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7일 북한 핵실험, 미사일 발사 등 무력시위를 언급하면서 “지금 우리의 분열을 꾀하며 북한을 옹호하는 세력들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무서운 것은 내부의 분열과 무관심”이라며 “과거 월남이 패망했을 때도 내부의 분열과 무관심이 큰 원인이었다”고 했습니다.
경향신문 만평 ‘장도리’에 등장한 박근혜 대통령
박 대통령의 “북한 옹호 세력” 언급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겨냥한 것으로 보입니다. 민변은 지난 4월 중국에 있는 북한 식당을 탈출해 남한에 들어온 종업원들의 인신보호와 관련해 국가정보원과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민변은 “자발적 탈북 여부를 조사하겠다”며 북한 종업원 접견을 신청했으나 국정원이 거부하자, 지난달 종업원 가족들의 위임장을 받아 법원에 인신구제를 청구했습니다.
대통령의 이번 발언을 두고 정부와 여권이 종북 프레임을 덧씌워 민변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해체’까지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해석까지 나옵니다. 이미 새누리당 지상욱 대변인은 지난 23일 서면 브리핑에서 “민변(民辯)인가, 북변(北辯)인가”라며 색깔론을 제기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색깔론’ 제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11월5일에도 청와대에서 제6차 통일준비위원회 회의를 주재하면서 “통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강한 자긍심과 역사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이라며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통일이 되기도 어렵고 통일이 되어도 우리 정신은 큰 혼란을 겪게 되고 중심을 잡지 못하는, 그래서 결국 사상적으로 지배를 받게 되는 그런 기막힌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가장 큰 이슈였던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색깔론’을 꺼내든 것입니다.
앞서 박 대통령의 ‘복심’으로 통하는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은 지난해 10월28일 국회 예결특위에서 “언젠가는 적화통일이 될 것이고, 북한 체제로 통일이 될 것이고, 그들의 세상이 되게 됐을 때 남한 내에서 어린이들에게 미리 교육을 시키겠다는…(취지로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는 것 아니겠느냐)”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죠.
그런데 툭하면 색깔론을 꺼내드는 친박 정치인들이나 박근혜 대통령이 혹시 알고있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때 ‘색깔론’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난해 11월25일 경향신문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한 독자가 이와 관련한 ‘제보’를 보내주셨습니다. “흥미로운 자료를 발견했다”며 1963년 10월5일 동아일보 1면에 게재된 한 광고를 첨부해주셨는데요, 확인해보니 같은 날 경향신문 1면에도 실렸습니다. 광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광고 속 사진의 주인공은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기호3번 박정희 후보’입니다. 내용을 한번 살펴볼까요.
제목은 ‘전진이냐 후퇴냐’ 입니다.
여러 내용 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매카시즘’에 대한 반발입니다.
우리들은 이제 이 나라 사회의 근대회 작업을 끈덕지게 방해하고 있는 일체의 매카시즘을 타도 청소해야 할 공동의 전선에 섰습니다.…(중략)…매카시즘의 한국적 아류들인 그들은 그 악습의 보검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시커먼 무새우를 매카시즘이라는 번철에 달달 볶아 새빨간 빨갱이로 만들려는 수법을 농하고 있습니다.…(중략)…‘참다운 반공’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참다운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의 정치 지반인 전근대적인 유제가 위협을 당하면 ‘용공’이니 ‘빨갱이’이 하는 상투적인 술어로 상대세력을 학살시켰던 것이 한국적 매카시즘의 아류들이 저질러온 행적이었습니다.…(중략)…전국의 지성인 여러분! 무슨 일이 있든지 우리는 차제에 한국적 매카시즘의 신봉자를 우리 사회에서 일소시키기 위해 분연히 궐기하여 과감히 투쟁합시다.
도대체 그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런 광고가 나왔을까요. 감히 누가 박정희 후보를 ‘빨갱이’라고 공격했을까요. 당시 박정희 후보는 왜 매카시즘을 타도하자는, ‘통합진보당’ 정치인 같은 발언을 했을까요. 한국 현대사를 시간순으로 정리한 <20세기 이야기-1960년대>(김정형 지음, 답다) 231~232쪽을 보니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상 논쟁의 발화점은 1963년 9월23일 서울 중앙방송을 통해 알려진 박정희의 정견발표였다. 박정희가 “이번 선거는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사상과의 대결”이라며 기성의 정치인들을 사대주의적 근성을 지닌 ‘천박한 자유민주주의자’로 몰아붙인 게 논쟁의 시작이었다. 윤보선은 다음날 기자회견을 통해 “여순반란사건의 관계자가 지금 정부에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우리의 민족주의나 민주주의를 의심한다면 역사를 캐보자”며 은근히 박정희의 여순반란사건 연루 사실을 환기시켰다. 윤보선의 기자회견은 박정희 측은 물론 국민에게도 충격이었다. 9월25일엔 서울 교동초등학교에서 열린 야당의 시국강연회에 “북한에서 밀파한 황태성 사건의 진상을 밝혀라”, “공화당 내에 6·25 당시 부역자 및 그의 가족이 월북한 자가 있다”는 구국청년동지회 명의의 전단까지 뿌려지면서 사상 논쟁은 더욱 가열되었다. ···(중략)···판세가 요동을 치자 선거를 일주일 앞둔 10월8일 박정희가 직접 나서 “여순반란사건은 나와 무관하다”며 연루 사실을 부정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중략)··· 선거를 이틀 앞둔 10월13일 윤보선 측은 확실한 승기를 잡기 위해 1949년 2월17일자 경향신문과 2월18일자 서울신문에 실렸던 ‘박정희 소령 무기징역 선고’ 관련 기사를 공개했다. 박정희 소령이 72명의 다른 장교와 함께 여순반란사건 이후에 있었던 군부 내 남로당 조직 수사에 걸려 군법 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비상이 걸린 박정희 측은 “박정희 후보가 여순반란사건에 관련해 재판을 받은 일이 없다”고 애써 부인하면서 “윤보선 가족 중에도 공산당원이 있다”며 물타기를 시도했다. 기사에 거명되었던 당시 재판장도 “나는 박정희 장군에 대해 재판을 한 사실이 없다”며 부인하고 나섰다.
그럼 여기서 사실 관계를 다시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윤보선 후보 측 주장의 근거는 있을까요. 1949년 2월17일 경향신문을 찾아봤습니다.
단신이긴 하지만 박정희 후보에 대한 기사가 있습니다. 제목은 ‘총살형 1명, 무기 4명-군법회의서 73명에 언도’입니다. 내용을 보겠습니다.
건전한 국군을 건설하고서 국방부에서는 특히 작년 10월 반란사건이래 장교를 비롯하여 병사에 이르기까지 1000여명을 검거하여 취조 중에 있던 중 조사가 끝난 자들은 지난 8일부터 군법회의에 회부중이었는데 지난 13일까지 판결언도를 받은 자는 73명에 달하고 있는 바 그 중 천마산 15연대장 최남근은 총살언도를 받았으며 그외 김학휴, 조병건, 박정희, 백명종 등은 무기징역 언도를 받고 기타는 15년부터 5년까지 징역판결이 있었다 한다.
무기징역을 받은 4명중 1명이 바로 박정희 후보였습니다.
성균관대 사학과 서중석 명예교수가 지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웅진 지식하우스)에도 관련 내용이 나옵니다. 113쪽, 303쪽에 각각 다음 대목이 나옵니다.
국군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군 내부에 있는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 프락치를 처단하는 대규모 숙청사업을 벌였다. 관동군 지배 하의 만주군 장교로 항일세력을 ‘토벌’하던 박정희는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하다가 육사 동기생 등 동료 프락치에 관한 정보를 군 정보 당국에 넘겨주어 살아났다.
그렇다면 1949년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박정희는 어떻게 ‘재기’해 1961년 5·16 쿠데타까지 일으킬 수 있었을까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한겨레신문에 연재 중인 ‘한홍구의 역사’ 2015년 10월24일자(▶‘억울했던 빨갱이’ 박정희의 비명을 기억하라)를 보면 그 사연이 나옵니다. 한 교수에 따르면 ‘이미 살려주기로 방침이 정해진’ 박정희는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과 파면, 급료몰수형을 받습니다. 이어 심사장관과 관할관의 확인 과정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되고 다시 그 형의 집행을 면제받았습니다. 여기에 한국전쟁이 박정희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합니다.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민간인 문관으로 있던 박정희는 전쟁이 터지자 장교로 복직됩니다.
장교 복직으로 ‘좌익 면죄부’를 받은 줄 알았던 박정희 후보는 1963년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두고 ‘색깔론’으로 곤경에 빠집니다. 그러나 투표결과 15만여표 차이로 승리를 거둡니다. 특히 호남에서 윤보선 후보를 35만여표 차이로 제쳤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던 호남은 부역자 처벌과 연좌제의 고통을 혹심하게 겪었기 때문에 빨갱이 소동을 일으킨 윤보선보다는 빨갱이로 몰린 박정희에게 동정표가 쏠린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또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 표가 많이 나온 곳, 즉 “좌익세력이 많은 곳에서만 무서울 만큼 박정희 후보의 우세가 나타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고 한홍구 교수는 전합니다.
역설적으로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색깔론’이 박정희 후보의 아슬아슬한 당선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후보는 대통령이 된 뒤 ‘색깔론’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릅니다. 물론 이번에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3일 오전 국회에서 20대 국회 개원 연설을 마친 뒤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권호욱 선임기자
1963년에서 50여년이 더 흘렀습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에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색깔론을 들고 나왔고 올해에는 국정원과 갈등을 빚고 있는 민변을 겨냥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도대체 언제까지 시대에 뒤떨어진 색깔론에 기대려는 걸까요. 박 대통령은 아버지의 과거를 알고는 있을까요.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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