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광화문광장서 2차범국민행동 촛불집회 열려
지난주엔 ‘최순실’…이날은 ‘기승전-박근혜’
“대통령 담화 보고 더 화나” “사과 말고 퇴진”
분노한 ‘보통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5일 서울도심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규탄 집회에는 주최측 추산 20만명에 육박하는 인파가 모여들었다. 많은 참가자들이 “집회에 처음 나왔다”고 말했다. 교복을 입은 청소년, 대학생, 유모차를 끌거나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나온 가족, 종교인 등 계층도 다양했다. 지난주 집회 땐 ‘최순실’을 언급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날은 ‘기승전-박근혜’였다. 이들은 “박근혜는 물러나라”, “사과말고 퇴진하라” 등의 구호를 자연스럽게 목청껏 외치며 서울 도심을 행진했다. 부산, 대구, 경주, 광주, 제주 등 전국에서도 촛불이 타올라 전국적으로 약 30만명이 모였다고 주최측은 추산했다.
5일 오후 4시부터 민중총궐기투쟁본부 등이 주최하는 2차 범국민행동 촛불집회가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전날 박 대통령이 사과 담화문을 발표했지만, 참가 인원은 지난 주말(10월29일) 1차 집회보다 크게 증가해 주최측 추산 20만명(경찰 추산 4만명)에 달했다.
시민들은 격한 불만을 쏟아냈다. 여자친구와 함께 집회에 나온 정세진(23)씨는 “다들 최순실 이야기만 한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제가 뽑지도 않았는데 왜 피해를 입어야 하나”라며 “박근혜 대통령도 문제다. 어제 담화문 보고 어이가 없었다. 감정에만 호소하고 책임 회피하는 모습이었다. 화가 나서 집회에 나왔다. 이번에 집회 처음 나왔다”고 말했다. 고교 동창 한명과 참석한 문아무개(66)씨는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제역할도 못하면서 자리에 남아있는 게 부당해서 나왔다.
기성세대가 제대로 잘 하지 못해 젊은이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서 그런 마음으로 책임감으로 왔다. 국민들이 제대로 살수 있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호정(49)씨는 “여태까지 시위는 편협하다고 생각해 한번도 나온 적 없었다. 그런데 이번 사태는 모든 국민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화가 나는 사안이다. 나오고 싶은데 못나오는 친구들 있어서 카카오톡으로 생중계 중이다”고 말했다. 윤아무개(59)씨도 “딸에게 먼저 제안을 해서 같이 나왔다”며 “국민이 국민 대우를 못받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하는 일이 국민을 국민으로 보지 않고 있는 일들이다. 최순실 게이트도 법이나 국민을 우습게 보니까 벌어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망나니짓이다. 사퇴해야 한다”고 말했다.
행진 뒤 광화문광장에서 집회가 다시 열렸다. 관객석에 앉아 있던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가 깜짝 게스트로 무대에 올랐다. 그는 “단군 이래 어떤 집회와도 성격이 다르다”며 “우리는 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은 단지 정권퇴진을 위해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새로운 삶, 학문, 철학, 의식, 문화…새로운 삶을 원하는데 낡아빠진 삶을 지속시키려는 사악한 무리들이 곳곳에 꽉 차 있다. 이것을 처리하는 것은 정치인들이 탄핵해서 될 일도 아니고, 오로지 우리 국민의 의식 운동으로, 민중의 행진으로 모든 무리들을 다 쓸어버려야 된다”며 이렇게 말했다.
행진에 앞서 열린 1부 행사 때 시국연설 무대에 올라온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최은혜씨는 “어떤 나라에서 살고 있는가, 민주주의 국가가 맞는 것인가 의문이다. 이화여대에서는 정유라 부정입학으로 최경희 총장이 사퇴했다. 최경희 총장 사태가 끝이 아니었다. 최순실은 전국 곳곳에서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침해,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있었다”며 “박근혜 정권은 진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국민은 빼앗긴 권력을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세 딸을 뒀다는 한 어머니도 무대에 올라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정직하게 착하게 살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아도 아빠가 성실히 열심히 돈을 벌어오고 너희는 엄마아빠를 자랑스러워 해야한다고 말하면서 길러왔다. 그런데 말을 사 줄 수 없는 저와 남편은 자랑스러운 부모가 아니다. 왜 이 부끄러움이 우리 몫이 되어야 하는가. 다시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앞서 경찰은 이날 행진을 불허했다. 하지만 법원이 참여연대가 신청한 집회금지 통보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부장 김국현)은 “신청인이 이 사건 집회·시위로 인한 교통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300명의 질서유지인을 배치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신청인은 1주일 전에도 유사한 성격의 집회·시위를 개최했으나 큰 혼란 없이 평화적으로 마무리되었다”고 지적했다. 법원은 “교통 불편이 예상되나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함에 따른 것”이라며 “교통 소통의 공익이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비해 크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이 집회·시위가 금지될 경우 불법집회·시위가 된다.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국민들의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법원 결정에 따라 도로 행진은 허용하되, 시위대의 청와대 진입을 막기 위해 광화문 세종대왕상 근처에 차벽을 설치했다. 경찰은 역대 최대 수준인 220개 중대 1만76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박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와 경북에서도 시민사회단체와 노동단체 관계자 등 1000여명이 시국대회를 열고 가두행진을 벌였다. 부산에선 부산역 광장에서 ‘박근혜 정권 퇴진 부산운동본부’ 출범식이 열렸다. 이날 촛불집회와 가두시위는 서울 뿐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들에서 동시다발로 진행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와 경북에서도 이날 '퇴진' 요구 집회가 열렸다. 대구지역 시민·사회단체와 노동단체 관계자 등 1천여 명은 오후 6시 대구 중구 2·28기념공원에서 '정권퇴진, 대구 1차 시국대회'를 열었다. 집회 후 참가자들은 반월당까지 약 1.2㎞ 구간에서 가두행진을 벌였다. 이밖에 경주, 광주, 강원도 원주, 제주 등에서도 집회나 촛불시위가 이어졌다.
공식 행사는 밤 9시께 끝났다. 하지만 시민들은 밤늦게까지 케이티광화문지사 앞 광장에서 자유발언을 이어갔다. 이날 인원규모와 열기는 애초 집회쪽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 각 단체 세력들이 서울로 집결하게 돼 있는 다음주 12일 민중총궐기 집회는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시민들 시위의 절정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고한솔 박수진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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