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이틀 뒤인 2014년 4월18일 한 잠수사가 참사 현장에서 수색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잠수사들은 ‘국가를 배신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희생자 수색·구조에 뛰어들었다. 그 일로 몸과 마음이 망가진 잠수사들은 이제 ‘국가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선의의 국민을 동원한 뒤 내팽개쳤다는 것이다.
<한겨레21>은 세월호 민간잠수사 이광욱씨가 구조·수색 작업 중 사망한 사건에 대해 책임을 뒤집어쓰고 기소된 민간잠수사 공우영(61)씨의 수사·재판 기록을 입수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정리했다. 현재 그들의 심경도 들어봤다. 참사 이후 민간잠수사들 또한 모든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고 있다.
잠 한숨 못 자고 달려간 현장
세월호 참사 직후 민간잠수사들은 모종의 사명감을 느꼈다. 무고한 어린 학생들이 바다에서 숨졌고 그들은 심해 잠수에 이골이 난 잠수사였다. 누구 하나 돈으로 흥정해온 적 없었지만, 이미 발길은 전남 진도 팽목항을 향했다.
잠수 경력 20년차인 민간잠수사 전OO(40)씨도 그랬다. 참사 관련 뉴스를 보고 그날 밤 한숨도 못 잤다. 4월17일 아침 직장에 “세월호 실종자 수색하는 데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경남 울산에서 차에 올라탔다. 참사 현장엔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찾아온 민간잠수사 3명이 더 있었다.
그들은 평소 알고 지낸 잠수사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급하니까 와서 도와줘. 같이 좀 하자.” 돌아온 답변은 대부분 거절이었다. “위험해서 안 간다.” “수심이 깊어서 못 간다.” 아직 현장엔 잠수사들이 작업하고 쉴, 공간과 장비가 마련돼 있지 않았다.
4월19일 민간잠수사 4명이 더 찾아왔다. 현장에 있던 잠수사들의 지인 또는 ‘지인의 지인’이었다. 이날 목포 금호수중개발의 바지선이 현장에 도착했고 이어 4월23일 세월호 구난업체로 지정된 언딘의 바지선이 도착했다. 실종자 수색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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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7일 아침 직장에 ‘세월호 실종자 수색하는 데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경남 울산에서 차에 올라탔다. 평소 알고 지낸 잠수사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급하니까 와서 도와줘. 같이 좀 하자.”
-전OO 잠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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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경찰청은 빠른 수색 작업을 요구하는 실종자 가족과 여론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해경은 언딘을 통해 구조·수색 작업이 가능한 민간잠수사 충원을 강력히 요구했다. 참사 직후 현장에 내려간 김OO 언딘 총괄이사는 2015년 2월9일 공우영씨 재판에 출석해 “해경 김석균 청장과 이춘재 국장이 나한테 민간잠수사 60명을 맞추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민간잠수사들을 수소문했다.
“현장에 오겠다는 잠수사들이 없었다. 진도 팽목항에 있는 국제잠수교육자협회 본부장 김OO씨를 통해 산업잠수 경력 10년 이상 잠수사들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2014년 5월9일 목포해경 진술조서) 해경과 언딘 등의 민간잠수사 모집 작업으로 5월4일 13명, 5월5일 8명이 합류했다.
고 이광욱 잠수사도 5월5일 오전 11시 고향 후배 양OO(53)씨와 함께 구조·수색 작업 현장인 언딘 바지선에 도착했다. 처음 손을 내민 건 이광욱 잠수사였다. 그는 참사 이틀 뒤 양씨에게 문자를 보냈다. “OO아 너랑 나랑 갈까? 사람들 건지러… 젠장 건질 놈들이 아무도 없네?”
그 뒤 다시 한번 이광욱 잠수사가 전화를 걸어 양씨에게 제안했다. 양씨는 인천에서 수중공사 업체를 운영 중이었고, 시간이 맞지 않아 못 갈 것 같다고 했다. 이광욱 잠수사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 “넌 국가를 배신했다. 잘 살아라.” 두 사람은 결국 동행했다. 이광욱 잠수사는 현장 도착 직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글을 올렸다. “간만에 애국하러 왔네.”
양씨는 이후 경찰 조사에서 이광욱 잠수사를 이렇게 기억했다. “제가 어릴 적부터 보아온 이광욱씨는 의롭고 여린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세월호 참사 후 TV 뉴스를 보면서 어린 학생들의 죽음을 보고는 울먹이면서 전화해, 저도 어쩔 수 없이 함께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개인적, 어떠한 금전적인 부분을 얻고자 한 사람이 아닙니다. 순수한 마음과 남의 일을 자신의 일같이 생각하고 희생정신으로 모든 것을 팽개치고 달려간 분입니다.”(2014년 5월13일 인천해경 진술조서)
유속 강해도 시간표대로 들어가라던 해경
세월호 참사 이후 실종자 수색에 참여한 고 김관홍 잠수사가 2015년 12월16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에서 이주영 전 해양수산부 장관에게 질의하는 모습. 연합뉴스
바닷물의 흐름이 멈추는 정조 시간은 하루 4차례였다. 기상 악화 등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정조 시간마다 보통 1~3시간 동안 2~4차례에 걸쳐 잠수사들이 투입됐다. 잠수사들은 그 시각에 맞춰 1시간 전부터 슈트를 입고 장비를 챙겼다. 조류가 거세져서 작업이 중단될 때 식사, 세면, 세탁, 취침 등을 해결했다.
민간잠수사들은 모여 앉아 입수 일정과 차례 등을 게시판에 적어가며 협의했다. 일반 수색 작업은 2인 1조, 안내줄 연결 작업은 1인 1조로 운영됐다. 입수 뒤 구조·수색 작업을 마치면 수면으로 올라오는 동안 통신장비로 자신이 작업한 이동경로와 장소를 선상에 전달하고 이를 다음 잠수사와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일단 수면 위로 나오면 잠수병 등의 위험 때문에 감압 치료를 하는 챔버에 들어갔다.
해군과 민간잠수사가 구역을 나눠 실종자 수색 작업을 했다. “민간잠수사 1~2명이 해경 잠수사 1명과 한 조를 이뤘고, 해양경찰 잠수사는 세월호 밖에서 민간잠수사의 공기공급선을 잡아주거나 민간잠수사가 발견한 실종자 수색을 도와주는 일 등 보조적인 역할을 했다.”(2015년 5월7일 광주지법 목포지원 전OO 증인신문)
해경은 조석표에 따라 투입 예상 시점과 수색 장소를 지정했다. 1팀부터 5팀까지 해군, 해경, 민간잠수부 등 소속에 따라 사람들을 배정했다. 민간잠수사들은 더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도맡았지만 해경이 더 위험한 일을 요구해 화가 났다.
전OO 잠수사는 공우영씨 재판 증인신문에서 “조석표랑 맞지 않게 유속이 매우 강한데도 해경은 조석표 시간대로 들어가라고 일방적으로 시켰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믿을 수 없었다. 거기서 따지고 항의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당시 작업은 극단적으로 힘들었다. “수심 10m가 넘어서 그 육체 피로는 상당하다. 원칙적으로 심해 잠수를 하면 3~4일이 한계치다. 3~4일 하면 10일 정도는 쉬는데 거기선 인원도 적고 물때에 맞춰 순번을 정해 로테이션을 하다보니까 그렇게 쉴 수가 없었다. 이미 오래 있던 잠수사들은 상당히 피로도가 높았다.”(2015년 2월9일 광주지법 목포지원 양OO 증인신문)
세월호 참사 현장 구조·수색 작업 일정은 매우 불안정했다. 기상과 조류 문제로 자주 변경됐다. 이광욱 잠수사도 도착 당일 오후 5시30분 첫 투입 예정이었지만 유속이 빨라져 계획이 취소됐다. 다시 밤 11시30분 슈트를 입고 준비했지만, 예정 작업 시각인 이튿날 새벽 1시에도 유속이 줄지 않아 또다시 계획이 취소됐다. 컨테이너로 돌아가 저녁 대신 라면을 끓여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당시 민간잠수사들은 바지선 위에 설치된 컨테이너 바닥에 전기 패널을 깔고 잤다. 양씨는 경찰 조사에서 이광욱 잠수사가 당시 불안정한 일정 때문에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광욱 형은 이틀 동안 잠자리가 바뀌고 작업 타임이 계속 연기돼서 다 합해 5시간 정도밖에 못 잤다고 했다. 쉬라고 했지만 자신의 작업 타임이니 괜히 남한테 피해 주지 않고 줄만 매주고 오겠다고 얘기했다.”
새벽 6시 이광욱 잠수사는 참사 현장에 처음 입수했다. 임무는 실종자 수색 전 단계인 하잠색(안내줄) 연결 작업이었다. 세월호 5층 로비 입구에 안내줄을 연결해야 했다. 같은 층 선원실과 계단 쪽을 수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내줄 연결은 상대적으로 간단한 작업이었다.
바지선 위에서 그의 이상 호흡 신호를 감지했다. 잠수 보조 인력들은 공기호스를 여러 차례 잡아당겨 올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전에 약속된 신호였다. 바다에선 반응이 없었다. 바로 대기잠수사 2명이 투입돼 그를 건져올려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결국 숨졌다.
동료 죽음의 책임을 묻는 검찰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2016년 6월20일 세월호 참사 당시 수색 작업에 참여한 민간잠수사와 희생된 안산 단원고 기간제 교사 등의 피해구제를 위해 세월호참사 피해지원 특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실종자 수색 작업이 석 달 가까이 지난 7월10일, 언딘 바지선이 철수했다. 그때까지 수색작업에 참여한 민간잠수사들도 모두 교체됐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검찰은 공우영 민간잠수사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그가 참사 현장에서 민간잠수사들의 실종자 수색 업무를 관리·감독하는 사람으로서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 이광욱 잠수사가 숨졌다고 검찰은 주장했다.
공우영 잠수사는 인천에 있는 수중공사 업체 유성수중개발 이사였다. 애초 언딘과 함께 세월호 인양 작업을 하려고 4월21일 참사 현장에 내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실종자들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도 수색 작업에 참여했다. 현장에 있는 민간잠수사들 사이에서 현역 최고의 잠수사로 알려진 그는 민간잠수사들이 입수 차례를 조율하고 수색 상황을 공유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검찰은 그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다. 하지만 법원은 그에게 2015년 12월 무죄를 선고했다. “민간잠수사의 생명·신체의 위험을 방지할 법률상 의무는 수난구호 활동의 지휘를 하는 구조본부의 장(해경청장 등)에게 있다”며 “공씨에겐 그런 권한과 의무가 없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항소했다. 재판은 2심이 진행 중이다. 공우영 잠수사는 구조·수색 작업과 관련해 언딘이나 해경과 계약을 맺거나 관리·감독 의무를 부여받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해경은 그를 포함한 민간잠수사들에 대한 자신들의 지휘권을 명시한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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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괴사나 디스크, 트라우마 같은 병을 얻은 잠수사들은 다른 현장에 가고 싶어도 받아주질 않는다. 어차피 그 현장에서도 신체검사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월호 수색 때 일한 사람들은 다 알려져서 지난 2년간 백수로 사는 동료도 많다.”
-김상우 잠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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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씨 등이 서명한 서약서에는 “본인은 이번 세월호 구난·구조 수색 및 구조를 수행 중, 해양경찰의 규칙과 제반 지시에 따를 것을 서약하며, 이를 위반할 시 어떠한 조치를 당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당시 구조·수색 작업을 수행한 언딘 바지선에는 김석균 해양경찰청장과 이춘재 경비국장 등이 상주해 있었다고 민간잠수사들은 증언했다. 하지만 검찰은 해경 대신 민간잠수사 1명에게 구조·수색 중 사망 사건의 법적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2년 가까이 재판받고 있는 공우영 잠수사는 6월24일 전화 통화에서 “2심 재판이 아직 아무런 진행도 되지 않아 마음이 답답하다. 외국에 나가려고 해도 여권이 발급 안 되고 있다”고 말했다.
참사 현장을 직접 수색한 민간잠수사들은 몸과 마음에 병을 얻었다. 허리디스크와 목디스크, 골 괴사, 불면증, 우울증 등을 앓고 있다. 그들에 대한 정부의 치료비 지원은 끊겼다 나오길 반복했다.
보건복지부는 2015년 8월 세월호 민간잠수사 22명이 낸 의상자 지정 신청을 전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상자로 지정되려면 ‘직무 외의 행위’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타인의 생명·신체·재산을 구한 사실이 인정돼야 하는데, 그들의 구조·수색 행위가 직무 범위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민간잠수사들이 자발적으로 현장 구조·수색 작업에 참여한 뒤 해경이 그들을 상대로 발령한 수난구호종사명령이 ‘직무행위’의 근거로 활용됐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세월호 민간잠수사 등이 완치될 때까지 의료 지원을 하고 세월호 참사 관련 구조·수색 과정에서 다치거나 숨진 이들을 ‘의사상자’로 규정하는 세월호참사 피해지원 특별법 개정안을 지난 6월20일 대표 발의했다.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말라
세월호 참사 구조·수색 작업으로 몸과 마음에 병을 얻은 민간잠수사 가운데 고 김관홍 잠수사도 있다. 그는 6월17일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그가 숨지기 직전 지인들에게 자살을 암시하는 문자를 보냈다고 밝혔다.
그는 2014년 4월30일 구조·수색 작업 중 사고를 당하고 사흘 뒤 다시 현장을 찾았다. 의사는 퇴원을 말렸지만 고생하는 동료들과 함께해야 했다. 현장 수색 종료 직후 허리디스크와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을 받고 넉 달간 입원치료를 받았다. 그와 함께 참사 수색 작업에 참여한 김상우 잠수사는 6월24일 전화 통화에서 “골괴사나 디스크, 트라우마 같은 병을 얻은 잠수사들은 다른 현장에 가고 싶어도 받아주질 않는다. 어차피 그 현장에서도 신체검사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월호 수색 때 일한 사람들은 다 알려져서 지난 2년간 백수로 사는 동료도 많다”고 말했다. 고 김관홍 잠수사도 세월호 구조수색 참여 이후 잠수 일을 구하기 어려워 최근엔 대리운전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생전 그의 말대로 단지 마음이 아파서 양심적으로 간 것이 죄라면 죄였다. “법리 논리 모릅니다. 제발 상식과 통념에서 판단을 하셔야지, 법리 논리? 저희가 간 게, 양심적으로 간 게 죄입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타인한테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마십시오. 정부가 알아서 하셔야 됩니다.”(고 김관홍 잠수사, 2015년 9월15일 국민안전처 국정감사)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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