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왼쪽)이 26일 제주 서귀포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황교안 국무총리와 면담하기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서귀포/연합뉴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25일 ‘대선 출마 시사’ 발언을 두고 정치권과 언론의 논란이 뜨겁다. 임기가 아직 일곱달 남은 현직 유엔 사무총장의 ‘정치적 행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반 총장의 임기는 12월31일까지다.
유엔은 일찌감치 이런 상황의 적절성 여부를 판단할 근거 규정을 헌장과 총회 결의에 마련해뒀다. 유엔은 헌장 제1조에서 국제평화와 안전의 수호, 평등·자결 원칙 존중, 차별 없는 인권과 기본적 자유권 존중·장려 등의 ‘목적’을 이루는 데 “각국의 활동을 조화시키는 중심”을 자임하고 있다. 아울러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의 “수석행정직원”(97조)으로서 “국제공무원으로서의 지위를 손상할 우려가 있는 어떠한 행동도 삼간다”(100조)고 유엔 헌장에 명시돼 있다.
요컨대 유엔과 유엔 사무총장은 특정국의 이해에 휩쓸리지 않는 초국적·초당파적 처신을 해야 한다는 ‘자기 제한’ 규정이다. 유엔이 창설 직후인 1946년 1월24일 유엔 사무총장의 임기·보수 등과 관련해 만장일치로 채택한 결의 11(Ⅰ)호에서 “사무총장은 많은 (유엔 회원국) 정부의 기밀을 공유하는 절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사무총장이 보유한 이런 기밀 정보가 많은 정부를 당혹스럽게 할 수 있는 상황(his confidential information might be a source of embarrassment to other Members)을 고려해야 한다”며 “사무총장은 그러한 (정부) 직책(any governmental position)을 수락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한겨레> 5월24일치 4면 참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결의의 취지에 비춰, 이때 ‘정부직’이란 좁게는 임명직, 넓게는 선출직을 아우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반 총장은 25일 저녁 제주롯데호텔에서 진행된 관훈클럽 초청 간담회에서 ‘대선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출마할 생각은?’이라는 질문에, “내년 1월1일이면 한국 사람이 된다. 그때 가서 고민·결심하고 여러분께 조언을 구할 수도 있다”고 답했다. 반 총장은 듣는 이가 오해할까봐 걱정됐는지 “대통령을 한다 이런 것은 예전에 생각해본 일도 없다”고 단서를 달았다. “예전에”는 대통령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부연이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종합일간지는 예외 없이 26일치 1면에 이 문답을 근거로 ‘반기문, 대선 출마 강력 시사’라고 보도했다. 한 간담회 참석자는 “예상을 훨씬 웃도는 발언에 질문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놀랐을 정도”라고 평했다.
파장이 일파만파인데도, 26일 반 총장은 자신의 전날 발언이 ‘실언’이라고 물을 타거나 정면 부인하지 않았다. 반 총장은 26일 공로명·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과 주철기 전 외교안보수석, 임성남 외교부 1차관 등 전·현직 외교부 고위 관리들과 한 조찬 자리에서 언론 보도에 대해 “확대 해석”이라고 짧게 논평했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잘못된 해석’이라는 부인이 아니다. 단지 ‘과하다’는 것이다. 곱씹어봐야 할 반응이다.
하지만 반 총장의 25일 발언은, 유엔 헌장과 총회 결의 11(Ⅰ)호의 자기 제한 규정에 비춰볼 때, 최고위 국제공무원의 직분을 한참 벗어난 것이다. 외교부의 고위 관리는 26일 “당혹스럽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 관리는 “한국 외교가 길러낸 최고의 외교관이 망가질까봐 걱정스럽고, 외교부가 정쟁의 한복판으로 끌려들어갈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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