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시청문회법은 공무원들의 업무를 크게 위축시키고 소신 있는 공직 풍토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정부를 대표해 이석준 국무조정실장이 23일 긴급간담회를 열어서 한 말입니다. 최근 여야가 합의해 국회 본회의를 통과시킨 국회법 개정안, 일명 상시청문회법을 직격한 것입니다. 사실상 입법부의 입법을 행정부가 어깃장 들고 나선 셈이죠. 이 마당에 청와대와 정치권에선 박근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란 얘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도대체 상시청문회법이 뭐기에 이러는 걸까요? 정말 국정마비법일까요? 아니면 반대로 대통령마비법일까요?
김창길 기자
■상시청문회법이란?
지난 19일 19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를 통과한 이 법은 청문회 개최 조건을 완화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각종 현안이 터지면 국회 상임위원회 차원으로 청문회를 실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어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나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 등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에서 국회의 청문 절차가 요구되는 여론이 발생하면 언제라도 열 수 있는 식입니다. 취지는 이렇게 좋은 셈이죠.
하지만 청와대와 정부, 새누리당 일부는 두손을 내젓습니다. 왜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달라진 국회 환경 때문이라는 분석입니다.
지난 총선 결과 20대 국회에서는 과반 의석을 야당이 갖고 있습니다. 청문회가 줄줄이 열릴 공산이 커진 것이지요. 그러니 정부·여당으로선 좋아할 리 없겠죠. 더군다나 대부분 박근혜 정권 말기 정부의 책임 회피 등 미온적 대처 사안 등을 놓고 청문회가 열릴 가능성이 늘어가고 있다는 점은 이 법을 싫어할 만한 사유로 충분할 겁니다.
앞서 이 개정안은 여야 합의를 통해 지난해 7월20일 본회의에 부의된 상태였지만 국회의 행정부 통제력이 과도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새누리당이 부정적 입장을 내기도 했었습니다.
19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 새누리당 원유철 전원내대표와 조원진 의원이 이야기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어떻게 통과됐나?
그런데 이렇게 정부·여당이 싫어하는 법인데 어떻게 통과된 걸까요?
이유는 새누리당의 ‘웃픈’(우습고도 슬픈)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19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이 법에 반대해왔던 새누리당은 일부 소속 의원 및 탈당파 무소속 의원들이 찬성·기권을 했습니다. 결과는 ‘가결’. 스스로 반대했던 법을 스스로 찬성하고 기권한 것입니다.
서로 ‘반대하자’고 연락도 안했냐고요? 물론 했죠. 원유철 원내대표가 부랴부랴 “부결시켜라!”라는 문자메시지를 의원들에게 보냈지만, 메시지가 도착한 건 본회의 시작 후 1시간이 지난 뒤였다고 합니다.
총선 패배 이후 친박·비박으로 나뉘어 싸우는 통에 정신이 없긴 없었을 것이란 내부 분석까지 나왔습니다.
대통령 뵐 낯이 없었던 걸까요? 애꿎게도 새누리당에선 책임의 화살을 정의화 국회의장에게 돌리기도 했습니다. 김도읍 원내수석부대표는 당시 본회의 표결 뒤 기자들과 만나 “정의화 국회의장이 여야 합의를 무시하고 국회법 개정안을 독단적으로 안건 상정했다”며 “정 의장이 입장을 표명하고,사과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물론 정 의장은 곧바로 “국회의장이 로보트냐”고 맞받았죠.
■정말 국정이 마비될까?
자, 그러면 이쯤 해서 이런 궁금증이 나오겠죠.
‘정말 이 상시청문회법이 도입되면 국정이 마비되는 걸까….’
정부·여당 측은 예전 청문회 사례만 생각하는 듯 합니다. 정부 관계자들 수백명을 국회에 불러다 놓고 하루 종일 대기만 시키고, 자료 만들어서 내라는 국회의원들 요구에 365일 매달리다가 정작 민생은 못챙기면서 행정력을 낭비하고, 결국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없는 채 국회의원의 호통만 듣는 식으로 끝나는 것을 답습할 게 뻔하다는 논리입니다.
물론 그런 경우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통과된 법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번 상시청문회법은 ‘현안조사’를 위한 일반 청문회를 열 수 있는 정도를 추가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국정조사나 국정감사 때 부르는 청문회나 입법청문회 등과는 다른 것입니다. 상임위원회에서 중요한 현안이 나와서 정부의 입장이나 책임 추궁을 할 일이 있으면 그 얘기를 ‘들어보겠다’는 것입니다.
1년 365일 상시적으로 열릴 가능성도 실제론 커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상임위 과반이 요구해야 열리는데 더불어민주당·새누리당·국민의당 등 3당 체제에서 보면 어느 한 쪽이 요구한다고 해서 마구 열릴 청문회는 사실상 있을 수 없다는 분석이 중론입니다.
한 마디로 정부·여당의 우려는 ‘기우’이자 ‘엄살’이라고 볼 수 있다는 거죠.
여기서 재미있는 역사 하나. 새누리당의 경우 자신이 야당이던 시절엔 ‘더 강한 청문회 활성화법’을 냈었던 적도 있었다고 하네요.
2005년 7월 당시 한나라당 의원 44명은 “국회의 행정부 감시·감독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청문회 활성화가 필요하다”며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재적 의원 4분의 1 이상만의 요구로도 청문회가 열릴 수 있게 하는 내용도 담았습니다. 대단한 법이죠. 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강제 증언도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박 대통령의 손에 쥐어진 상시청문회법…결국 거부할까?
우리나라는 대통령의 권한이 아직까지도 막강한 나라이긴 합니다.
입법부가 아무리 법을 만들어도 대통령에게 ‘거부권’이라는 카드가 있으니까요. 컴퓨터로 말하면 ‘리셋’ 버튼 정도 되려나요? 뭐가 잘 안되거나 불리할 때 흔히들 누르시는 그 버튼 말이죠.
박 대통령이 거부권 선택은 일촉즉발인 상황까지 와있습니다.
곧 아프리카 순방도 떠나야 하는데다가 이 문제를 계속 질질 끌 경우 국정 동력도 상실하고 비판론만 눈덩이처럼 불어날 게 뻔하니까요.
지난해 비슷한 경우가 있긴 했었죠.
이른바 ‘유승민 쳐내기’ 사태, 기억하시나요? ‘1차 국회법 파동’으로 기록된 당시 사건은 지난해 5월 국회법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불거졌습니다.
대통령령·총리령·부령 등 행정입법이 법률 취지나 내용에 합치되지 않을 때 국회가 수정·변경을 요청하면 행정기관이 받아들이도록 한 내용이이었는데요. 당시 유승민 원내대표는 공무원연금법 시행령 개정 등 명목으로 야당과 국회법을 상정하기로 합의했고, 이 때부터 청와대에서 불편한 기류가 새어나왔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6월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이 “행정권을 지나치게 침해해 삼권분립에 위배된다”며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그러면서 국민과 지지층을 향해 “배신의 정치를 반드시 선거에서 심판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사실상 유승민 원내대표를 ‘배신자’로 공개 낙인찍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상시 청문회법이 그러면 ‘2차 국회법 파동’ 정도로 명명되겠군요.
그런데 이번엔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부글부글’한 속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청와대나 여당 측도 자칫 이번에 박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예상보다 타격이 클 것이라는 전망을 합니다.
정권이 말기를 향해 가고 있는데다가 야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 상태라 심각한 ‘레임덕’에 빠질 수 있다는 예상입니다.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법안이 다시 본회의에 올라가도 야권과 무소속, 여당 내 이탈표 등이 합쳐진다면 법안이 확정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차라리 법안을 일단 공포한 뒤 20대 국회에서 새로운 개정안을 통해 대응하겠다는 복안도 나오는 마당이라고 합니다.
청와대 관계자의 “지난해 6월과 사정이 다르다”고 하는 말은 이런 복잡한 속내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각 당 원내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협치”를 강조했던 박 대통령이 국회를 통과한 개정안을 거부할 경우 이미 엉클어진 대야관계는 회복불능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박 대통령의 고민은 깊어가는 듯 합니다. 청와대 측도 아직까지 “결정된 바 없다”고만 하고 있습니다.
결국 결론을 내야 하는 상황에서 국회법 개정안의 ‘운명’은 박 대통령이 아프리카 순방에서 귀국한 직후인 다음달 7일 국무회의에서 최종 결정날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박홍두 기자 ph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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