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진보적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는 얼마 전 '트럼프가 당선될 다섯 가지 이유'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했다. 트럼프에게 투표하려는 사람의 심정은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서서 저 폭포 속으로 뛰어들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 하는 사람의 심정과 같다고. 지금 그의 말은 예언이 되어 미국의 수많은 유권자들은 나이아가라 폭포 속으로 뛰어내렸다.
제45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하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었다. 올 초부터 클린턴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겨루던 샌더스는 자신이 본선 경쟁력은 더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건 사실이었다. 공화당 후보로 예상되는 트럼프를 상대로 한 본선 예측 조사에서 샌더스는 늘 10퍼센트를 한참 웃도는 압도적 우위를 보인 반면 클린턴은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어차피 민주당 유권자들은 클린턴을 후보로 선출하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민주주의 정당에서 당원들의 지지를 더 많이 받는 사람을 제쳐두고 아직 실현되지도 않은 본선 경쟁력을 들먹이며 엉뚱한 사람을 후보로 지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었다. 클린턴이 정말 민주당원들의 바닥 민심을 얻은 후보였는가 하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예비 선거 당시 샌더스가 뉴햄프셔 주를 비롯해 여러 주에서 예상을 뒤엎고 압승하며 돌풍을 일으킬 때였다. 당원들의 지지율만 보면 클린턴과 샌더스가 호각지세를 이루는 게 분명한데도 [AP], <폴리티코> 같은 매체는 클린턴이 확보한 대의원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보도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원들이 선출한 대의원 수는 막상막하인데, 예비 선거의 결과와 상관없이 지지하는 후보를 결정할 수 있는 '슈퍼 대의원'의 대다수는 클린턴을 지지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도대체 슈퍼 대의원이 무엇인가? 민주당 소속의 상하원 의원이나 선출직 공직자, 당 간부 등에게 자동으로 부여되는 일종의 특권직이다. 그들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최종 선출하는 전당 대회에서 앞서 말한 대로 당원들의 표심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에 표를 던질 수 있다. 그에 반해 다른 대의원들은 자기 소속 지역구의 예비 선거에서 당원들이 던진 표심에 따라 투표하도록 되어 있다.
얼핏 보기에도 민주주의의 원칙에 맞지 않는 것 같은 슈퍼 대의원 제도는 왜 생겼을까? 198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재선에 도전한 지미 카터 대통령이 본선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참패한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예비 선거에서 일반 당원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후보가 본선에서 맥을 못 추자, 정치적 경륜이 일천한 풀뿌리 당원들에게 후보 선출을 온전히 맡기기 어렵다는 견해들이 제출되었다.
그래서 일반 당원의 자유 투표를 보완하는 방법으로 경험과 판단력을 갖춘 고급 당원들에게 슈퍼 대의원의 권리를 주는 쪽으로 변화를 준 것이다. 사실 일반 당원의 예비 선거 중심으로 후보 선출이 이루어진 것도 10년 남짓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는 민주주의의 발전에 급브레이크를 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민주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당이 말이다.
만약 슈퍼 대의원 제도가 없었다면 올해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는 샌더스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을까?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지는 않다. 클린턴은 슈퍼 대의원을 빼고도 2219명의 대의원을 확보했고 샌더스는 1832명이었다. 그런데 클린턴은 전체 슈퍼 대의원 630명의 90퍼센트가 넘는 581명의 지지를 확보했다.
이처럼 클린턴이 슈퍼 대의원을 싹쓸이 하리라는 것은 이미 예비선거 초반부터 예상된 일이었다. 만약 두 사람의 경쟁이 처음부터 이렇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지지 않았다면 예비 선거 과정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민주사회주의자' 샌더스가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불러일으킨 반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민주당 주류의 생각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슈퍼 대의원들은 왜 그토록 클린턴을 압도적으로 지지했을까? 본선 경쟁력, 즉 당선 가능성을 놓고 보면 샌더스가 분명한 상대적 우위를 지니고 있었다. 슈퍼 대의원을 둔 이유가 민주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으니 그들은 당연히 샌더스를 지지해야 했던 것 아닐까? 샌더스가 본래 민주당원도 아니고 민주당 주류와 이념적으로도 다르기 때문에 거부감을 갖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정말 당을 위한다면 좀 더 확률 높은 후보에게 기대는 것이 분명 올바른 자세다.
샌더스에 대한 민주당 주류의 거부감을 전제하고 클린턴으로 기운 그들의 결정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론을 할 수 있다. 첫째는 클린턴으로 가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대통령 선거 전날까지의 여러 상황을 보면 그런 생각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몇몇 국면에서 클린턴이 역전당할 가능성도 적지 않게 엿보이곤 했었다.
반면 샌더스는 클린턴보다 트럼프 돌풍을 잠재울 요소를 더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다. 트럼프의 역전승은 기득권 정치에 대한 미국 민초들의 반란에 기인한 것이고, 이는 대선 레이스 초반부터 예상되는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민초의 불만에 기인한 바람으로 말하자면 트럼프의 돌풍 따위는 샌더스의 태풍 앞에서 한낱 돌개바람에도 끼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닳고 닳은' 민주당 주류 정치인들이 이런 자명한 사실을 몰랐을까?
둘째는 만에 하나 잘못되더라도 '꼴통' 보수라 할 수 있는 트럼프의 당선을 보는 게 낫지 '빨갱이' 샌더스의 당선은 죽어도 보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국 사회의 이념 구조로 볼 때 이쪽이 더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민주당 주류는 무소속이던 샌더스를 입당시켜 표의 분산을 막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샌더스의 후보 지명을 막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것은 당원과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치적 사기이고 자폭 행위이다.
결과론이지만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도널드 트럼프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또 이미 수많은 언론이 전한 평가들처럼 그녀가 당선된다 하더라도 미국이나 세계의 미래를 위해 그다지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트럼프에 비해 예상되는 정책의 변수가 적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긴 하겠지만, 월가와 끈적끈적하게 맺어진 미국 기득권 세력의 세상, 그 지긋지긋한 신자유주의 세상이 4년 더 연장되는 것 말고 무엇이 있었겠는가?
세계 현대사를 돌아보면 대체로 40년쯤마다 한번 큰 전환기가 왔다. 1930년대에 대공황의 후유증을 앓던 자본주의는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수정 자본주의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수정 자본주의는 1970년대에 커다란 위기를 맞더니 과도기를 거쳐 신자유주의로 대체되었다.
지금은 다시 40년이 지난 2010년대. 세계 곳곳에서 신자유주의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월가의 벗 클린턴이 집권한들 고장 난 오디오 기기의 음반처럼 계속 직직거리며 돌아가는 모습보다 더 나을 게 무엇이리오! 반면 샌더스였다면 바로 본격적인 변화를 시작하지는 못할지라도 긍정적인 변화의 신호탄만은 틀림없이 쏘아 올렸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거기서도 변화는 일어날 것이 분명하지만, 적어도 미국과 세계의 대다수 인구에게 긍정적인 변화는 아닐 것이다. 차라리 그가 일으키려는 변화에 대한 '반동'으로, 각성된 다수 대중에 의한 변혁이 시작되기를 바라는 게 나을 것이다. 샌더스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를 보면 그러한 기대가 절대 뜬구름 잡기가 아니라는 확신이 선다.
트럼프는 한국에도 위협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방위비 분담금 증액이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이니 하면서 정치권과 재계를 긴장시키는 요구들이 줄줄이 대기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시기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대한 도전을 앞두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국민의 이익이 무엇인지 조금도 생각할 줄 모르던 정권과 정치 세력이 퇴장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곧 이를 대체하게 될 국가 지도부는 제발 국민을 믿고 평화롭고 자주적인 한반도를 위해 슬기와 배짱을 발휘해 주기를 빌어 마지않는다.
제45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하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었다. 올 초부터 클린턴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겨루던 샌더스는 자신이 본선 경쟁력은 더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건 사실이었다. 공화당 후보로 예상되는 트럼프를 상대로 한 본선 예측 조사에서 샌더스는 늘 10퍼센트를 한참 웃도는 압도적 우위를 보인 반면 클린턴은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어차피 민주당 유권자들은 클린턴을 후보로 선출하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민주주의 정당에서 당원들의 지지를 더 많이 받는 사람을 제쳐두고 아직 실현되지도 않은 본선 경쟁력을 들먹이며 엉뚱한 사람을 후보로 지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었다. 클린턴이 정말 민주당원들의 바닥 민심을 얻은 후보였는가 하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예비 선거 당시 샌더스가 뉴햄프셔 주를 비롯해 여러 주에서 예상을 뒤엎고 압승하며 돌풍을 일으킬 때였다. 당원들의 지지율만 보면 클린턴과 샌더스가 호각지세를 이루는 게 분명한데도 [AP], <폴리티코> 같은 매체는 클린턴이 확보한 대의원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보도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원들이 선출한 대의원 수는 막상막하인데, 예비 선거의 결과와 상관없이 지지하는 후보를 결정할 수 있는 '슈퍼 대의원'의 대다수는 클린턴을 지지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도대체 슈퍼 대의원이 무엇인가? 민주당 소속의 상하원 의원이나 선출직 공직자, 당 간부 등에게 자동으로 부여되는 일종의 특권직이다. 그들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최종 선출하는 전당 대회에서 앞서 말한 대로 당원들의 표심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에 표를 던질 수 있다. 그에 반해 다른 대의원들은 자기 소속 지역구의 예비 선거에서 당원들이 던진 표심에 따라 투표하도록 되어 있다.
얼핏 보기에도 민주주의의 원칙에 맞지 않는 것 같은 슈퍼 대의원 제도는 왜 생겼을까? 1980년 대통령 선거 당시 재선에 도전한 지미 카터 대통령이 본선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참패한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예비 선거에서 일반 당원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후보가 본선에서 맥을 못 추자, 정치적 경륜이 일천한 풀뿌리 당원들에게 후보 선출을 온전히 맡기기 어렵다는 견해들이 제출되었다.
그래서 일반 당원의 자유 투표를 보완하는 방법으로 경험과 판단력을 갖춘 고급 당원들에게 슈퍼 대의원의 권리를 주는 쪽으로 변화를 준 것이다. 사실 일반 당원의 예비 선거 중심으로 후보 선출이 이루어진 것도 10년 남짓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는 민주주의의 발전에 급브레이크를 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민주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당이 말이다.
만약 슈퍼 대의원 제도가 없었다면 올해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는 샌더스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을까? 결과만 놓고 보면 그렇지는 않다. 클린턴은 슈퍼 대의원을 빼고도 2219명의 대의원을 확보했고 샌더스는 1832명이었다. 그런데 클린턴은 전체 슈퍼 대의원 630명의 90퍼센트가 넘는 581명의 지지를 확보했다.
이처럼 클린턴이 슈퍼 대의원을 싹쓸이 하리라는 것은 이미 예비선거 초반부터 예상된 일이었다. 만약 두 사람의 경쟁이 처음부터 이렇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지지 않았다면 예비 선거 과정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민주사회주의자' 샌더스가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불러일으킨 반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민주당 주류의 생각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슈퍼 대의원들은 왜 그토록 클린턴을 압도적으로 지지했을까? 본선 경쟁력, 즉 당선 가능성을 놓고 보면 샌더스가 분명한 상대적 우위를 지니고 있었다. 슈퍼 대의원을 둔 이유가 민주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으니 그들은 당연히 샌더스를 지지해야 했던 것 아닐까? 샌더스가 본래 민주당원도 아니고 민주당 주류와 이념적으로도 다르기 때문에 거부감을 갖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정말 당을 위한다면 좀 더 확률 높은 후보에게 기대는 것이 분명 올바른 자세다.
샌더스에 대한 민주당 주류의 거부감을 전제하고 클린턴으로 기운 그들의 결정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론을 할 수 있다. 첫째는 클린턴으로 가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대통령 선거 전날까지의 여러 상황을 보면 그런 생각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몇몇 국면에서 클린턴이 역전당할 가능성도 적지 않게 엿보이곤 했었다.
반면 샌더스는 클린턴보다 트럼프 돌풍을 잠재울 요소를 더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다. 트럼프의 역전승은 기득권 정치에 대한 미국 민초들의 반란에 기인한 것이고, 이는 대선 레이스 초반부터 예상되는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민초의 불만에 기인한 바람으로 말하자면 트럼프의 돌풍 따위는 샌더스의 태풍 앞에서 한낱 돌개바람에도 끼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닳고 닳은' 민주당 주류 정치인들이 이런 자명한 사실을 몰랐을까?
둘째는 만에 하나 잘못되더라도 '꼴통' 보수라 할 수 있는 트럼프의 당선을 보는 게 낫지 '빨갱이' 샌더스의 당선은 죽어도 보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국 사회의 이념 구조로 볼 때 이쪽이 더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민주당 주류는 무소속이던 샌더스를 입당시켜 표의 분산을 막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샌더스의 후보 지명을 막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것은 당원과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치적 사기이고 자폭 행위이다.
결과론이지만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도널드 트럼프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또 이미 수많은 언론이 전한 평가들처럼 그녀가 당선된다 하더라도 미국이나 세계의 미래를 위해 그다지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트럼프에 비해 예상되는 정책의 변수가 적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긴 하겠지만, 월가와 끈적끈적하게 맺어진 미국 기득권 세력의 세상, 그 지긋지긋한 신자유주의 세상이 4년 더 연장되는 것 말고 무엇이 있었겠는가?
세계 현대사를 돌아보면 대체로 40년쯤마다 한번 큰 전환기가 왔다. 1930년대에 대공황의 후유증을 앓던 자본주의는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수정 자본주의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수정 자본주의는 1970년대에 커다란 위기를 맞더니 과도기를 거쳐 신자유주의로 대체되었다.
지금은 다시 40년이 지난 2010년대. 세계 곳곳에서 신자유주의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월가의 벗 클린턴이 집권한들 고장 난 오디오 기기의 음반처럼 계속 직직거리며 돌아가는 모습보다 더 나을 게 무엇이리오! 반면 샌더스였다면 바로 본격적인 변화를 시작하지는 못할지라도 긍정적인 변화의 신호탄만은 틀림없이 쏘아 올렸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거기서도 변화는 일어날 것이 분명하지만, 적어도 미국과 세계의 대다수 인구에게 긍정적인 변화는 아닐 것이다. 차라리 그가 일으키려는 변화에 대한 '반동'으로, 각성된 다수 대중에 의한 변혁이 시작되기를 바라는 게 나을 것이다. 샌더스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를 보면 그러한 기대가 절대 뜬구름 잡기가 아니라는 확신이 선다.
트럼프는 한국에도 위협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방위비 분담금 증액이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이니 하면서 정치권과 재계를 긴장시키는 요구들이 줄줄이 대기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시기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중대한 도전을 앞두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국민의 이익이 무엇인지 조금도 생각할 줄 모르던 정권과 정치 세력이 퇴장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곧 이를 대체하게 될 국가 지도부는 제발 국민을 믿고 평화롭고 자주적인 한반도를 위해 슬기와 배짱을 발휘해 주기를 빌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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