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사실상의 대선 행보에 돌입했다. 제주포럼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은 반 총장은 “내년 1월1일이면 한국 사람이 된다. 한국 시민으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는 그때 가서 고민, 결심할 것”이라며 대선 도전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제가 그런(대선 출마) 말을 안 했는데 자생적으로 이런 얘기가 나오는 것에 대해 자랑스럽고 고맙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국 정치의 분열상을 거론하며 “국가통합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선 구도가 ‘반기문 변수’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민은 묻고 있다. 반 총장에게 대통령 자격이 있는지. 물론 물을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다른 것이다. 우리는 유엔 사무총장이 퇴임하자마자 대선에 나서는 게 바람직한지부터 묻고자 한다. 유엔 사무총장은 국제외교의 사령탑이요, 세계 평화의 파수꾼이다.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은 필수적이다. 1946년 1월 제1차 유엔총회에서 ‘유엔 사무총장 지명에 관한 약정서’라는 결의안을 채택한 것도 그래서다. 약정서를 보면 회원국을 향해 “사무총장은 각국 정부 기밀을 취득하기 때문에 최소한 퇴임 직후에는 정부 직책을 제안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권고하고 있다. 사무총장 본인에게도 “수락을 삼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이 같은 유엔총회 결의에 법적 구속력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역대 총장 7명 중 오스트리아의 쿠르트 발트하임이 대통령을 역임했고, 페루의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도 대선에서 낙선한 뒤 후일 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대선에 나선 것은 퇴임한 지 4~5년이 지나서였다. 반 총장이 내년 12월 대선에 출마한다면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기록될 게 분명하다. 제주포럼에 참석한 해외 정치지도자들도 ‘한국 언론에서 (반 총장 대선 출마) 보도가 나오는데 진짜 나가는 거냐’고 물었다 한다. 반 총장이 ‘발언이 확대해석돼 곤혹스럽다’며 뒤늦게 해명에 나선 것도 국제사회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일 터이다.
2006년 유엔 사무총장 선거 당시로 돌아가 보자. 정부는 물론 민간까지 온 나라가 반기문 후보를 지원하는 데 총력전을 폈다. 반 후보의 당선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등 국익 제고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반 총장은 그러나 지난 9년여 동안 후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여기에다 대선 출마 여부를 둘러싼 논란까지 겹친다면 유종의 미를 거두기 쉽지 않을 것이다. 국가 이미지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금 반 총장에게 절실한 과제는 대선 캠페인이 아니라 7개월의 남은 임기 동안 뚜렷한 족적을 남기는 일이라고 본다.
반 총장의 전임자인 코피 아난은 모국 가나에서 유력한 대통령감으로 거론됐으나 출마하지 않고 비영리기구 코피 아난 재단을 설립했다. 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등 세계 원로들과 함께 ‘디 엘더스(The Elders)’를 만들어 민주주의, 평화, 인권 개선을 위해 꾸준히 활동해왔다. 지금 반 총장의 롤 모델이 돼야 할 인사는 아난이 아닐까 싶다. 빈곤·기아·부패·기후변화 등 시급한 글로벌 이슈가 얼마나 많은가. 한국이 낳은 최초의 유엔 사무총장이 퇴임 후 이 같은 이슈를 해결하는 데 앞장선다면, 지구촌 곳곳의 분쟁을 중재하는 데 헌신한다면 반 총장 개인으로나 국가적 위상 측면에서나 소망스러운 일이 되리라 믿는다.
물론 최종 선택은 ‘개인 반기문’의 몫이다. 대선에 출마하든 하지 않든 그가 자유의지로 결정할 일이다. 다만 평생을 외교관으로 살아오다, 선거를 앞두고 특정 세력에 의해 소환된 정치 무경험자가 한국의 복잡다단한 사회·경제적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만약 대선에 나서고자 한다면 능력과 자질, 가치관과 리더십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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