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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May 26, 2016

“죽음보다 더 두려운 건 부끄러움이었다”

80년 광주 최후 지키다 총상 입은 여대생 ‘오월 일기’ 첫 공개

27일 새벽 YWCA 남아 저항
“총알이 주방 유리창 뚫고 들어와
난데없이 등에 뭐가 탁 박히더라”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김아무개(57)씨는 1980년 5월27일 새벽 계엄군의 광주 진압 소식을 듣고도 도망치지 않았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이었던 윤상원(1950~1980)은 26일 밤 옛 전남도청에서 고교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우리가 싸울 테니 너희는 돌아가서 역사의 증인이 돼라.” 여성들도 돌려보냈다. 하지만 1980년 당시 전남대 2학년이었던 김씨는 시민군들과 “광주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씨는 죽음을 각오하고 계엄군에 저항했던 300여명의 시민군 가운데 총알 파편을 맞아 다친 유일한 여성이다. 5월27일 그날, 옛 전남도청에서 170여명(여성 7명)이 붙잡혔고,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27명(여성 2명)이 체포됐다. 그리고 23명이 희생됐다.
김씨는 5·18항쟁 초기 “집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갔다”고 한다. 2남2녀의 장녀인 그는 광주학살 소식을 듣고도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에서 철수한 뒤부터 금남로 분수대 앞 집회에 나갔다. 그리고 5월26일 5차 궐기대회가 끝난 뒤 마지막 항쟁에 참가했다. “마지막 광주를 지킬 사람을 모았어요. 그때 남았던 거예요. (옛 전남도청 앞) 광주와이엠시에이(YMCA)에서 전부 모였지요.”
그는 시민군들과 함께 금남로에서 멀지 않은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에 배치됐다.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기 전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고 절규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광주의 새벽 공기를 갈랐다. “저는 총은 못 들겠더라구요. 그래도 그 전에 부끄러웠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부끄럽지 않고 싶었어요. 아마 그 마음은 시민들 모두 다 똑같았을 것 같아요.” 김씨는 그곳에서 계엄군의 총탄 파편을 맞고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실려 갔다.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던 그는 상처를 치료하고 그해 7월3일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데모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풀려난 김씨는 ‘오월의 경험’을 생생하게 일기(사진)로 기록해 두었다. 그는 5월27일 새벽 등 오월의 이야기를 대학노트 10여장 분량으로 적었다. “하나의 총알이 주방 유리창을 뚫고 맞은편 벽에 꽂혔다, 그 순간 우리들은 배를 땅바닥에 깔았다. 계속 쏟아지는 총알을 어떻게 다 피할 수가 있었겠는가. 난데없이 등에 뭐가 탁 박히며 코와 입으로 피가 쏟아져 나왔다.”(80.5.27)
김씨는 대학 졸업 뒤 컴퓨터 관련 회사를 거쳐 학습지 회사에서 20년 남짓 일하다가 지난해 퇴직하고 제2막 인생을 시작했다. “요즘 전두환씨 이야기가 회자되고 하니까, 욕만 나오지요. 5·18을 북한특수군 소행이라는 것은 더 웃기지요.” 김씨는 “오월 이후 평범하게 사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다”고 했다. 김씨는 80년 5월 36주년을 맞아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오월 일기를 <한겨레>에 공개하는 것도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말했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관련기사▶ 5월27일 “수술보다 더한 고통이 있었다” 5월30일 “우리가 폭도라니”
■ 일기 전문
5·18항쟁 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압(5월27일)에 맞서다 총탄 파편상을 입은 당시 전남대 여학생이 쓴 일기를 공개한다.‘오월의 일기’를 <한겨레>를 통해 36년만에 처음으로 공개한 김아무개씨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건 부끄러움이었다”고 말했다. 김씨가 퇴원 뒤 쓴 노트 10여장의 일기를 날짜에 따라 정리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거의 46여일(5.26~7.11)이나 일기를 쓰지 못한 것 같다. 그 때의 상황이 생생하게 떠오르진 않지만 기억을 더듬어가며 써 어쩌면 병상일지가 될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묵었던 손이고 잘 안 나갈건 뻔하나 잘 되기를 바라며….
<5월 26일>
오전 내내 피곤함과 비굴함으로 이리저리 뒤척거리다가 오후 3시 40분경 ㅇㅇ 동생과 함께 도청 광장에 들어섰다. 그동안 난 너무 많은 정신 소비로 인해 거의 탈진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인 27일,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 들어온다고 하지 않는가. 8일간의 부끄러움들을 회복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가두시위를 끝낸 7시 30분경, 100여명의 숫자 YMCA로 들어갔다. 여기서 저녁을 먹고, 상황실장, 예비역 대위(?)로부터 현재의 상황을 자세히 들었다. 2시간 30여분 동안을 머무르면서 난 뭘 생각했던가? 부끄럽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도 했으나 약간의 불안은 항상 나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10시경 YWCA로 건너가 곧바로 취침에 들어갔다. 내일 새벽이면 일어날 그 참상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겨우 잠이 들었다. 난 이때까지도 확신에 차 있었다. ‘우리는 꼭 승리할 수 있으리라. 우리의 정신력이 무력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건 오류였다. 어찌 그 최신식 무리를 이겨낼 수 있을 것이나.
<5월 27일>
이 날은 나의 제2의 탄생일이다. 이제 덤으로 사는 인생이긴 하나 열심히 아주 열심히 살아야겠다. 神이 나에게 준 또 한번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날 난 새벽 3시에 잠이 깨었다. 이때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온 걸로 기억된다. ‘광주 시민이여!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광주를 지킵시다. 도청으로 모여주십시오’ 대충 이런 거였다고…. 4시 30분경 큰 폭음에 온통 잠이 깨어 옆 건물로 몸을 피했다. 그 때 임아 언니, 남순이 언니, YWCA 간사와 함께 그러나 도망은 가지 않고 다시 YWCA로 넘어왔다. 어떤 마음상태로 그런 행동들을 취했는지를 모르겠다. 덤덤한 마음상태였던가. 솥에 밥을 앉히고 몇분이 경과했을까!
하나의 총알이 주방 유리창을 뚫고 맞은 편 벽에 꽂혔다, 그 순간 우리들(총을 든 2, 3사람의 남자, ㅇㅇ 언니, 나)은 배를 땅바닥에 깔았다. 계속 쏟아지는 총알을 어떻게 다 피할 수가 있었겠는가. 난데없이 등에 뭐가 탁 박히며 코와 입으로 피가 쏟아져 나왔다.(아침 6시 30분경) ‘아 맞았구나 하지만 난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다.’ 잠깐 동안 이런 생각을 했다. 공수부대 한 사람의 인도로 YWCA를 나와 하얀 앰뷸런스를 타구서 국군광주통합병원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나의 고달픈 병상생활이 시작되었다.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정신적인 고통이 훨씬 더했다. PT실에서 수술을 받고 605병실로 옮겨졌다. 수술시의 그 고통스러움, 그걸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건 잠시였다. 더한 고통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허위가 판을 치는 세계에서 진실을 고수하고 주장하기란 정말 힘이 드는 일이었다.
‘폭도’라는 낙인이 찍혀버렸다. 그것도 demo의 주동자로…, 어이해서 우리 광주시민이 폭도가 오직 자유와 정의를 쟁취하려했던 우리가 총을 들었다고 해서 폭도입니까. 아니면 반정부적인 행위들을 해서 폭도입니까.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해도
광주 시민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여태까지의 믿음, 확신들이 점점 틀어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아! 어찌하랴. 운명이여!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겨야됩니다. 독재라는 한 체제를….
우리의 광주의거는 이걸로서 끝이 났나 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실패로서…. 그러나 역사는 증명할 것입니다. 진실은 꼭 밟혀질 것입니다. 전 확신합니다. 정의의 불꽃이라도 남아 끝내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우리들은 불사조입니다. 무등산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장차 우리는 승리할 겁니다. 당장은 실패라고 낙인이 찍혔지만….
수술 후 진통으로 온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날부터 3일동안을 ㅇㅇㅇ 언니가 소변을 받아내고 시중을 들어주었다.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계속 물만 먹고, 그리고 식사 때마다 죽 5, 6 spoon만을 먹었다.
<5월 30일>
처음으로 침대에 3분가량 앉아있을 수 있었다. 빈혈로 진통으로 오래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6월 2일경>
고통스럽긴 했으나 혼자 힘으로 일어나 앉아 식사를 하다. 약간씩 돌아다니기 시작. ㅇㅇ 언니 ㅇㅇㅇ 언니와 헤어짐.
<6월 7일>
엄마와 큰오빠의 얼굴을 처음 보다. 눈물이 나올려고 했으나 꾹 눌러 참았다. 걱정을 하고 계실 어머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 집안을 꾸려나가고 계실까. 돈도 없을텐데….
<6월 8일경>
<지하 14년>이라는 기독교 서적을 읽었다. 소련군이 루마니아에 진주중, 한 신부의 기독교 탄압에 대한 처절한 투쟁기록. 혹독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교훈을 주었다. ‘끝까지 쓰러지지 않으리라. 자신을 지키리라. 진실을 고수하리라.’ 6월 11일 계엄사에서 나온 한 수사관으로부터 조서를 받다.(2번째) 약간 떨리긴 했으나 침착하게 잘 해냈다. 그러나 난 어쩔 수 엇이 비굴했나보다. 만약에 석방이 도어 밖에 나가게 되면 또 다시 데모를 하겠느냐는 질문에 ‘뻔한 말을 물어보느냐.’ 나는 이날 죽을 고비를 세 번씩나 넘겼다.
@ 주방에서 유탄을 맞았을 때 대동맥에 꽂힌 파편이 1㎝만 더들어갔더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옮겨질 때 흰색의 앰뷸런스와 국방색 앰뷸런스가 멈춰 섰을 때 국방색을 탔었더라면 난 죽었을 것이다. 후자의 앰뷸런스가 군용차로 오인, 시민군에 의해 피습되었기 때문이다.
@ PT실에서 605병실로 옮겨진 후 PT실에서 수술을 끝낸 후 흥분을 한 탓으로 공수부대원들에게 막 욕설(?)을 퍼부었었다. 그런데 이게 원인이 되어 내가 605병실로 옮겨진 후 한 공수부대 중사가 실탄을 장전하고 병실 안까지 들어 왔었단다. 세 사람(ㅇㅇㅇ 언니 ㅇㅇ 언니, 나)을 쏘아 죽여버리겠다고…. 다행히 병원장의 만류로 우리 셋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했다.
이 말은 어떤 군인환자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6월 20일>
첫 번째 후송이 있었다. 24사람 (여자 8명, 남자 16명가량) 조대병원으로... 여자라고는 꼬마 ㅇㅇㅇ(5살)와 나뿐이었다.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다. 마음이 좀 허하기는 했지만. 남의 걱정을 하느라 나 자신에 대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걸로 생각이 된다. 어쨌든 ‘곧 석방되겠지’…. 이날 밤 ㅇㅇ씨와 ㅇㅇ씨 그리고 ㅇㅇ씨가 무지무지하게 많이 아팠던 걸로 기억이 된다. 손발이.
침대를 직각으로 세워 등을 기대고 혼자 힘으로 죽을 먹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언니의 부축을 받아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었다.
<6월 24일>
전남계엄분소로 가서 세 번째 조서를 받다. 앞의 두 번 조서 상황과는 휠씬 달랐다. 살얼음이 이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수사관의 마음대로 꾸며지는 조서, 1/2정도 받구서 통합병원으로 돌아왔다. 불안한 마음….
<6월 25일>
통합병원으로 온다던 수사관이 오지 않았다. 빨리 해버렸으면 하는 마음들….
<6월 29일>
해리슨 솔즈베리의 <중공기행> 이라는 책을 읽다. 자세하긴 했으나 너무 복잡하였다. 특히 문화혁명후의 중공 사회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의문이 있었다. 해리슨 솔즈베리의 중공에 대한 선입관념이 어떤 것이었을까 전혀 배제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난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관적인 견해였을까, 낙관적인 견해였을까.’ 책의 내용을 보면 전자에 가깝다고 생각이 들던데….
<6월 30일>
밖에 내다보지도 않고 내 bed에만 누워서 <중공기행> 책을 계속 보다.
<7월 1일>
여태까지의 생활에 변화를 준 날이다. 오후 4시경 적십자 병원과 헌병대 두 패의 후송이 있었다. 나는 후자에 속해 있었다. 이 때 난 거의 체념상태에 있었으므로 별로 불안에 떨지는 않았다. ‘더 강해질 수 있겠다.’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과는 달리 석방을 위한 준비단계였다는게 밝혀졌다. 기쁘긴 했으나 남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몸을 저려왔다. 저녁 8시경 통합병원으로 돌아와 잠을 자다.
<7월 2일>
저녁 8시경 통합병원에서 광산경찰서로 옮겨졌다. 여기서 ㅇㅇ 언니 ㅇㅇㅇ 언니 그리고 ㅇㅇㅇ 언니를 보았다. 여태까지 버텨왔던 눈물이 ㅇㅇㅇ 언니를 보는 순간 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왔으나 순경의 제재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유치장이란 곳은 정말 있을 곳이 못되었다. 깡보리밥에 닥강 몇 조각 그리고 변소 냄새, 완전한 무자유 참을 수 없이 답답했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ㅇㅇ ㅇㅇ ㅇㅇ ㅇㅇ 엄마가 함께 면회를 온 적이 있었다.(6월 22일경) 오후 3, 4시경이었다고 기억이 된다. 울고 돌아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난 뭘 생각했던가. ‘진정 울어야 할 때 울어야 된다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 가슴이 메어왔지만 꿀컥 눈물을 삼켰다.
<7월 3일>
새벽 5시경 잠이 깨었다.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아침을 먹고 소지품을 챙겨 8시경 보병학교를 향해 유치장을 떠났다. 우리 방에서는 ㅇㅇㅇ 언니만 남기고 모두 석방이었다. 함께 나오지 못하는 게 가슴이 아팠다. 어제와 같이 중령(?)이라는 사람한테 강연을 들었다. 그리고 수사반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협박 공갈 비숫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는 demo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도 썼다. 배짱 같아서는 꼭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용기 없는 이, 그 이름 ㅇㅇㅇ로다. 석방 인원은 43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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