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 위상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이제는 아예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지난 15일 청와대 현기환 정무수석이 정의화 국회의장을 찾아가 나눴던 대화를 접한 사람이라면, 청와대의 국회 경시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현 수석은 국회의장이 선거법만 직권으로 상정하는 것은 ‘의원들 밥그릇’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라며 테러방지법, 경제활성화법, 노동개혁법 등 청와대가 요청한 쟁점법안들을 먼저 직권으로 상정해 줄 것을 정의화 국회의장에게 직접 요청했다. 현 수석은 쟁점법안은 ‘국민이 원하는 법’이라며 의미를 부여한 반면, 선거법은 ‘의원들 밥그릇’이라며 깎아내렸고, 국회의장은 그 ‘밥그릇’만 챙겨주는 사람이라고 훈계를 한 셈이다.
현 수석의 이런 오만방자한 언행은 전날인 14일에 있었던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의 대통령 발언이 그 배경이다. 박근혜는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대량실업이 발생한 후 백약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국회를 질타했다. 이 발언을 신호탄으로 청와대와 내각은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였다.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15일 춘추관에서 “국회의 ‘존재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고 겁박했고, 같은 날 국무회의에서 최경환 부총리는 ‘입법전쟁’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법안 처리를 재촉했다.
현 수석은 정의화 의장 앞에서의 발언에 대해 대통령의 재가나 지시를 받은 게 아니라고 밝혔다. 그 말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며 그러고 싶지도 않다. 문제는 입법부의 수장 앞에서 보여준 정무수석의 태도다. 국회가 오죽 하찮게 보였으면 대통령을 대리한 것도 아니라고 당당히 밝힌 청와대의 일개 수석이, 입법부의 수장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모욕할 수 있는 것인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권력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질서를 깔아뭉갠 것이다.
청와대가 요청한 ‘쟁점법안’들은 말 그대로 이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쟁점들이 많아 장시간에 걸쳐 많은 논의가 필요한 법안들이다. 사안 하나하나가 국민 기본권과 국민의 복리, 이해 충돌의 문제, 민주주의의 원칙 등을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할 법안들이며, 이는 어디까지나 법을 입안해야 할 국회의 몫이요 권리인 동시에 중대한 국회의 책무이기도 하다. 청와대가 어떤 논거로 그 쟁점 많은 법안에 대해 ‘국민이 원하는 법’이라며 입법을 재촉하는 것인지 국민은 알 길이 없다.
선거법은 지역과 신분 또는 국민이 속해 있는 각 분야의 성격에 따라 국민의 대표성을 어떻게 구현하고 국민의 권리 위임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대의민주주의의 핵심 사항이다. 이를 기반으로 정당 간에 공정한 선거를 위한 ‘게임의 룰’을 정하는, 정당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정치관계법이다. 이처럼 중요한 선거법을 현 수석이 한낱 ‘의원들의 밥그릇’으로 규정한 것은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부정하거나 아예 무시하고 있다는 청와대의 인식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라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처럼 모욕을 당하고도 여당의 의원들이 분개는커녕 청와대의 입장을 적극 두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국회가 통법부니, 청와대 이중대니 하는 따위의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청와대가 국회에 법안을 설명하고 입법을 요청하는 것 자체를 ‘삼권분립 위반’이자 ‘입법권 침해’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일개 정무수석이 입법부의 수장을 만나 입법절차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모욕을 주는 행위는 명백한 입법권 침해이며 기본적인 예의에도 벗어난 일이다. 입법부 수장에게 법안에 대한 설명이 절실하게 필요했다면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마땅하며 최소한 총리 정도의 위상은 되어야 한다. 그에 앞서 야당 대표의 의견을 진지하게 듣는 기회도 만들었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 박근혜는 이 사안과 관련해 국무회의 석상이나 청와대 비서관 회의에서 거친 언사로 자신의 주장만을 읊어댄 것 외에는 아무런 한 일이 없다.
현 시국을 ‘국가비상사태’로 인식하는 청와대의 상황판단 또한 뜬금없다. 우리 경제가 비상사태를 선포할 정도로 나빠졌다면 우선 대통령은 책임을 통감하고 대국민 사과와 함께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동안 박근혜 정권이 성장 중심의 밀어붙이기 정책으로 경제를 운영해왔지만 실제로 경제현실은 정부 스스로 전망하고 약속했던 경제수치가 대부분 폐기될 정도로 실패의 연속이었다. 이처럼 경제에 실패한 정부가 아무런 설명도 사과도 없이 국회와 야당에 책임을 전가하고 질타하는 것은 후안무치요 방귀뀐 놈이 성내는 적반하장에 다름 아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청와대 정무수석이 쟁점법안의 직권상정을 요구했을 때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는 18일 이만섭 전 국회의장 영결식에서도 의회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 흔들리고 있는 오늘의 상황을 개탄하면서 청와대가 직권상정을 강요하는데 대해 자신의 소회와 결기를 다짐했다.
이에 대해 친박의 김태흠 의원은 한 라디오에 출연해 “의장으로서 폼만 잡는 것이지 국가를 생각하는 건 하나도 없다”며 “국회의장이 뭐가 필요하냐”는 막말을 해댔다. 누워서 침을 뱉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딱한 모습이다. 국회의 위상과 권위를 지키려고 나름 노력하는 국회의장을 ‘폼만 잡는’ 사람으로 멸시하는 자가 삼권분립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정작 삼권분립이 위기에 처하고 입법권이 침해되는 것은 이런 자들이 권력구조의 틈을 이용해 국회에 기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회가 이처럼 행정부로부터 ‘존재 이유’를 묻는 상황까지 쇠락하게 된 이유는 대통령의 독선과 독주 때문이 아니다. 청와대 비서관들의 오만 때문도 아니다. 삼권분립이 흔들리고 입법권이 침해되고 있는 진짜 이유는 국회 스스로 자초한 것이며 바로 이러한 영혼 없는 의원들이 국회 안에 득실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공천권 따위의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국회의원으로서의 책임과 권한을 통째로 청와대에 헌납한 무지하고 무책임한 의원들 때문이다. 이런 자들이야말로 언론에 나와 폼만 잡고 다녔지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권한을 망각한 권력의 시녀가 아니고 무엇인가.
지난 여름 다수당인 새누리당 의원들은 자체적으로 결의한 국회법을 스스로 폐기하고 자신들이 선택한 원내대표를 스스로 끌어내렸다. 대통령 말 한 마디로 그렇게 된 것이다. 자기부정이요 자가당착이지만 이에 대해 일말의 부끄러움을 표한 의원들을 국민은 아직 보지 못했다. 이러니 청와대의 일개 수석비서관이 국회의 수장 앞에서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이고 청와대 대변인이 국회의 ‘존재 이유’를 묻는 일까지 벌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랜 기간 아버지 밑에서 독재에 익숙해 왔던 박근혜는 오죽하겠는가. 국회는 스스로 장기판의 졸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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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December 20, 2015
국회에서 폼만 잡는 사람이 누군가 [이완기 칼럼] 장기판의 졸이 된 국회… “국회의장이 뭐가 필요하냐” 누워서 침뱉기 막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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