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 승려가 있었다.
그는 2005년 친일파 이해승의 후손이 불암산 내원암이 자리한 조상의 땅 5만여평을 돌려달라는 민사소송을 재기하자 분연히 일어섰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이 땅이 일제 총독부로부터 무상임대 받은 땅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자 그 친일파 후손은 소를 취하했다. 원고가 소를 취하한다는 의미는 재산권을 포기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스님은 원고의 소취하에 동의하지 않았다. 5만여평의 땅이 저절로 굴러 떨어지는 원고의 소취하에 피고가 동의하지 않는 민사소송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 진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재판부에 ‘위헌법률제청신청’을 내고 재판에 지더라도 끝까지 싸울 것을 천명했다. 그의 논지는 간단했다. “세상에 나라 팔아먹은 죄 이상 큰 죄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앞으로도 친일파 후손들이 재산권을 행사 할 수 없도록 기준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이런 스님의 논리에 대해 당시 불교계 안에서 까지 “너무 앞서나가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고 주변에서는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라고 비아냥댔다. 그러나 그 당시 사법부에서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권을 인정하던 판결이 줄줄이 나온 던 때여서 오히려 이 사건은 신선하고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 사건으로 그해 8월 조계사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특별법 제정 촉구 촛불 집회’가 열리고 사회적 이슈가 되어 국회는 그해 12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특별법’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다음해 법원은 이해승 후손의 재산권의 인정하지 않고 내원암의 손을 들어주어주는 판결을 내렸다. 한 젊은 스님의 올바른 민족관이 “그릇된 것을 깨고 정법을 드러낸다”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실현 하고 “정정당당한 길을 가면 언제나 승리한다”는 진리를 보여 주었다. 그 스님이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의궤 등 약탈문화재 환수에 큰 공을 세운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 봉선사 혜문스님이다.
구한말 한 청년이 있었다.
당시 21살이던 이 청년은 나라가 망한 지 불과 2개월 만에 일왕 메이지로부터 후작이라는 작위를 하사 받는다. (매국의 수괴 이완용은 그 보다 아래인 백작을 하사 받음) 그리고 그는 일왕으로부터 요즘 화폐가치로 환산 하면 67억여원에 이르는 16만8천원의 막대한 은사금 받아 챙겼다. 이어 1912년에도 `종전 한일관계에 공적이 있다'는 이유로 한국병합 기념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조선 귀족회 회장이던 1942년에는 일본군에 2만원의 국방헌금을 냈으며, 미나미 총독이 이임하자 매일신보에 보낸 ‘내선일체에 큰 공적’이라는 글에서 “미나미 총독께서 펼치신 징병제도와 징용제도는 천황폐하께서 조선동포를 대동아공영권의 지도자가 되게 하시려는 어버이 같은 심정에서 나온 선정으로 감격해 마지 않는다”고 말해 일왕에 대한 아부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그가 친일파 이해승이다. 그리고 국권을 회복한지 65년이 지난 엊그제 그의 후손들은 대한민국으로부터 그 조상이 친일의 대가로 치부해 물려준 300여억원에 달하는 재산권을 인정받았다. 대한민국 대법원(주심 민일영 대법관)은 15일, 친일파 이해승의 손자가 토지의 국가귀속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옛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판결한 고등법원(주심 박병대 부장판사)의 원심을 확정했다. 이유는 “당시 작위를 받은 것만으로 한일합병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입증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가 웃을 일이다. 작위란 무엇이고 은사금이란 무엇인가? 그 낱말의 뜻에 대해 국어사전을 들춰 보기라도 했는지 묻고 싶다. 일본에 유익한 일을 했기에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을 것이고 일본에 유익되는 일을 했다면 조선의 망국에 협조 또는 방조했다는 반증이다. 다른 왕족들도 똑같이 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단죄 할 수 없다면 작위를 받은 왕족 전체를 정죄해야 할 일이지 그 가운데 하나에게 면죄부를 줄 일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나라가 망하는데 배를 갈라도 시원치 않을 판에 그까짓 작위하나 팽개치고 분연히 일어서는 사람 하나 없이 쌈짓돈이나 헤아리며 일왕에게 감지덕지 하는 왕족나부랭이들이 있었기에 이민족의 치욕스런 통치를 받게 됐던 것이 아닌가?
마치 강도가 온 집안을 털어 갔는데 그 가족 중 하나가 강도로부터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살 정도의 금품을 받았는데도 그 돈을 정상적인 증여로 인정한다는 것에 다름 아닌 판결이다. 이런 것 정도는 사법고시를 패스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상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1심 재판부는 "이해승이 1912년에도 `종전 한일관계에 공적이 있다'는 이유로 한국병합 기념장을 받은 사실 등을 종합해 보면 단지 황실 종친이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한일합병에 공이 있음이 인정돼 후작 작위를 받은 것“이라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한 것이다.
대법원에 묻고 싶다. 그가 치부한 막대한 부는 매국의 대가로 받은 은사금이이 종자돈이 되었을 터인데 만약에 그 때에 받은 국공채를 가진 후손이 국가에 현금지금을 신청한다면 대법원은 “국가는 현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할 것인가? 대한민국 제헌헌법 부칙 101조는 “해방 전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징병과 징용으로 황국신민이 될 수 있도록 해주신 어버이 같은 마음에 감읍한다“며 징병과 징용제도를 찬양하면서 동포를 아비규환의 전쟁터로 몰아넣고 자신은 호의호식하며 살아온 자가 반민족행위자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를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해야 하는가? 대한민국은 그 기준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잘 아시다시피 연합군이 2차대전에서 승리한 뒤 프랑스의 나치부역자 숙청은 피비린내 나는 준엄한 것이었다. 샤를 드골은 친 나치 비시정권의 수반 페탱과 총리 라발에게 사형선고를 했다. 비시 정권은 법적으로는 선거를 통한 합법정권이었으며 페탱은 전날 드골의 직속상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탱은 95살까지 대서양 고도의 요새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죽었으며 라발은 총살당했다. 페탱이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 된 것은 그나마 1차대전에서 국가에 끼친 공이 있다는 정상이 참작 돼 서였다. 이어 드골은 나치에 협력한 언론사 700여 곳을 폐간하고 언론인 등 9천여 명을 재판 없이 즉결 처분하는 과정에서 사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정치인, 언론인, 법조인, 종교인, 연예인 등의 단죄를 더욱 엄격하게 했다. 프랑스의 나치청산은 지금도 계속 된다. 프랑스 어느 작은 도시의 시청에 비시정권 수반 페탱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을 본 시민이 신고 했다. 정부는 즉각 초상화를 철거 할 것을 명령했지만 민선시장은 이에 불복했다. 그러자 프랑스의 행정법원은 즉각 페탱의 초상화를 철거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불과 한 달 전에 프랑스에 있었던 일이다. 이것이 관용(똘레랑스)의 나라라는 프랑스가 민족반역자를 대하는 기준이다. 일제 때 전면에 일왕의 생일 축하기사를 도배하는 것도 부족해 징병과 징용을 독려하던 신문들이 아직까지 멀쩡하게 나라 여론을 좌지우지하고, 그런 언론들을 단죄 하기는 커녕 집권에 이용하고 반민특위를 물리적으로 해체한 리승만의 동상을 광화문에 세우자고 떠들고, 식민통치의 주구(走狗)였던 제국군의 장교를 나랏님으로 18년 동안 모신 우리는 과연 프랑스보다 관용의 나라이고 인권을 누리는 나라인가? 법이 최소한의 상식을 담보하는 것이라면 이런 민족반역자 후손들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관용을 베풀기 보다는 살기위해 소.돼지처럼 몸부림치다가 재판을 받게 된 용산참사 관계자들에게나 관용을 베풀었어야 할 일이다. 법이란 법전을 문자주의로 해석 해 명문의 판결문을 쓰는 것이 아니고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매국의 대가로 받은 재산을 국가가 보호해 준다면 앞으로 어느 누가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닥칠 때 국가를 위해 충성 하겠는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매국을 용인 하는 나라에서 사는 하루하루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다.
글 / 송영한, 문화재 제자리찾기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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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September 24, 2015
매국을 용인하는 나라에 산다는 것..."하루하루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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