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예선에서 손쉽게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고전했다. 예상 밖 선전을 펼친 상대 선수가 더 빛났다. 본선에서는 기이한 상대가 기다리고 있다.
8년 전에도 대세로 시작했지만 들러리로 끝났다. 우승자가 되려면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초반과 달리 고전한 대세, 사실상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부 장관을 짚어 본다.
# 믿음직스럽지 못한 베테랑(Clinton trust issue)
지난해 12월 미국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 미국인들이 ‘가장 중요한 대통령 자질’로 꼽은 것은 ‘정직’(32%)이다. 클린턴 전 장관의 치명적 약점이 여기에 있다. 월스트리트저널과 NBC뉴스가 지난달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 따르면 클린턴 전 장관이 ‘정직하다’고 답한 사람들은 19%에 불과하다. 반면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경우 응답자의 35%가 정직하다고 봤다.
‘정직하지 않다’는 꼬리표가 클린턴 전 장관을 계속 따라 다니고 있다. 세계 최대 검색사이트 구글에서 영문으로 그의 이름 ‘clinton’을 입력하면 ‘신뢰 문제’(trust issue)가 관련 검색어로 따라 나온다. 그만큼 그가 솔직하지 않다는 인식을 가진 미국인이 많다는 반증이다.
그렇게 보는 미국인들은 그의 언행이 계산적이고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꾼다고 생각한다. 국무장관 재임 시절인 2012년 9월 리비아 벵가지의 미국 영사관이 공격을 받아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대사 등 미국인 4명이 사망했다.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클린턴은 리비아 내전에 적극 개입해 놓고 결과가 실패로 돌아가자 “오바마 대통령과 리비아인들이 무능해서”라며 책임을 전가했다.
또 장관 시절 국무부 공식 이메일 계정이 아닌 개인 이메일 계정으로 업무 내용을 주고 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철저하게 보안을 지켜야 할 국가 중대사들을 집에 개인 이메일 서버까지 설치해 놓고 처리하는 등 보안 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뿐만 아니라 미 연방수사국(FBI)은 월권 의혹 관련 수사를 진행 중이어서 최악의 경우 기소될 수도 있다.
이밖에 클린턴 전 장관은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이던 2002년 이라크 전쟁을 강력하게 지지했다가 종전 이후 판단 착오라며 뒤집고 2004년 전후 동성결혼 합법화에 반대하다가 2013년 이후 돌연 지지로 돌아서며 오락가락 행보를 보였다. 또 지금은 미국의 주요 경제블록으로 꼽히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추진했다가 다시 반대 하기도 했다.
# 월가와의 연결고리
추진했던 정책 중에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해 신뢰를 잃은 대표적인 경우가 의료보험 개혁이다. 영부인 시절이던 1993년 클린턴 전 장관은 고용인이 피고용인의 의료보험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보험 혜택을 늘리려고 시도했으나 의사, 보험사, 제약사, 자영업체 등의 반발로 무산됐다. 이후 의료보험 개혁은 클린턴 행정부, 조지 W 부시 행정부 기간에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다가 오바마 집권 2기인 2013년에 추진됐다.
“평범한 미국인의 옹호자가 되겠다”며 친(親)서민 대통령을 자처하는 그가 막대한 부를 축적한 점도 논란거리다. 클린턴 부부가 2001년 백악관을 떠난 이후 벌어들인 돈은 2,000억원이 넘는다. 공직 경험과 명성을 바탕으로 한 저술, 컨설팅 활동을 했고 기업과 재단, 외국 정부 등을 대변하는 연설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특히 그는 국무장관을 그만둔 직후 골드만삭스에서 3차례 강연하고 67만5천 달러(약 8억 원)를 받았는데 선거기간 내내 약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강연 내용에 대해 함구하면서 “그들이 그만큼 줬을 뿐 모르는 일”이라며 뻗대고 있다.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강력한 경쟁 상대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이 같은 점을 문제 삼아 “(클린턴 전 장관이) 돈을 주는 사람들에게 조정 당한다”고 비판했다.
클린턴 전 장관이 대기업, 백만장자 등을 통해 정치자금을 후원 받고 있는 점도 서민 이미지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금융권에 지나친 규제를 펼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는 등 친(親) 월가 행보 또한 진보적인 이미지를 퇴색하게 만든다.
그렇다 보니 진보적인 색채를 강조하며 변화와 혁신을 주장하는 클린턴 전 장관의 이미지가 빛이 바랠 수 밖에 없다. 전세계적인 경기 침체에 따른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클린턴 전 장관이 개혁을 통해 미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일부 여론 조사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클린턴 전 장관보다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소득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인물로 꼽히고 있다.
# 건강 이상, 성 추문 등 쏟아지는 각종 네거티브 공세
여기저기서 견제하기 위해 쏟아져 나오는 네거티브 공세도 클린턴 전 장관이 넘어야 할 산이다. 건강 문제도 그 중 하나다. 만 68세인 그가 대통령직을 수행하기에는 건강에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민주당 경선이 시작되기 직전인 지난 1월에 ‘건강이상설’이 돌기도 했다. 선거를 앞둔 흠집내기일 수 있지만 2012년 장염으로 실신했다가 뇌진탕 증세로 한 달여 업무를 중단했던 일이 부각되면서 ‘뇌부상 문제가 재발했다’는 것이다. 클린턴 전 장관 측은 일축했지만 “두통과 불면증, 손떨림 등 여러가지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성 추문은 오랜 세월 따라 붙는 오점이 됐다. 트럼프 후보는 23년 전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성폭행 의혹을 제기하면서 네거티브 공세의 포문을 열었다.
# 현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잘 준비된 대통령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탄핵 위기까지 내몰렸던 클린턴 전 대통령 성추문 사건을 슬기롭게 극복하며 대통령 영부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점, 뉴욕 상원의원을 거쳐 국무장관을 역임하며 정치 외교 분야에서 쌓은 경험은 다른 후보와 비견될 수 없다.
클린턴 전 장관은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비현실적인 정책을 제시하거나 선정적인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실현 가능성을 면밀히 따진 뒤 공약을 내놓는다.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공약 이행을 위한 구체적 방침도 제시한다. 그가 제시한 금융개혁안과 건강보험개혁안은 월가 대형은행을 해체하고 단일의료보험체제를 만들겠다는 샌더스 상원의원의 공약보다 현실적이며 달성 가능성이 높다.
국무장관 시절 각국의 지도자와 관계를 맺으며 외교 분야 입지를 단단히 했다. 이란 핵 협상 타결을 이끌어 내는데 기여했으며 미국 외교 부문에서 소외됐던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관계를 돈독히 했다.
장관 시절 의회와의 갈등을 끈질긴 협상을 통해 풀어내는 등 정무적 감각 또한 탁월하다.
여성 인권 향상, 이민자 차별에 단호한 입장을 갖고 있다. 소수자의 권리 보장을 강조한다. 노동 환경 개선에 적극적이라는 점도 단단한 지지층을 형성하는 기반이다.
이런 클린턴 전 장관을 뉴욕타임즈는 ‘현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잘 준비된 대통령’이라며 치켜세웠다.
클린턴 전 장관의 대선 승리를 낙관하기 이르다. 남은 기간 그가 어떤 카드를 이용해 난제들을 뛰어 넘을 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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