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노조 ‘김영한 비망록’ 일부 공개
“통진당 해산 판결-연내 선고” 실장 지시 표시
박한철 소장, 13일 뒤 “연내 선고” 밝혀
김 실장, 헌재 결정 서두르게 된 배경 의혹
청와대, 대통령 비판 ‘깨알 응징’ 지시
다이빙벨·홍성담 그림도 일일이 대응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2014년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서둘렀던 데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이 2일 일부 공개한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을 보면, 2014년 10월4일 수석비서관회의 내용에 김기춘 실장의 지시사항을 뜻하는 ‘長’(장)이라는 글씨와 함께 ‘통진당 해산 판결-연내 선고’라고 쓰여 있다. 이 비망록은 김 전 수석이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 등에 참석해 기록한 일종의 업무수첩으로, 대부분 김기춘 실장이 주재하거나 가끔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경우도 있다.
그해 10월17일 국정감사 오찬장에서 박한철 헌재소장은 국회의원들에게 해산 심판 선고를 ‘올해 안에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에는 대법원에 걸린 이석기 통진당 의원의 사건이 처리된 뒤에나 헌재의 해산 결정이 가능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던 때라, 박 소장의 갑작스런 발언은 논란이 됐다. 실제 헌재는 이후 일사천리로 재판을 진행해 대법원의 판결이 나오기 전인 그해 12월19일 재판관 8 대 1의 의견으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렸다. 김 전 수석의 비망록은 이렇게 헌재가 서두른 배경에 김 전 실장이 있었던 것 아니었냐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이뿐 아니라, 비망록엔 청와대가 비판적 언론 보도는 물론 영화, 예술작품, 심지어 개인의 비판적 목소리까지 전방위적으로 검열하고 일일이 대응을 지시해온 정황이 담겨 있다.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남긴 기록의 일부.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에 대한 대응 정황이 나타나 있다. 출처: 전국언론노동조합
기록을 보면,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청와대가 언론 보도뿐 아니라 대통령을 비판하는 문화 활동까지 모두 ‘대통령 모독’으로 규정하고 사실상 검경 수사를 지휘한 정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국가기관, 여당, 보수단체 등을 동원해 집행한 사례도 다수 확인됐다.
청와대는 특히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대통령 비판에 과도한 관심을 보였다. 이상호 전 <문화방송>(MBC) 기자가 만든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에 대한 전방위 압박과 응징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전부터 끈질기게 지시한 것이 대표적이다. 비망록 2014년 9월5일치에는 “다이빙벨-교문위-국감장에서 성토 당부(신성범 간사)” 기록이 나오고, 그 뒤 “다이빙벨-다큐 제작 방영-여타 죄책(죄를 물음)”(9월6일치), “부산영화제-다이빙벨-이용관 집행위원장/60억 예산 지원”(9월10일치), “다이빙벨 상영할 것으로 예상됨, 수사”(9월20일치) 등의 기록이 이어진다. “다이빙벨 상영-대관료 등 자금원 추적-실체 폭로”(10월22일)란 대응 방안에는 김기춘 비서실장의 지시를 의미하는 ‘長’으로 표시돼 있다.
실제 이 기록대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여당 의원들은 그해 국정감사에서 “다이빙벨 상영 금지”를 주장했고, 부산시는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에 감사를 벌여 이용관 집행위원장을 사퇴시켰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고영재 한국독립영화협회 대표는 “(비망록대로) <다이빙벨>의 배급사인 시네마달은 내사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풍자한 홍성담 작가의 걸개그림 <세월오월>이 2014년 8월 광주비엔날레에서 전시될 예정이었다가 광주시 등의 반대로 취소된 데도, 청와대의 개입이 작용했다. 이 시기 비망록에는 “광주비엔날레특별전, 광주시장(윤장현)”(8월6일치), “광주비엔날레-개막식에 걸지 않기로-광주시장”(8월8일치) 등 청와대가 광주시장을 압박한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다수 나온다. 특히 8월7일치에 “우병우팀, 허수아비 그림(광주) 애국단체 명예훼손 고발”이란 기록이 나오는데, 실제로 다음날 보수단체들이 홍 작가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명예훼손 사범 엄단”(8월11일치), “VIP(대통령) 모독 장하나 의원-중앙지검 고발(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8월26일치), “수원시 백정선 의원 VIP 모욕 件-응징 방법 강구”(9월26일치), “대통령 모욕 전단 살포 건(경찰)-이병하/건조물 침입 의율 상태, 경범죄법으로 즉결처리 검토”(11월1일치) 등 청와대는 대통령을 비판하는 발언 하나하나에 꼼꼼하게 ‘응징’ 방안을 논의했다. 이 가운데 장하나 의원에 대한 대응은 김 실장 지시를 뜻하는 ‘長’으로 표시돼 있으며, 전단 살포 건 때문에 “경범법 법정형 상향 개정”(11월3일치)까지 검토한 것으로 보인다.
비판적 언론 보도에 대한 대응도 또다른 큰 축이었다. 기록을 보면, ‘비선실세’ 의혹을 제기한 <시사저널>과 <일요시사>에 대해 2014년 7월 박 대통령을 뜻하는 ‘領’(령)이 쓰여 있고 “피할 수 없다는 본때를 보여야” 발언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11월 <세계일보>가 ‘정윤회 문건’을 보도한 뒤에는, “세계일보 세무조사 중(?)”(11월26일치) 기록이 나온다. 28일에는 “세계일보 공격 방안”이라며 “수사상황으로 전환/국정조사 부당” 등을 큰 방향으로 설정했다. 12월5일께 검찰이 세계일보를 압수수색할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이 돌았는데, 비망록에는 이미 그 전인 12월1~2일 ‘長’이란 표시와 함께 “압수수색 장소-세계일보사”, “압수수색” 등의 기록이 등장한다. 최원형 김원철 기자 circle@hani.co.kr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남긴 기록의 일부. 홍성담 작가의 작품 <세월오월>에 청와대가 대응을 논의한 흔적이 나타나 있다. 출처: 전국언론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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