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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June 27, 2016

[기타뉴스]참사 이후의 참사는 누구의 책임인가

참사 이후의 참사는 누구의 책임인가

17.
어리석고 추악하게도, 세월호 참사 이후 나는 내 아이들이 여전히 곁에 있음에 더 안도하고 감사하게 되었다. 늦은 밤, 쌔근쌔근 잠든 녀석들의 숨결을 느끼며 나는 미소 짓는다.
거울 앞에 선다. 괴물에게 묻는다. 너는 얼마나 초라하고 민망한 행복감에 젖어 있는가. 이웃의 비극이 네게 상대적이고 이기적인 안도감을 주었단 말인가. 웃음을 들키지 마라. 어떤 행복도 영원한 건 없으리.
부끄럽다. 나는 내 안에 피어오른 비열한 안심을 힐난한다. 지은 죄 없이(허나 이 참사 앞에 내가 무죄인가) 죄책감에 젖는다. 내가 세월호 진실과 책임규명, 안전사회를 위한 활동을 지지하고 연대해 온 이유가 있다면 그 죄책감 때문이리라. 이것이 나만의 경우일까.
그들이 사고를 냈다. 그들이 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유죄다.
허나 우리는 구했는가. 우리는 무죄인가.
2014년 5월, 경기도 안산. ⓒ노순택
16.
우리는 권력자들을 향해 외쳤다. “거짓을 멈춰라,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향해 다짐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의 문학은, 우리의 음악은, 우리의 몸짓은, 우리의 그림과 사진과 영화는, 우리를 둘러싼 그 모든 예술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달라져야만 한다!” 허나 그러했는가. 참사 이후 2년이 흐르고 있다.
지난 2년 나는 진도 팽목항에서, 안산 단원고와 합동분향소에서, 주인 잃은 아이들의 빈 방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청와대 주위에서, 청문회장에서, 심지어 세월호 선주 유병언의 의문스러운 주검이 발견된 순천 송치재의 숲속에서 세월호가 남긴 장면들을 모아왔다. 내가 사진으로 담은 것은 세월호 참사가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참사’였다.
2014년 5월, 서울 청계광장 ⓒ노순택
15.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죽은 시인 김남주의 낭독을 기이하게 방증이라도 하듯, 세월호는 세월호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곳곳에, 앞뒤를 가리지 않고 있었다. 이제야 실체의 일부가 드러나기 시작한 ‘안방의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이미 5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누구의 짓인가, 왜 벌어졌는가, 누가 범인을 감싸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우리는 안방에서 세월호 참사를, 진도 앞바다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해군기지 강행으로 몸살을 앓는 제주 강정마을에서도 세월호를 보았다. 76만5천 킬로볼트 초고압 송전탑 건설로 피눈물을 흘리던 밀양의 산골마을에도, 공장폐쇄에 항의하며 고공농성 중인 하이텍 알씨디 노동자들의 위태로운 망루에도, “해고는 살인”이라 외치며 목숨 건 굴뚝농성을 감행했던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농성장에도, 한겨울 길바닥에 온몸을 던진 기륭전자 해고노동자들의 오체투지 현장에도, 살뜰했던 마을공동체가 깡그리 박살난 부산 만덕동 철거지구에도, 노조파괴 공작 탓에 목숨 끊은 동료의 영정을 든 유성기업 노동자의 흰 상복에도 세월호는 있었다. 은유가 아니다. 목격이었다. 그곳들에서 나는 노란 리본을 보았다. 노란 깃발을 보았다. 죽은 아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항의와 추모의 징표들이었다. 허나 단지 그런 의미였을까. “우리의 고통도 세월호 참사와 다르지 않다”는 들리지 않는 호소와 절규가 아니었을까.
과장이라 비아냥댈 수 있을 것이다. 아전인수라거나 거짓이라 욕할 수 있을 것이다. 세월호 이용하는 짓거리를 멈추라고 삿대질 할 수 있을 것이며, 단순 교통사고를 정치적으로 변질시키지 말라고 점잖게 훈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의 동일시’는 수난자의 권리다. 오히려 의무일지 모른다.
2015년 8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장 앞 농성천막의 밤. 이곳은 안산도, 팽목항도 아니다. 고통의 연대는 수난자의 권리다. ⓒ노순택
2016년 5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장 담벼락 . ⓒ노순택
2016년 4월, 서울 가산동 하이텍 알씨디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장. ⓒ노순택
2016년 5월, 서울 혜화동. 목숨 끊은 동료의 상제가 된 유성기업 노동자의 상복과 손목에 세월호 징표가 있다. 이것은 참사를 향한 추모이자, ‘우리의 힘겨움도 세월호 참사와 다르지 않다’는 고통의 동일시다 ⓒ노순택
2016년 4월, 부산 만덕동 철거지구. 인간보다 이윤을 숭배하는 곳에 참사가 예고된다. 참사가 벌어진다. 참사가 은폐된다. ⓒ노순택
14.
2016년 3월 29일,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보름 앞두고 서울시청에서 열린 2차 청문회.
수의를 입은 세월호 선원이 증인석에 앉아 있다. 그 뒤로 “교정”이란 뜻의 영문자를 등에 새긴 호송관 두 명이 자리를 잡았다. 셋은 또래로 보였다. 누군가 특별히 잘났거나 대단히 못난 점도 없을 터였고, 지독한 악의로 무장했거나 지나친 선함을 품지도 않았을 터였다. 무엇이 이들을 서로 다른 자리에 앉게 했을까. 대체 무엇으로 이 상황을 ‘교정’할 수 있을까.
증인석에 앉았던 자들은 하나같이 “몰랐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를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들은 참사의 ‘1분과 1초’에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추궁당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사태의 최종 책임자가 7시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추궁하지 못했다. 증인들은 억울했을 것이다.
헌데도 말하지 않았다. 왜 벌어졌는지, 왜 구하지 않았는지, 누가 진짜 주범인지를.
ⓒ노순택
나는 어떠한가. 나는 말하기 위해 작업해 왔다. 말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으며, 말하기 위해 글을 끼적여 왔다. 두서없이 이어지는 단편들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수첩 속의 일기다.

13.
현기증
2016년 1월 4일, ‘우리들’은 양화대교 북단에서 만났다. 짐과 사람을 가득 구겨 넣은 승합차로 6시간을 달렸다. 만날 필요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 참사가 아니었다면. 진도는 귀에 익어도 ‘팽목항’은 처음 들어본 사람이 나 뿐이었을까. 하지만 이제는 귀에 못이 박인 그곳을 향해 우리는 달렸다.
아들 잃은 아비가 그 길을 가장 잘 알았다. ‘그날’ 이후 삶이 바뀌어버린 기록활동가들이 운전대를 잡았다. 나와 친구들은 알량한 사진기술을 가진 까닭에 그 자리에 호출되었다. 세월호에서 흘러나온 뒤 2년이 다 되어가도록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컨테이너에 방치된 유류품을 촬영하는 것이, 그리하여 하나라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였다.
2백여 개의 종이상자와 가방 속에 2천여 점의 한 서린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어떤 물건은 새 것인 듯 멀쩡했다. 대개는 찢기고 바스라지고 너널댔다. 아장아장 간신히 발을 떼었을 아기의 장난감이 있었다. 삶의 파란만장을 향해 뚜벅뚜벅 걷던 이팔청춘들의 옷가지, 신발, 화장품, 액세서리들이 있었다. 고단함을 달랠 벗이었을까, 어떤 가방엔 소주가 네댓 병 들어있었다. 종이딱지는 바닷물에 짓물러져 사라지고 초록색 병만이 남아 있었다. 어떤 상자엔 구조작업(이라 말할 수 있을까,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한 헛발질을, 석연찮은 일들로 점철된 그날의 작태들을) 당시 사용했던 조명탄이 들어있었다. 검은 색 서류가방에선 어느 세월호 선원의 이력서, 자격증, 사직서 따위가 나왔다. 침몰해 가는 배에서 자기들끼리 탈출한 뒤 젖은 돈을 말렸다던 그 자였다.
진도군청 지하 종합상황실에 차려진 볼품없는 20여개의 스튜디오에서 온종일 찰칵 소리가 울려댔다. 주인 잃어 방치되었지만 어떤 이에겐 하나라도 ‘건지고 싶은’ 유품일 것이었다. 살았더라면, 굳이 되찾지 않아도 상관없었으리라. 촬영되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가, 컨테이너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줄 선 여행가방들의 모습은 이제 막 여행이 시작될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인천연안부두에서 배가 출발하던 그날도 이랬을까. 이렇게 길어질 줄 아무도 몰랐던 여행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 잔인하게 이어지고 있다.
한 서린 물건들을 찍었다지만, 아무도 그 한을 사진에 담지는 못했다. 감광재는 한에 반응하지 않는다.
ⓒ노순택
12.
세상에서 가장 딱 맞는 신발
강정마을이라는 오래된 공동체와 해안습지대를 파괴하며 강행되고 있는 해군기지에 반대해 사람들은 걸었다. 제주시청에서 시작해 강정까지 일주일을 걸었다. 누군가는 주민이었고, 누군가는 지킴이었으며, 누군가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누군가는 늙었고, 누군가는 어렸다. 누군가들은 동쪽 길을, 누군가들은 서쪽 길을 택했다. 누군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누군가는 하루 이틀을 걸었다. 누군가는 행진단의 안전을 위해 쉼 없이 뛰어다녔고, 누군가는 불편한 몸이지만 휠체어에 앉아서라도 함께 하고자 했다. 휠체어에 앉아 견디는 불볕과 휠체어를 밀며 견디는 불볕은 같은 것이었다. 함께 하는 고생에서 더한 고생과 덜한 고생의 구분은 애처롭다.
닷새째 되던 날은 37도를 오르내리는 기록적인 폭염이었다. 연신 땀을 훔치는 한 ‘엄마’를 만났다. 걸음이 불편해보였다. 낯익다 싶었는데, 모자에 달린 이름표를 보고 알았다. ‘2학년 4반 오준영’, 세월호에서 숨진 단원고 학생의 엄마였다. 나는 준영이의 빈 방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엄마는 금방 나를 알아봤다.
“어제 내려왔어요. 제주에서 아이들의 빈 방 전시가 열리고 있잖아요. 거길 들렀다 왔어요. 우사를 개조한 공간이더군요. 그 말을 듣고 엄마들과 한참 울었어요. 우리 애들이 소띠잖아요. 울지 말자 다짐했는데도 그런 순간에 나를 잃어요. 이 신발, 우리 준영이 거예요. 제주에 내려오다 그 사고를 당했으니 엄마가 대신 걸어주려고요. 준영이 발이 270미리인데, 제 발은 235미리거든요. 너무 커서 붕대로 친친 발을 감쌌더니 딱 맞네요.”
준영이가 죽어 올라오던 날, 엄마는 한 달음에 뛰어가다 빗속에서 발을 접질렸다. 인대를 크게 다쳤다. 수술해야 하는데도 그럴 수 없었다. 왜냐고 묻는가.
“남겨둔 사진이 많질 않아요. 준영이 방에서 찍은 사진들 전시장에서 봤는데 한 장 한 장이 소중했어요. 제가 가질 수 있을까요. 아이들 위해 애써주셨는데, 이런 부탁까지 해도 될지.”
엄마는 미안해하며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임영애, 라고만 입력하면 잊어버릴 것 같아 ‘오준영세월호엄마’를 덧붙였다. 그게 미안해서, 나는 또 숨어야 했다.
2015년 7월 31일, 강정마을로 향하는 평화행진단 속에서 단원고 2학년 4반 오준영 학생의 엄마 임영애 씨를 만났다. 인대를 다쳐 발을 절고 있었다. “우리 준영이가 걷고자 했던 제주 길을 대신 걸어주려고” 그녀는 준영이의 신발을 신고 있었다. 발에 신발을 맞춘 게 아니라, 신발에 발을 맞추기 위해 붕대를 감쌌다. ⓒ노순택
2015년 4월 27일, 주인을 잃어버린 오준영 학생의 빈 방. ⓒ노순택
11.
가뭄
세차게 눈발이 날린다. 내겐 그렇게 보였다. 아니 폭포였다. 어두운 밤, 깊은 산골 저 높은 벼랑에서 가늘고 세차게 떨어지는 한 줄기 폭포. 내겐 그렇게 보였다. 눈물이었는지 모른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 측은하게 흘렸으나, 이로써 할 도리를 다 했으니 더 이상 내게 도전한다면 누구든 용서치 않겠노라는 유신공주의 눈물세례. 내겐 그렇게 보였다.
눈앞이 흐려졌다 또렷해졌다를 반복했다. 눈 속으로 파고든 눈발은/폭포수는/증오의 눈물은 눈을 뜰 수 없게 했다. 눈만이 아니었다. 몇 차례 뒤집어쓰고 나니 온몸에 한기가 스몄다. 기이하게도 다시 온몸이 뜨거워졌다. 상상해 보라. 당신은 지금 추운 봄 밤의 거리에 서 있다. 누군가 냉기어린 물파스 수백 바가지를 끼얹는다. 밤새 끼얹는다. 당신은 눈을 뜨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뜰 수 있는가. 당신은 견딜 수 없는 추위에 벌벌 떨 것이다. 동시에 화끈거림으로 신음할 것이다.
지난 봄이 그랬다. 차가운 진도 앞 바다에 영문도 모른 채 가라앉은 이들이 있었다. 304명이었다. 구할 수 있었다. 구하지 않았다. 단원고 아이들만 250명이었다. “유가족의 가슴에 맺힌 한이 풀릴 때까지” 구조와 인양과 진실규명에 최선을 다하겠다던 대통령의 약속은 거짓이었다. 1년을 참았다. 참을 수 없는 기다림이었다. “언제든 찾아오라”던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은 경찰과 차벽으로, 방패와 몽둥이로 가로막혔다. 그들을 밀자, 물대포가 퍼부어졌다. 발사였다, 조준사격이었다. 맹독성 캡사이신을 기준 없이 퍼 넣은 화학무기였다. 봄 밤, 그 하루에 4만 리터의 물이 난사됐다. 누군가 그것에 맞아 죽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밤이었다. (거침없던 그것은 지난 가을 늙은 농부를 향해서도 발사되었고, 백남기 농민은 반년 째 사경을 헤매고 있다.)
아이들이 물에 가라앉았다. 어미 아비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국가는 이들에게 물포를 쏘았다. 홍수라 불러야 하는가. 가뭄이었다. 42년만의 지독한 가뭄이었다. 공주님이 소방호스로 마른 논에 물을 발사하는 쇼가 뉴스를 장식했다. 하늘과 땅만이 아니었다. 물로 흥건했던 진도와 안산과 서울의 길 위에서 내가 본 건 악독한 가뭄, 정치의 가뭄이었다.
2015년 5월 1일 밤, 차가운 바닷물 속에 아이들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는 유가족에게 발사된 물대포. 홍수가 아니었다. 가뭄이었다. 악독한 정치의 가뭄이었다. ⓒ노순택
ⓒ노순택
10.
내가 아는 어떤 영화
가끔은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이 영화의 한 장면보다 더 영화 같다고 느낀다. 그런 장면은 마치 불도장으로 찍은 듯 오래도록 기억의 한 자리를 지킨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불현듯 떠오르기를 반복한다. 영화광이 아니오, 나쁜 영화를 골라 본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나쁜 장면’들은 내게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될까. 특정 영화를 떠올리지 않았다. ‘이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아’라고 생각했던 대개의 시간은 ‘차라리 영화이기를’ 바랐던 시간이었다.
‘영화’와 ‘비현실’이 이음동의어가 아닌데도 내게 ‘영화 같은 장면’들은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펼쳐지는 순간들이었다. 비현실과 현실이 멱살을 잡고 몰상식이 상식을 부수는 순간들이었다. 나는 영화를 말하지만, 장면의 당사자에겐 ‘차라리 꿈이기를’ 바랐을 악몽의 삽시간이었으리라.
멀리는 주한미군 케네스 마클에게 온몸 난자당한 윤금이 씨의 주검을 대자보에서 멍하게 바라볼 때 그랬다.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씨의 주검을 탈취하기 위해 장례식장 벽을 부수고 날아든 백골단의 모습을 신문에서 펼쳐들었을 때도 그랬다. 굉음을 내지르며 마을 위를 낮게 날아 농섬에 기총소사와 폭격을 퍼붓던 매향리에서, 교복 입은 채 두 소녀의 영정을 말없이 들고 있던 어느 여학생을 만난 종로 한복판에서, 용산 남일당 화염 앞에서도 나는 영화의 한 장면을 느꼈다.
무엇보다 대추리. 군경과 용역깡패가 총동원된 행정대집행의 어두운 새벽, 내가 꾸렸던 마을사진관에서 진행된 긴급기자회견을 잊기 힘들다. 뜬눈으로 지새운 밤의 끝자락이었다. 인권운동가 박래군이 거기 서 있었다. 그 자리는 우리사회가 맞닥뜨린 인권의 최전선이었다. 문학을 꿈꾸던 형이 문학을 꿈꾸던 동생을 군사독재에 잃고, 주저 없이 서 왔던 자리였다. 그가 지금 감옥에 갇혔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따져 물었다는 죄목으로.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행사를 위해 옛사진을 뒤적이다가 나는 9년 전의 이 장면에서 잠시 멈췄다. 내가 느꼈던 어떤 영화들을 헤아리며, 그 영화들 속에 당사자의 심정으로 뛰어들었을 그를 생각한다. 이런 영화는 중단되어야 한다.

2006년 5월 4일 평택 대추리. 군경과 용역깡패가 동원된 행정대집행의 새벽, 인권운동가 박래군이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오랜 시간 그는 우리사회 신음하는 인권의 최전선에 서 왔다. 그 또한 유가족이었다. 세월호의 참사 앞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머리 뒤 벽에 붙은 ‘한 송이 평화’. 글로는 씌어졌으나, 꽃으로는 피지 않았다. ⓒ노순택
9.
차에서 운 적이 있다
언젠가 길가에 차를 잠시 세우고 운 적이 있다. 딱 두 번. 9년 전 그리고 지난 겨울. ‘언젠가’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날짜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홀로 운전할 때면 음악을 크게 튼다.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면 다이얼이 오른쪽으로 더 돌아간다. 지난 겨울, 안산에 내려가는 길이었다. 안산은 내게 아무 인연 없는 도시였다. 그러나 이제 그곳은 가슴을 짓누른다.
나와 친구들은 단원고 아이들의 빈 방을 기록하는 일을 지난 겨울부터 맡아왔다. ‘빈 방’이라지만, 여전히 주인의 이름으로 불리는 방이었다. 고로 우리는 주인 없는 방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허나 방주인의 허락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못했다. 돌아올 수 없었다. 그들이 왜 돌아오지 못했는지 알려주었더라면, 책임져야 할 자가 책임지는 순리가 작동했더라면, 죽은 아이들을 두 번 죽이는 파렴치한 망각의 강요가 없었더라면, 아이들의 부모는 우리를 빈 방으로 부르지 않았으리라.
빈 방에 홀로 앉는다. 바다에 잠긴 아이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르며 방에 잠긴다. 아이의 얼굴을 본다. 남기고간 물건들을 살핀다. 삼각대를 편다. 셔터를 누른다. 찍어달라 부탁하는 각별한 물건이 있을 땐 더 공을 들인다. 그러나 이 방이, 이 물건들이 사진으로 남는다 한들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부질없는 짓이다. 무례한 짓이다. 사진이 요청된 그 자리에서 나는 사진의 무용함을 느끼곤 했다.
아이들이 살았더라면 하찮았을 물건들이 주인을 잃고나니 하나 하나 귀하다. 수백번의 셔터를 누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선 나를 꾸욱 누른다. 볼륨을 올린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운 건 노래 탓이었다. 아는 노래였는데, 다르게 들렸다. 아이 잃은 엄마가 내게 들려준 말들이 노래에 실려 있었다. ‘눈을 뜨면’이 끝나고 다른 노래가 흘러나오는데도 자동차는 달리지 않았다.

ⓒ노순택
8.
돌아오렴, 금요일이 아니더라도
하루에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며 엿새를 울고 하루를 쉰다면, 꼬박 1년이 걸린다. 304라는 숫자는 그렇게 날마다 1년을 울어야 겨우 채울 수 있다. 죄책감에 목숨을 끊은 교감선생님과 구조작업 중에 생을 다한 잠수사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한 해를 돌아 다시 4월이 오고 있다. 304명의 삶을 하루 만에 앗아간 16일이 오고 있다.
어느 날, 이름을 밝히지는 말아달라는 어떤 이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창문 너머 운동장에 파란 전세버스 10대가 도열해 있는 봄날의 사진이었다. 하늘색 셔츠에 넥타이를 맨 기사들이 승객들을 기다리며 잡담을 나누고 있다. 4월 15일 단원고에서 찍은 것이었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딘가 숨어있던 수많은 생각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머리를 어지럽혔다. 부질없는 생각들이었다. 가당치도 않은 망상들이었다. 불가능한 가정이기에 더욱 미련을 떨치기 힘들었다.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며칠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니 책 한 권이 배달되어 있었다. 책이라는 걸 알고 식구들이 먼저 뜯어본 뒤였다. 중3 딸아이가 그 책을 읽고 있었다. 어렵지 않으냐고 물으니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어려울리 없는 책이었다. 읽는 도중 뭔가를 묻곤 했고, 잠시 대화가 오고 갔다. 명절에 아이와 함께 팽목항에 다녀왔다. 책은 내게 돌아왔고, 나는 이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몇 주째 들고만 다녔다. 잠들 때면 늘 머리맡에 두었다. 이제야 겨우 펼치기로 한다. 십 수 번 읽은 뒷표지 문장을 다시 읽으며 안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3박 4일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금요일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배에 갇힌 일반인 승객들과 더불어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 책은 남겨진 가족들이 가닿을 수 없는 수백 개의 금요일에 관한 기록이다.”
아이 잃은 부모들이 되뇌는 숱한 ‘만약에’가 책 안에 있다. 만약에 우리가 세월호를 잊는다면…만약에.

2014년 4월 15일, 안산 단원고등학교 운동장. 10대의 버스가 운동장에 도열해 있다. 이 버스를 타고 인천 연안부두를 통해 제주도로 가려 했던 아이들은 금요일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허나 돌아오지 못했다. 김서린 제공사진.
7.
누가 닭의 눈을 보았는가
유가족 가슴에 한이 쌓이지 않도록 하겠다던 대통령의 말은 그 순간 진심이었을지 모르나 빈말이었다. 그냥 빈말이 아니라 자식 잃은 부모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빈말이었다. “언제든 찾아오라”던, “언제든 만나겠다”던 대통령이었다. 팽목항을 찾아와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며 “만약 안 지켜지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옷을 벗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던 대통령이었다. 그의 한 마디에 세상이 뒤집히는 사회에서 그가 직접 세상에 공표한 약속을, 수십 대의 카메라 앞에서 다짐한 약속을 어찌 믿고 기대지 않을 텐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이들에게 동아줄을 내민 대통령이었다.
가족들은 믿었다. 믿고 싶었다. 아니라면 미칠 것이므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깊은 바다에 갇힌 아이들을 살려줄 거라 믿었고, 주검을 돌려받은 뒤로는 이 죽음의 원인과 책임을 밝혀줄 거라 믿었다. 가족 잃은 아픔을 겪은 분이기에 가족 잃은 이들의 심장을 어루만져줄 거라 믿었다.
묻자. 어떤 약속이 지켜졌는가. 아울러 묻자. 누가 옷을 벗었는가.
빈말로 끝이었다. 아니 끝이 아니었다. 약속 지키지 않는 거짓에 멈추지 않고, 약속을 모욕하고 공격하는 괴물로 돌변했다. 입에 담기조차 두려운 언어들이, 치욕과 공포의 만행들이 자식 잃어 슬피 우는 부모들을 포위했다. 곡기 끊고 신음하는 아비 앞에 달콤한 ‘자유시간’을 뿌리고, 피자와 튀긴 닭을 뜯어먹은 악마가 누구였던가. 닭이라 불리는 이의 병아리들이었다.
카메라 한 대가 고개를 틀고 있다. 차로를 봐야 할 눈이 어디를 향하는가.
삶의 의미를 잃은 이들이 길바닥에 누워 있었다. “언제든 찾아오라”던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을 만나려다 가로막혀 그 자리에서 밤을 지새운 지 여러 날이었다. 카메라는 유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청와대로 전송했다. 그녀가 보았을까. 카메라를 거쳐, 십상시의 눈을 거쳐, 대통령은 유가족을 보았다. 외면조차도 어떤 의미의 응시다. 그러니 만난 셈이었다. 약속을 지켰다 말하고 싶은가.
2014년 9월, 청와대 인근 세월호 유가족 천막농성장. 교통상황을 주시해야 할 폐쇄회로 카메라가 유가족을 향해 틀어져 있다. 유가족의 동향은 청와대 경호실로 중계되었다. ⓒ노순택
6.
카메라도 우산도 네 것이 아니라니
이 남자는 세월호 특별법 촉구집회가 열리던 비 내리는 여름밤, 노란 우산을 쓰고 나타났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허나 인사를 나누지 않는 사이였다. 그가 출몰해 온 시공간, 그의 어깨에 걸쳐진 검고 무거운 카메라를 보자. 영락없는 사진기자다. 그가 누벼 온 행렬, 그의 손에 쥐어진 노란 우산을 보자. 세월호에서 아이들을 잃은 유가족의 편에서 이 참혹한 현재를 역사로 남기려는 기록자임에 틀림없지 않은가. 누가 보더라도 그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남자는 경찰이다.
그의 장비는 현장을 취재 보도하는 사진기자들의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흉내 내고 있다. 손에 든 것은 세월호 유가족과 자원봉사자들이 땡볕과 장대비를 피하려고 쓰기 시작했던 노란 우산과 같다. 유가족과 시민들은 가라앉은 배에서 아이들이 구조되기를 기다릴 때도, 그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고자 할 때도 노란색을 써 왔다. 노란색은 그가 숨기에 알맞다.
무엇을 하려는가. 그는 찍으려 한다. 왜 정체를 감추는가. 그는 잘 찍으려 한다. 기자 흉내도, 세월호 유가족 편처럼 보이려는 속임수도 모두 사진을 잘 찍으려는 몸부림이다. 그에게 ‘잘 찍은 사진’이란 무엇일까. 범법행위의 순간과 범법자의 얼굴을 포착, 체포에 결정타를 날리는 사진이다. 그에겐 광장에 집결한 모든 시민이 잠재적 범인이며, 정치적 의사표현은 잠재적 범죄행위다. 시민행동의 한복판에서 그는 성실하게 셔터를 눌러왔다.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애써 누르며.
성과가 좋지 않았다면 오래 가지 못했으리라. 그는 격려 받는다. 경찰청이 지난 몇 년간 채증장비 구입에 십수억원을 쏟아 부은 데엔 그의 활약도 있었을 터. 그는 보람에 겨워 전율했을지 모른다.
허나 비 내리는 여름밤, 경찰차벽 뒤에 숨어 잠시 쉬는 모습은 어딘지 측은했다. 어깨에 맨 카메라도, 노란 우산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경찰이지만, 경찰이 해선 안 될 짓에 아닌 짓에 그가 매달려 있다.
2014년 7월, 서울 세종로. 노란 우산으로 위장한 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촉구집회를 채증하던 사복경찰. ⓒ노순택
5.
그대 손가락에 망치
봄날. 죽은 아이의 얼굴을 품에 안은 부모들이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며 길바닥에서 밤을 지새웠다. 봄이라지만 몸서리치게 춥고도 긴, 겨울밤이었다. 대책 없이 아이들을 잃은 엄마 아빠들의 대책 없는 밤샘농성. 얇은 담요 한 장이 절실했으나, 차가운 바다에서 숨 끊긴 아이들을 떠올리면 그 조차 사치였으리라. 추위와 분노와 서러움에 치를 떨던 작은 존재들, 사진기를 들이댈 수조차 없던 그날의 무거운 공기를 쉬 잊을 수 있을까. 경찰은 완강했다. 싸울 기력조차 없는 이들을 두 겹 세 겹으로 에워쌌다. 그들은 유가족으로부터 청와대를 보호하는 충성의 벽이자, 시민과 유가족을 차단하는 고립의 벽이었다. 고착!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라는 모욕의 진압술은, “가만히 있으라”는 세월호 선장의 명령과 다를 게 없었다. 무능한 자들이 잔인할 때, 비명은 들리지도 않는다.
여름. 유가족들은 진도에서, 안산에서, 국회의사당에서, 광화문광장에서 아스팔트의 열기를 견디며, 울며, 굶으며 호소했다. 오직 진실을 알고 싶다고. 그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어찌하여 국가는 배 안의 아이들을 한 명도 구하지 못했냐고, 그것이 누구의 책임이며 이제 다시 그런 비극을 겪지 않으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냐고.
여름이 가고 있다, 가을이 오고 있다. 잔인하고 무능한 봄날의 풍경에서 우리는 몇 걸음 나아갔을까. 주범 유병언이 죽었고, 무능한 해경이 해체될 예정이며, 선원들이 엄벌에 처해지고 있으니 엄청난 전진인가. 헌데도 여전히 ‘진실’에 목매는 유가족들은 보상금과 특례입학과 의사자 지정이라는 흑심의 대마왕이란 말인가. 알 수 없다. 어찌하여 이 사회에선 죽임을 당한 이들이 죄인인가. 자식을 가슴에 묻은 이들을 조롱하고 음해하는 더러운 금배지에게 저주를, 배지를 달아준 우리 손가락에 망치를!
2014년 5월, 청와대 앞 네거리. 단원고 학부모들은 어버이날 서울로 올라와 노숙농성을 시작했다. 언제라도 찾아오라던 대통령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진압경찰이 달려와 아이 잃은 부모들을 포위했다.ⓒ노순택
4.
지상에서 가장 슬픈 게임 하나
2학년 3반, 주은이 시연이 소연이 담비 초원이 도언이 빛나라 수경이 영은이 지인이 영란이 예슬이 지우 지윤이 채연이 지숙이 승희 혜원이 주이 예진이 은지 윤민이 지현이 수희 영수 예은이가 2학년 6반, 승태 동협이 태민이 동영이 순범이 민규 승혁이 승환이 새도 현철이 영인이 재능이 호성이 다운이 영만이 태민이 원석이 종영이 민우 덕하 현탁이 장환이 시현이 건계 우진이와 2학년 9반, 하영이 민정이 초예 혜선이 향매 보미 수진이 민경이 아라 해화 예지 경미 한솔이 세희 다빈이 은정이 진아 다인이 윤희 다혜와 더불어 369게임을 한다. 최혜정 선생님과 남윤철 선생님도 함께. 엄마 품을 떠나 엄마 등에서. 안산 단원고를 떠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앞에서. 태민이를 부를 때는 앞에 성을 붙인다. 구태민인지 이태민인지 헷갈리니까.
“얘들아, 엄마들은 어떻게든 기운을 차리기로 했어. 너희들 보고 싶어서라도 주저앉지 않기로 했어. 이런 아픔 또 다른 엄마 아빠들에게 나눠줄 수 없잖아. 아무 것도 필요 없어. 다시는, 결코 다시는 이런 일 벌어지지 않게끔 한다는 약속만이 필요해. 4월 16일 너희들에게 어찌하여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줄 진실만이 필요해. 너희들은 엄마 등에 업혀 369게임을 하렴, 너희들 재잘대는 소리에 엄마는 힘이 나니까.”
빛나라 엄마가 경미 엄마에게 농담을 건넨다. 당신을 향해 달려드는, 두렵기만 했던 카메라를 향해 우리 아이들 예쁘게 찍어달라며 허리를 편다.
지금 서울 광화문 네거리와 국회의사당 차가운 돌바닥에서 엄마 아빠들이 굶고 있다. 밤을 지새우고 있다. 아이들 이름을 등에 쓴 채. 세월호 이후 뼛속까지 바꾸겠다던 선거구호가 아직 귓가에 맴도는 이 나라에서. 설마 왜냐고 묻는가.
2014년 7월 12일, 여의도 1번지 국회의사당 앞. 아이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힌 ‘반티’를 입은 엄마들이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여러 달 의사당의 돌바닥 위에서 먹고 자며 국정조사와 특별법을 요구했지만, 19대 국회는 무능했다.
ⓒ노순택
3.
푸르고 푸르다
2014년 5월 9일, 엎어지면 코 닿을 법한 어느 건물 옥상에서 나는 사진기를 들었다. 푸른 기와집이 선명했다. 가슴 속에 오직 국가에 대한 사랑만을 품고 있다는 공주님의 집이었다. 푸른 나무들에 둘러싸인 푸른 지붕은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처럼 보였다. 어리석은 백성들의 바다에서 고뇌에 찬 결단으로 대한민국호를 이끌고 나가는 고독한 선장의 역할은 공주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일이었다. 선왕에게 배운 게 많다고 했다. 그럴 것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우성이었다. 아줌마 아저씨들이었다. 가슴에 ‘국가에 대한 사랑’은 없고, ‘자식에 대한 사랑’만을 품고 있었다. 죽은 아이들의 영정사진이었다. 사진 속 얼굴과 사진 밖 얼굴이 너무 닮아 “이것은 내 어린 시절의 모습입니다”라고 말해도 하나 이상할 게 없을 것이었다. 단원고 학생 전원이 구조되었다, 는 국가재난 주관방송사 KBS의 발빠른 보도에 얼마나 안도했던가. 허나 그 오보가 배에 갇힌 아이들을 구할 기회를 놓치게 했다. 이어지는 거짓보도를 참을 수 없어 부모들은 아이들의 영정을 품고 방송국으로 향했다. 어버이 날이었지만, 아이들이 사라진 그런 날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해명도 사과도 듣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경찰에 가로막혀 모욕을 당했다.
여의도에서 밤길을 걸어 청와대 앞에 닿으니 새벽 3시였다. “언제든 찾아오라”던 대한민국호의 선장은 문을 걸어 잠갔다. 진압경찰들이 달려와 부모들을 에워싸고 이른바 ‘고착’에 들어갔다.
선홍빛 따스했던 얼굴들이 파아란 시신이 되어 올라왔는데, 푸르렀던 내일들이 잿빛 오늘이 되어 가라앉았는데 책임지는 자가 없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는 자도 없었다. 흐느끼는 부모들을 포위한 고착작전은 아직도 해제되지 않았다.
차가운 바다에 뒤집힌 세월호의 밑바닥은 푸른색이었다. 푸른 기와집을 뒤집어보니, 영락없이 한 색이었다. 푸르고 또 푸르다. 한 선장은 갇혔는데, 한 선장은 왜 여전한가.
2014년 5월 9일, 푸른 숲 속의 푸른 기와집은 고요했다. 기이하게도 뒤집힌 세월호의 밑바닥도 저런 푸른색이었다. 사진을 뒤집어 보니 닮게 보였다. 세월호가 뒤집힌 건, 뒤집힌 정치 탓이었던가. ⓒ노순택
ⓒ노순택
2.
카메라를 든 쓰레기
스치듯 전화기에서 보았던 사진 한 장이 며칠째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곳은 체육관이었다. 관람석 맨 뒤, 두 명의 사진기자가 보기만 해도 무거운 카메라 두 대씩을 어깨에 멘 채 얘기 나누고 있다. 한 명은 팔짱을 낀 채 듣고, 한 명은 손짓을 섞어가며 뭔가 설명한다. 사진 왼편에 위치한 그들은 모른다. 오른편에서 남자 하나가 방송용 삼각대를 들고 그들을 내려찍으러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기만 해도 아찔한 이 장면이 어떻게 수습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화들짝 놀란 누군가 말렸을 것이고, 삼각대를 휘두르려던 남자도 그것을 바랐을 것이다. 유가족으로서 경고한다, 너희가 카메라로 아무렇게나 우리를 훑어댄다면 우리도 너희를 훑어낼 것이다, 라고 그는 외쳤다. 내겐 그렇게 들렸다.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까. 나 또한 알량한 ‘선의’를 앞세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얼굴을, 일상을 훑어대었던가. 깝죽대다가 내 눈을 겨냥하고 날아온 각목에 맞아 실명할 뻔했음에도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세월호가 가라앉고, 그 안에 어린 생명들이 갇혀 가라앉으면서, 우리의 많은 것들이 함께 가라앉고 있다. 우리는 구할 수 있었는데도, 구하지 못했다. 구하지 않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사진으로 아이들을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사진으로 유가족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할 수는 있으리라. 우리는 신중할 수 있었는데도 신중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든 쓰레기가 되기를 자초했다.
아해라던가, 그 자의 ‘아티스트 네임’. 얼굴 없는 사진작가로 유명하다는 세월호 선주의 홈페이지에는 ‘쏘 씸플, 쏘 뷰티플, 쏘 퍼펙트’라는 문구가 담백하고 아름다우며 완벽하게 걸려 있었다. 세월호는 아해를 위한 특별 사진전시장을 짓던 중이었다.
하긴 이 나라 이 땅 모두가 “퇴임 후 사진작가나 해 볼까 싶다”던 이명박의 특별 사진전시장 아니었던가. 카메라를 든 아해들이, 세상을 활보한다. 귀한 아해들이 사라진 세상에 쓰레기 같은 아해들이 활개 친다. 이것은 가해가 아닌가.
2014년 4월, 진도체육관. 한 유가족이 삼각대를 치켜들고 카메라를 부수러 달려가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카메라와 펜을 쥔 자들이 얼마나 무능하며 동시에 교활한가를 폭로한 사건이기도 했다. 유가족들은 ‘기레기 언론’에 치를 떨었다. 허나 언론을 그렇게 망가뜨린 것은 자본이었다. 정치권력이었다. ⓒ노순택
1.
계획 없이 찍어댄 사진과 바삐 끼적댄 메모들을 어떻게 기록으로 정리할 수 있을지, 어떻게 우리가 겪은 시대에 관한 뼈아픈 진술이 되게 할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다. 처음이었다. 여러 갈등과 고통의 현장을 짧지 않은 시간 목도해 왔지만, 이런 참사는 처음이었다. 이런 비명과 눈물은, 이런 악독함은, 이런 혼란은 내게 처음이었다.
도저히 사진기를 들 자신이 없었던 순간들,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던 글짓기의 시간들.
누군가 고통 받고 있는 장면에 사진기를 들이대는 행위는 모욕적이다. 고통의 당사자는 사진기가 휘두르는 칼날에 상처 입는다. 그것은 양날의 칼이다. 고통을 찍는, 그리하여 그 고통을 ‘주목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사진사에게도 그 순간은 모욕적이며 상처를 남긴다. 찍히는 자가 치욕을 견디고(혹은 허락하고), 찍는 자도 모욕을 견디며 버튼을 눌렀을 때 비로소 사람들에게 몇 장의 사진이 배달된다. 물론 누군가는 원했을 것이다. 고통이 사진에 박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기를 바라는 이는 당사자일 수도, 사진사일 수도, 시민사회일 수도 있다. 많은 경우 고통의 당사자는 모욕 따위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모욕이 아닌가. 모욕을 주고받는 행위는 좀처럼 적응하기 힘든 일이다.
고통이 담긴 사진일지라도 드문 경우 보람을 남긴다. 많은 경우 상처와 회한을 남긴다. 둘은 섞이곤 한다.
찍히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일들은, 찍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 참사는 벌어지지 말았어야 했다. 허나 벌어졌고, 우리는 ‘참사 이후의 참사’를 겪고 있다.
참사의 책임을 자본과 국가에 물을 지라도, 참사 이후의 참사는 누구의 책임인가. 그 책임에서 나는 자유롭다, 누가 말할 수 있는가.
2016년 4월, 서울 광화문 세월호 광장. 세월호에는 아직 미수습된 9명이 남아있다. ⓒ노순택
*이 글과 사진은 사진가 노순택이 <씨네21>에 연재했던 짧은 원고들을 묶고 수정 재배치하여 <문화과학> 2016년 여름호에 게재한 것입니다. <문화과학>과 저자의 동의를 얻어 이곳에 옮깁니다.
<노순택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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