률을 보였는데, 토론을 한다면 국정화를 주장하는 쪽 대표는 패널도 아니고 방청석에 앉아야 할 정도”라고 비유했다.
역사 연구자들은 선언문에 ‘미래세대’에 대한 우려도 담았다. 이들은 “정부·여당의 국정화 기도가 교육의 자율성과 중립성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그 피해가 결국 미래세대에 고스란히 전가될 수밖에 없는 점을 심각하게 우려한다”며, 정부·새누리당의 자제를 당부했다. 사회를 맡은 김성보 역사문제연구소 소장(연세대 사학과 교수)은 “국정화는 한국 사회의 문화 역량을 위축시키고, 역사적 상상력을 소멸시켜 문화산업에 악영향을 끼치고,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하는 문화융성에도 어긋난다”고 짚었다.
역사 연구자들은 정부가 국정화를 강행하면 집필 거부와 대안 교과서 마련 등 대응에 나서겠다고 강조했다. 정용욱 회장은 “정부가 국정제 시도에서 부닥칠 첫 난국은 교과서 집필자를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집필에 참여하실 분이 거의 없으리라 예상하지만, 상징적인 의미에서 불참 운동도 계획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안 교과서 등 풍부하고 정확한 역사 교육을 위한 방안도 준비되고 있다. 정 회장은 “교육 현장에 국정교과서를 강요한다면, 학계와 교육계가 대안 교과서를 포함해 국정교과서의 문제점을 바로잡을 수 있는 자료들을 마련해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교사 2255명도 2일 선언문을 통해 “국정교과서 폐지 운동을 벌이고 대안적 역사 교육을 실천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새정치민주연합과 정의당 등 야당은 10일 교육부 국정감사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집중 제기할 예정이다. 정진후 정의당 의원은 9일 “1994학년도부터 2004학년도까지 수능 수학과 영어가 필수였는데, 고교 수학·영어 교과서는 검정이었다”며 “2017학년도부터 한국사가 수능 필수라 국정화해야 한다는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의 주장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이달 들어 벌써 7번째 집단선언
교사·학부모·시도 교육감 등 망라
강행땐 집필거부·대안교과서 마련”
정부는 발뺌·군불때기 양동작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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