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독트린
민주주의민족동맹(NLD) 당사의 풍경 하나가 떠오른다. 아웅산 수치의 사진이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사진이 조그맣게 붙어 있었다. 2008년 젊고 싱싱한 모습이었다. 그새 희끗희끗 머리칼이 많이 새었다. 한 나라의 집권당을 목전에 둔 정당 사무실에 미국 대통령 사진이라. 마땅치 않았지만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사진으로 담을까 하다가 셔터를 누르지도 않았다. 자칫 침소봉대가 될 수 있었다. 'HOPE', 'CHANGE', 'Yes, We can' 등 당시의 희망찬 구호들은 민주화 시대로 진입하는 NLD의 다짐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 오바마는 2012년 미얀마를 방문하여 수치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미국의 소프트파워, 매력 공세를 펼쳤다.
잊고 있던 그 사진을 다시 떠올린 것은 미국의 시사지 <애틀랜틱(The Atlantic)>에 실린 '오바마 독트린(The Obama Doctrine)'을 읽으면서다. 3월 중순, 온라인 판이 공개되었다. 퇴임을 앞두고 그의 외교 정책을 회고하는 인터뷰였다. 분량이 매우 길다. 이 잡지의 지난 10년 기사 가운데 가장 길지 싶다. 정리가 잘된 것 같지도 않다. 다소 산만하다.
편집자도 그렇게 느낀 모양이다. 기사 말미에 핵심을 요약하는 친절을 베풀었다. 내가 더 줄이면 이러하다. '중동은 더 이상 미국에 가장 중요한 지역이 아니다. (동)아시아가 가장 중요하다. 중동에 관여를 계속해도 사태가 개선되기는 힘들다. 미국의 패권을 감소시킬 뿐이다. 세계는 미국의 패권 저하를 바라지 않는다.' 고로 미국은 중동에서 발을 빼야한다는 뜻이렸다.
이 기사가 공개된 직후,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시리아에 파병한 러시아군을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9.11 이후 군사 개입에 거듭 실패한 미국과 견주어 러시아는 불과 반년 만에 시리아의 (일시적인) 안정을 이루었다. 21세기 첫 15년간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쏟아 부은 비용이 1.6조 달러(비공식 통계로는 6조 달러)이다.
그럼에도 이라크는 IS(이슬람국가)가,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이 장악해가고 있다. 반면 러시아의 시리아 진출은 5억 달러에 그쳤다. 3000배, 혹은 8000배의 차이이다. 러시아는 시리아 사태 해결을 발판으로 이란, 이라크, 레바논, 이집트 등 중동 전역에 영향력을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관여 축소와 러시아의 개입 확대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서유라시아에 새판이 짜여간다.
인터뷰를 다른 식으로 독해할 수도 있다. 오바마는 지난 7년간 군산 복합체와 얼마나 치열하게 각투(혹은 암투)해왔는지를 은근하게 드러낸다. 군산 복합체는 군부와 군수 산업계 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정보 기관, 첩보 기관, 금융 기관에 언론계와 학술계, 시민 단체까지 망라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군산학 복합체'이다. 미국의 호전적 정책에 편승하여 실리를 취하는 이익 집단이다. 오바마는 워싱턴의 '외교 안보 전문가'들이 거듭 잘못된 훈수를 두었다고 역정을 낸다. 군산학 복합체의 이익에 복무하며 대통령의 의지를 꺾으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은 베트남 전쟁부터 그러했다. 존 F. 케네디와 힌든 존슨은 동남아의 정글에 개입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려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그릇된 판단을 유도하는 이들이 백악관 안팎에 포진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굴기하여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통해 성장하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항구적인 전시 체제를 기획한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것이다.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미국의 신뢰성(credibility)이다. 당장 이익이 아니더라도, 혹은 그 기회비용이 높다 하더라도, 미국의 위신에 손상이 가는 일에는 적극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동맹국과 적대국 및 전 세계에 잘못된 신호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국의 책무'라고 말할 것이다.
오바마는 이의를 제기한다. '제국의 고충'을 덜어내자고 한다. '세계의 경찰' 노릇과 일정한 거리를 두자는 것이다. 그래서 시리아 사태에 무력행사를 거부하고, 남중국해에서도 실질적인 군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랜 적성국이었던 이란과는 화해하고, 쿠바는 직접 방문했다. 그의 진지한 고뇌에 일정하게 공감한다. 문제는 그가 곧 퇴임한다는 것이다. 후임자는 어떠할 것인가?
내부자와 외부자
하나의 유령이 미국을 떠돌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유령이. 11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상당하다. 이 말에는 다소간 어폐가 있다. 그가 유력한 후보가 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미국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우려하고 있는지를 깐깐하게 따져볼 필요성이 생긴다.
올해 미국 대선은 9.11 이후 16년, 뉴욕발 금융 위기 이후 8년, 21세기 초 미국의 중간 결산 격이다. 가장 큰 특징은 미국 정치를 규정했던 양당 과점제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에서는 버니 샌더스가, 공화당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당내 주류 세력을 위협한다. 20세기형 정당 정치, 보수 대 진보라는 구도가 깨지고 있는 것이다. 엘리트 대 풀뿌리, 내부자 대 외부자의 새 구도로 재편되었다.
여전히 20세기의 시각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자칭 민주 개혁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동일한 현상도 다르게 해석한다. 샌더스의 활약에서는 미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추키고, 트럼프의 약진에서는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짚는다. 제 눈에 안경이고, 제 논에 물대기이다. 정파적 사고의 병폐가 몹시 깊다.
오히려 트럼프 현상이야말로 '참여 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에 가깝다. 기층의 바람몰이로 엘리트 정당 정치를 뒤흔들고 있다. 공화당-민주당의 양당 과두제에 도전하는 '민주적 열정의 표출'이다. 신자유주의(민주당)와 신보수주의(공화당)의 적대적 공존에 균열을 내는 '신민주주의'의 물결이다.
이 '새 정치'로 말미암아 거대 양당 구조의 실상 또한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다. 공화당 주류파에서 트럼프보다는 차라리 힐러리를 지지하겠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들린다. 억만장자 트럼프는 군수 기업과 금융계의 지원이 필요 없다. 자본의 입김에서 홀연 자유롭다. 민주당 및 공화당과 유착되어 상징 자본을 누려왔던 주류 언론과 주류 지식인들도 힐러리 지지로 합세하는 모양새다. 그들이 펜대를 굴리고 세치 혀를 놀림으로써 관리할 수 있는 인물이 힐러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들과 '말이 통하는 사람', 이른바 내부자이다.
따라서 샌더스를 지지했던 표가 힐러리로 옮아갈 지 미지수이다. 공화당 대 민주당, 보수 대 진보라는 20세기형 구도가 지속된다면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내부자 대 외부자, 엘리트 대 풀뿌리의 구도라면 어찌될 것인가.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힐러리를 '극혐'한다. 그녀가 진보적이라서가 아니다. 주류 엘리트이기 때문이다. 균열선은 좌/우가 아니라 내/외로 그어졌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라는 아웃사이더 샌더스에 더 호감을 가지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네오콘과 월가가 힐러리를 더 선호한다는 사실이 확연해질수록 샌더스를 지지했던 표심도 흔들릴 공산이 크다. 힐러리보다는 트럼프로 갈아탈 수도 있지 않을까? 힐러리의 당선은 미국의 현상 유지에 그친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명예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남편과 현직 대통령과 양당의 전임 대통령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세기의 연장선, 쇼는 계속될 것이다. 반면 트럼프의 당선은 긍/부정을 아울러 미국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이념적 지향에서 양 극단을 달리는 샌더스와 트럼프가 외교 정책에서는 수렴되고 있음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둘 다 오바마가 지적했던 워싱턴의 파워 엘리트들과 단절되어 있다. 주요 싱크 탱크의 유명 인사들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는다. 더 중요하게는 두 사람 모두 적극적인 대외정책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트럼프의 모자에 새겨진 "Make America Great Again"을 오독하지 말아야 한다.
그(와 지지자)가 꿈꾸는 위대한 미국은 순전히 아메리카 안에서의 일이다. 남 나라 사정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에게 위대한 미국이란 워싱턴과 뉴욕과 할리우드의 글로벌 엘리트가 좌지우지하는 미국화된 세계가 아니다. 보통 사람들도 열심히 일하면 더 나은 삶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19세기와 20세기의 미국을 향수한다. 토박이들, 토착파들, 전통파들, 반세계화주의자들이다. 미국(만)을 사랑하는 백인 청교도들이다.
트럼프는 오바마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동맹국에 대한 관여마저 뜨악하다. 미국의 동맹국을 보호하는 것이 미국의 핵심 이익이라는 '교조'에서 벗어났다. 대신에 미국의 보호에 대한 비용을 더 지불하라고 한다. 지불할 수 없다면 떠나겠다고 으름장이다. 즉, 트럼프가 미국의 안과 밖으로 발신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미국을 내버려둬라, 우리도 너희를 내버려두겠다.(Leave America alone, and We will leave you alone.) 마침내 미국서도 국가 간 체제의 제1원칙에 충실한 정치인이 등장한 것이다. 상호 내정 불간섭이다. 그래서 냉전기 제국과 속국의 비대칭적 교환으로 작동했던 '미국식 조공체제'를 파기하려 든다. 늦은 탈냉전의 조짐이다.
오늘의 미국은 더 이상 20세기의 미국이 아니다. 우리도 고달프고, 너네도 불만인 '가치 동맹'(=십자군적 세계관의 근대화)일랑 마침표를 찍자는 것이다. 트럼프는 민주주의를 유일 사상으로 섬기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다. 전 세계를 민주화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근대의 선교사도 아니다. 사업가이다. 손익을 따진다. 수지가 맞지 않으면 접는 편이 득이라고 생각한다. 기업가적 합리성으로 미국의 현재를 꽤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분수와 처지를 제대로 꿰고 있다.
국제주의와 제국주의
트럼프를 가리켜 '고립주의'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 반대편에는 '국제주의'를 세운다. 노련하고 노회한 프레임 짜기이다. 폐쇄적인 고립주의보다는 국제주의가 한결 진취적으로 보인다. 기만적인 말장난이다. 9.11 이후 16년, 줄곧 '국제주의'가 가동되었다. 아프가니스탄부터 리비아까지, 중동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국제주의보다는 호전주의가 正名(정명)에 더 가까울 것이다. 혹은 제국주의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성 싶다.
국제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 힐러리이다. 한때는 영부인으로, 한창 때는 국무부 장관으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민주주의와 자유와 평등, 인권을 매우 중시하는 진보파이기도 하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자 하는 열렬한 호전주의자이기도 하다. 이라크와 이란에 가장 적대적인 인물이 힐러리였다. 장관으로 실적도 거두었다. 리비아의 카다피를 제거했다. 북아프리카의 독재자를 사살함으로써 IS가 창궐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민주주의 근본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의 악순환을 한층 악화시킨 장본인이 그녀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고 했다. 서늘한 진실을 담고 있는 격언이다. 자유민주주의 이외의 어떠한 이념과 체제도 승인하지 않는 이들이 현대 세계의 가장 과격한 근본주의자들이다. 사회주의와의 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자기 교정과 자기 성찰 능력도 상실했다. 그 안하무인으로 탈냉전 이후의 세계를 테러와 난민의 세기로 만든 것이다.
힐러리가 대통령이 된다면 풀뿌리 민주주의 세력은 (좌/우를 막론하고) 실망할 것이다. 군산 복합체는 환영할 것이다. 그녀의 신념을 발판삼아 재차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국제주의'의 다음 불장난은 중동보다는 동아시아가 될 공산이 크다.
파시스트와 리얼리스트
'트럼프 대통령' 저지를 선도하고 있는 공화당 주류 인사들이 파시즘을 우려한다. 부시 정부 아래서 활개 쳤던 인사들이 뻔뻔하게 그런 주장을 편다. 듣자니 민망하다. 정보 조작과 대중 선동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불구의 나라로 만든 주역들이다. 트럼프가 그들의 기득권을 흔들자 돌연 파시즘을 걱정하는 시늉을 내는 것이다. 후안무치하다. 현대 정치인의 기본 자질을 갖추었다.
트럼프야말로 아프간과 이라크 '침공'을 비판하고 있다. 금기였던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시비조다. 중동 평화에 기여하지 않고 호전적 태도를 일삼는다며 비난을 퍼붓는다. 오바마처럼 돌려 말하지 않고 돌직구를 던진다.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기상이 용맹하다. 물론 무슬림과 히스패닉과 여성과 소수자들에 대한 그의 발언은 끔찍하다. 도가 지나치다.
하지만 덜 세련되고 덜 정련되었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을 때, 힐러리는 흑인 청년들을 약탈자(super-predators)라고 경멸하여 곤욕을 치른바 있다. 힐러리가 더 빼어난 것은 미디어 앞에서의 연출과 연기에 능수능란하다는 점이다. 세련되고 모던한 정치인이다. 가면극에 탁월하다.
트럼프는 일견 인종 차별주의자로 보이지만, 그가 제출하고 있는 국제 전략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미국에 직접적인 안보 위협을 가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한다며 남의 나라에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라크의 후세인과 리비아의 카다피가 있는 편이 중동 안정에 더 이로웠다고도 한다. 외국의 독재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시장을 개방시켜 경제 발전을 유도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도 한다. '정경분리', '先經後政'(선견후정)에 가깝다. 그는 담대한 아이디얼리스트가 아니다. 철저하게 계산적인 리얼리스트이다.
리얼리스트는 미국 외교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민주화'를 표방하며 실패를 반복하는 호전파의 대척점에 자리한다. 가장 유명한 이로는 닉슨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 헨리 키신저를 꼽을 수 있다. 베트남전쟁의 수렁에서 미국을 구해내기 위하여 중국과의 화해를 도모했다. 공산주의 확산 저지를 명분으로 전쟁을 지속하기보다는 중국공산당과 손을 잡음으로써 탈냉전을 견인했다.
트럼프도 엇비슷하다. 그는 강력한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는 비록 민주적이지 않더라도 필요악으로 인정한다. 유독 푸틴을 높이 사는 이유이다. 미국이 푸틴을 적대시할수록 중국과 러시아가 결속하여 미국에 대항한다며, 러시아와의 화해가 필요하다는 실용적인 판단도 내린다. 응당 우크라이나에서 '민주화'를 선동하기보다는 유럽의 문제는 유럽에 맡기자고 한다. 냉전의 유산인 NATO에도 부정적이다. 이 모든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는 죄다 외면하고 돌출발언만을 부각시켜 파시스트로 낙인찍는 것 또한 민주 개혁 진영의 커다란 편견이며 편향일 것이다.
<1984>
나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유명한 사람보다는 유능한 인물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유능한 이보다는 유덕한 사람이 최고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德(덕)을 쌓은 사람이 福(복)을 베풀 수 있다. 인간은 논리로 설득되지 않는다. 솔선수범하여 감화시키고 감득시켜야 한다. 이성적 토론을 통한 합리적인 의사 결정? 민주주의의 이상은 근대의 신화이다.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계몽주의적 오해 위해 세워진 모래성 같은 제도이다.
트럼프 현상 또한 민주주의가 쇠퇴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가면 아래 민낯이다. 100년도 안 된 이 새파란 제도는 20세기 후반 줄곧 오작동 했다. 당장 세계 지도를 펼치고 민주주의 국가들을 살펴보기를 바란다. 그 중 훌륭한 거버넌스를 갖춘 국가가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기 바란다. 열손가락 꼽기도 쉽지 않다.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주어도 1할이 채 안 된다. 공시적으로도, 통시적으로도 미심쩍은 제도이다. 그럼에도 외면하고 간과했을 뿐이다. 고도성장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의 풍요가 민주주의의 실상을 가렸던 것이다.
나는 1인 1표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가 화석 연료 시대의 예외적인 정치 제도였다는 생각을 점점 굳혀가고 있다. 아테네에서 반짝했다가 2000년이 넘도록 부정당하고 기각되었던 제도가 (일시적으로) 부활한 마법의 비결에도 지하자원의 남용이 있었다고 여긴다. 인간 사회에 과도한 에너지가 일시에 투입되면서 그 무질서(자유 상태)를 제도적으로 흡수하는 정치형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성립 과정과 석탄과 석유의 발견 과정, 그리고 민주주의를 유일 신앙으로 삼는 학문과 사상의 확립 과정은 중동과 유럽으로 서진하면서 차차 살펴갈 작정이다.
즉 20세기의 번영은 석탄과 석유를 때우며 이룬 것이지, '각성한 노동자', '깨어있는 시민'들의 집합적 의지로 성취한 것이 아니었던 듯하다. 민주주의는 인민들의 붉은 피가 아니라 땅 밑의 검은 기름을 먹고 피어났던 것이다. 헌데 그 지하자원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저성장 혹은 성장 없는 살림살이가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아버지만큼 잘 사는 아들이 나오기 힘든 시대로 진입한다. 20세기만큼 풍요로운 세기 또한 도래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연 상태'로 되돌아간다.
그럴수록 민주주의의 오작동은 더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다. '인간 해방'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자원이 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욕망의 절제를 미덕으로 삼고, '자유인'을 동경하기보다는 聖人(성인)을 존경했던 정치문화가 재차 기지개를 펼 것이다. 인권(Human Right)을 내세우기보다는 人性(인성) 도야가 강조될 것이다.
독일의 유력지 <슈피겔>은 트럼프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지목했다. 옳은 말씀이다. 근대의 마지막 신화, '민주주의 근본주의'를 근저에서 허물고 있는 이단이기 때문이다. 서둘러 봉합하려 든다. <뉴욕타임스>, <르몽드>, <가디언>, <슈피겔>, <아사히신문>, <한겨레> 등 각국의 민주와 진보를 상징하는 언론들도 대동소이하다. 혹시 이들이야말로 '민주주의 근본주의'를 사수하는 최후의 프로파간다 기구는 아닐까. '새 정치'의 출현을 가로막고 있는 <1984>의 빅브라더(Big Brother)일 수 있다.
미얀마에서 식민 경찰로 한 때를 보내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가 조지 오웰이었다. 미얀마에서는 농반진반으로 '1984년의 미얀마'를 예측한 예언서라며 <1984>를 높이 산다. 그런 구석이 크다. 그런데 그뿐일까. 오웰은 미얀마에서 영국의 '문명화 사업'에 환멸과 염증을 느꼈다. 기만적인 '백인의 책무'에 구역질을 했다. 그래서 제국의 옷을 벗고 펜을 들었던 것이다. 제국주의의 본질을 직시한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도 투신했다.
따라서 <1984>를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은유만으로 읽어내는 것도 '냉전적 독해'에 그친다. 그 반대편 민주주의 사회는 얼마나 달랐던 것일까? 그런 의심과 회의 자체가 원천 봉쇄되어 있다는 점에서 '1984'의 가공할 상태와 유사하지 않은가. 19세기 영국의 문명화 사업과 20세기 미국의 민주화 사업은 연속적인 것이다. 빅브라더가 진화한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밖을 상상하지 못한다. 고작 다시 민주주의, 더더 민주주의이다.
11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사상 해방'은 폭발할 것이다. 20세기 전반의 파시즘과 20세기 후반의 공산주의를 '전체주의'로 묶고, 그 맞은편에 민주주의를 세웠던 20세기형 프레임이 붕괴할 것이다. 그러나 당선이 안된다하더라도 미국은 장기적으로 트럼프의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세계를 향해 활짝 열렸던 문은 차츰 닫혀갈 것이다. 벽을 치고 담을 쌓을 것이다. 제국의 활력 또한 현저히 줄어들어갈 것이다. 자연스레 대서양과 태평양과도 멀어져갈 것이다. 미국의 위상 저하와 함께 민주주의 또한 쇠락해 갈 것이다.
한 시대의 지배 이념은 패권국의 이념이라 했다. 2076년이면 미국 건국 300주년이 된다. 세 번의 100년을 온전히 나는 나라가 거의 없음이 역사의 증언이다. 신대륙도 예외는 아니지 싶다. 미국의 쇠락과 더불어 '진보'라는 근대의 신화 또한 퇴화해갈 것이다. 아메리카의 새 문명이 회군하면서, 유라시아의 옛 문명들이 回生(회생)할 것이다.
200년 전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나폴레옹을 가리켜 '시대정신'이라 했다. '문제적 개인'이라고도 했다. 그를 흉내 내어 트럼프를 21세기 미국의 시대정신을 담지한 문제적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헤겔이 나폴레옹에게서 '시대정신'을 보았을 때, 미국을 직접 견문하며 민주주의를 살핀 이가 프랑스의 청년 귀족 토크빌이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출간한 것이 1835년이다. 건국 70여년, 파릇파릇한 미국을 관찰했다. 그럼에도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선동하지는 않았다. 그는 반신반의했다. 득과 실을 고루 따졌다. 밝음과 어둠을 함께 살폈다. 특유의 균형감각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를 책을 썼다.
토크빌이 21세기를 산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인도라고 생각한다. 건국(1947년) 7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가 인도이다. 미국부터 40개 민주주의 국가들을 합해야 인도의 규모에 이르게 된다. 민주주의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21세기는 어떤 방향으로 흐를 것인가? 인도에서 결판날 것이다. 북아메리카보다는 남유라시아를 주목해야 한다. <인도의 민주주의>를 써야할 시점이다. 과연 거대한 변화가 진행 중이었다. 인도로 간다.
민주주의민족동맹(NLD) 당사의 풍경 하나가 떠오른다. 아웅산 수치의 사진이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사진이 조그맣게 붙어 있었다. 2008년 젊고 싱싱한 모습이었다. 그새 희끗희끗 머리칼이 많이 새었다. 한 나라의 집권당을 목전에 둔 정당 사무실에 미국 대통령 사진이라. 마땅치 않았지만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사진으로 담을까 하다가 셔터를 누르지도 않았다. 자칫 침소봉대가 될 수 있었다. 'HOPE', 'CHANGE', 'Yes, We can' 등 당시의 희망찬 구호들은 민주화 시대로 진입하는 NLD의 다짐으로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 오바마는 2012년 미얀마를 방문하여 수치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미국의 소프트파워, 매력 공세를 펼쳤다.
잊고 있던 그 사진을 다시 떠올린 것은 미국의 시사지 <애틀랜틱(The Atlantic)>에 실린 '오바마 독트린(The Obama Doctrine)'을 읽으면서다. 3월 중순, 온라인 판이 공개되었다. 퇴임을 앞두고 그의 외교 정책을 회고하는 인터뷰였다. 분량이 매우 길다. 이 잡지의 지난 10년 기사 가운데 가장 길지 싶다. 정리가 잘된 것 같지도 않다. 다소 산만하다.
편집자도 그렇게 느낀 모양이다. 기사 말미에 핵심을 요약하는 친절을 베풀었다. 내가 더 줄이면 이러하다. '중동은 더 이상 미국에 가장 중요한 지역이 아니다. (동)아시아가 가장 중요하다. 중동에 관여를 계속해도 사태가 개선되기는 힘들다. 미국의 패권을 감소시킬 뿐이다. 세계는 미국의 패권 저하를 바라지 않는다.' 고로 미국은 중동에서 발을 빼야한다는 뜻이렸다.
이 기사가 공개된 직후,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시리아에 파병한 러시아군을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9.11 이후 군사 개입에 거듭 실패한 미국과 견주어 러시아는 불과 반년 만에 시리아의 (일시적인) 안정을 이루었다. 21세기 첫 15년간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쏟아 부은 비용이 1.6조 달러(비공식 통계로는 6조 달러)이다.
그럼에도 이라크는 IS(이슬람국가)가,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이 장악해가고 있다. 반면 러시아의 시리아 진출은 5억 달러에 그쳤다. 3000배, 혹은 8000배의 차이이다. 러시아는 시리아 사태 해결을 발판으로 이란, 이라크, 레바논, 이집트 등 중동 전역에 영향력을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관여 축소와 러시아의 개입 확대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서유라시아에 새판이 짜여간다.
인터뷰를 다른 식으로 독해할 수도 있다. 오바마는 지난 7년간 군산 복합체와 얼마나 치열하게 각투(혹은 암투)해왔는지를 은근하게 드러낸다. 군산 복합체는 군부와 군수 산업계 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정보 기관, 첩보 기관, 금융 기관에 언론계와 학술계, 시민 단체까지 망라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군산학 복합체'이다. 미국의 호전적 정책에 편승하여 실리를 취하는 이익 집단이다. 오바마는 워싱턴의 '외교 안보 전문가'들이 거듭 잘못된 훈수를 두었다고 역정을 낸다. 군산학 복합체의 이익에 복무하며 대통령의 의지를 꺾으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은 베트남 전쟁부터 그러했다. 존 F. 케네디와 힌든 존슨은 동남아의 정글에 개입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려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그릇된 판단을 유도하는 이들이 백악관 안팎에 포진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굴기하여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통해 성장하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항구적인 전시 체제를 기획한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것이다.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미국의 신뢰성(credibility)이다. 당장 이익이 아니더라도, 혹은 그 기회비용이 높다 하더라도, 미국의 위신에 손상이 가는 일에는 적극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동맹국과 적대국 및 전 세계에 잘못된 신호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국의 책무'라고 말할 것이다.
오바마는 이의를 제기한다. '제국의 고충'을 덜어내자고 한다. '세계의 경찰' 노릇과 일정한 거리를 두자는 것이다. 그래서 시리아 사태에 무력행사를 거부하고, 남중국해에서도 실질적인 군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랜 적성국이었던 이란과는 화해하고, 쿠바는 직접 방문했다. 그의 진지한 고뇌에 일정하게 공감한다. 문제는 그가 곧 퇴임한다는 것이다. 후임자는 어떠할 것인가?
내부자와 외부자
하나의 유령이 미국을 떠돌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유령이. 11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상당하다. 이 말에는 다소간 어폐가 있다. 그가 유력한 후보가 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미국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우려하고 있는지를 깐깐하게 따져볼 필요성이 생긴다.
올해 미국 대선은 9.11 이후 16년, 뉴욕발 금융 위기 이후 8년, 21세기 초 미국의 중간 결산 격이다. 가장 큰 특징은 미국 정치를 규정했던 양당 과점제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에서는 버니 샌더스가, 공화당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당내 주류 세력을 위협한다. 20세기형 정당 정치, 보수 대 진보라는 구도가 깨지고 있는 것이다. 엘리트 대 풀뿌리, 내부자 대 외부자의 새 구도로 재편되었다.
여전히 20세기의 시각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자칭 민주 개혁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동일한 현상도 다르게 해석한다. 샌더스의 활약에서는 미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추키고, 트럼프의 약진에서는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짚는다. 제 눈에 안경이고, 제 논에 물대기이다. 정파적 사고의 병폐가 몹시 깊다.
오히려 트럼프 현상이야말로 '참여 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에 가깝다. 기층의 바람몰이로 엘리트 정당 정치를 뒤흔들고 있다. 공화당-민주당의 양당 과두제에 도전하는 '민주적 열정의 표출'이다. 신자유주의(민주당)와 신보수주의(공화당)의 적대적 공존에 균열을 내는 '신민주주의'의 물결이다.
이 '새 정치'로 말미암아 거대 양당 구조의 실상 또한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다. 공화당 주류파에서 트럼프보다는 차라리 힐러리를 지지하겠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들린다. 억만장자 트럼프는 군수 기업과 금융계의 지원이 필요 없다. 자본의 입김에서 홀연 자유롭다. 민주당 및 공화당과 유착되어 상징 자본을 누려왔던 주류 언론과 주류 지식인들도 힐러리 지지로 합세하는 모양새다. 그들이 펜대를 굴리고 세치 혀를 놀림으로써 관리할 수 있는 인물이 힐러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들과 '말이 통하는 사람', 이른바 내부자이다.
따라서 샌더스를 지지했던 표가 힐러리로 옮아갈 지 미지수이다. 공화당 대 민주당, 보수 대 진보라는 20세기형 구도가 지속된다면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내부자 대 외부자, 엘리트 대 풀뿌리의 구도라면 어찌될 것인가.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힐러리를 '극혐'한다. 그녀가 진보적이라서가 아니다. 주류 엘리트이기 때문이다. 균열선은 좌/우가 아니라 내/외로 그어졌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라는 아웃사이더 샌더스에 더 호감을 가지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네오콘과 월가가 힐러리를 더 선호한다는 사실이 확연해질수록 샌더스를 지지했던 표심도 흔들릴 공산이 크다. 힐러리보다는 트럼프로 갈아탈 수도 있지 않을까? 힐러리의 당선은 미국의 현상 유지에 그친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명예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남편과 현직 대통령과 양당의 전임 대통령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세기의 연장선, 쇼는 계속될 것이다. 반면 트럼프의 당선은 긍/부정을 아울러 미국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이념적 지향에서 양 극단을 달리는 샌더스와 트럼프가 외교 정책에서는 수렴되고 있음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둘 다 오바마가 지적했던 워싱턴의 파워 엘리트들과 단절되어 있다. 주요 싱크 탱크의 유명 인사들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는다. 더 중요하게는 두 사람 모두 적극적인 대외정책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트럼프의 모자에 새겨진 "Make America Great Again"을 오독하지 말아야 한다.
그(와 지지자)가 꿈꾸는 위대한 미국은 순전히 아메리카 안에서의 일이다. 남 나라 사정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에게 위대한 미국이란 워싱턴과 뉴욕과 할리우드의 글로벌 엘리트가 좌지우지하는 미국화된 세계가 아니다. 보통 사람들도 열심히 일하면 더 나은 삶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19세기와 20세기의 미국을 향수한다. 토박이들, 토착파들, 전통파들, 반세계화주의자들이다. 미국(만)을 사랑하는 백인 청교도들이다.
트럼프는 오바마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동맹국에 대한 관여마저 뜨악하다. 미국의 동맹국을 보호하는 것이 미국의 핵심 이익이라는 '교조'에서 벗어났다. 대신에 미국의 보호에 대한 비용을 더 지불하라고 한다. 지불할 수 없다면 떠나겠다고 으름장이다. 즉, 트럼프가 미국의 안과 밖으로 발신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미국을 내버려둬라, 우리도 너희를 내버려두겠다.(Leave America alone, and We will leave you alone.) 마침내 미국서도 국가 간 체제의 제1원칙에 충실한 정치인이 등장한 것이다. 상호 내정 불간섭이다. 그래서 냉전기 제국과 속국의 비대칭적 교환으로 작동했던 '미국식 조공체제'를 파기하려 든다. 늦은 탈냉전의 조짐이다.
오늘의 미국은 더 이상 20세기의 미국이 아니다. 우리도 고달프고, 너네도 불만인 '가치 동맹'(=십자군적 세계관의 근대화)일랑 마침표를 찍자는 것이다. 트럼프는 민주주의를 유일 사상으로 섬기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다. 전 세계를 민주화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근대의 선교사도 아니다. 사업가이다. 손익을 따진다. 수지가 맞지 않으면 접는 편이 득이라고 생각한다. 기업가적 합리성으로 미국의 현재를 꽤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분수와 처지를 제대로 꿰고 있다.
국제주의와 제국주의
트럼프를 가리켜 '고립주의'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 반대편에는 '국제주의'를 세운다. 노련하고 노회한 프레임 짜기이다. 폐쇄적인 고립주의보다는 국제주의가 한결 진취적으로 보인다. 기만적인 말장난이다. 9.11 이후 16년, 줄곧 '국제주의'가 가동되었다. 아프가니스탄부터 리비아까지, 중동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국제주의보다는 호전주의가 正名(정명)에 더 가까울 것이다. 혹은 제국주의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성 싶다.
국제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 힐러리이다. 한때는 영부인으로, 한창 때는 국무부 장관으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민주주의와 자유와 평등, 인권을 매우 중시하는 진보파이기도 하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자 하는 열렬한 호전주의자이기도 하다. 이라크와 이란에 가장 적대적인 인물이 힐러리였다. 장관으로 실적도 거두었다. 리비아의 카다피를 제거했다. 북아프리카의 독재자를 사살함으로써 IS가 창궐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민주주의 근본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의 악순환을 한층 악화시킨 장본인이 그녀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고 했다. 서늘한 진실을 담고 있는 격언이다. 자유민주주의 이외의 어떠한 이념과 체제도 승인하지 않는 이들이 현대 세계의 가장 과격한 근본주의자들이다. 사회주의와의 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자기 교정과 자기 성찰 능력도 상실했다. 그 안하무인으로 탈냉전 이후의 세계를 테러와 난민의 세기로 만든 것이다.
힐러리가 대통령이 된다면 풀뿌리 민주주의 세력은 (좌/우를 막론하고) 실망할 것이다. 군산 복합체는 환영할 것이다. 그녀의 신념을 발판삼아 재차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국제주의'의 다음 불장난은 중동보다는 동아시아가 될 공산이 크다.
파시스트와 리얼리스트
'트럼프 대통령' 저지를 선도하고 있는 공화당 주류 인사들이 파시즘을 우려한다. 부시 정부 아래서 활개 쳤던 인사들이 뻔뻔하게 그런 주장을 편다. 듣자니 민망하다. 정보 조작과 대중 선동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불구의 나라로 만든 주역들이다. 트럼프가 그들의 기득권을 흔들자 돌연 파시즘을 걱정하는 시늉을 내는 것이다. 후안무치하다. 현대 정치인의 기본 자질을 갖추었다.
트럼프야말로 아프간과 이라크 '침공'을 비판하고 있다. 금기였던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시비조다. 중동 평화에 기여하지 않고 호전적 태도를 일삼는다며 비난을 퍼붓는다. 오바마처럼 돌려 말하지 않고 돌직구를 던진다.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기상이 용맹하다. 물론 무슬림과 히스패닉과 여성과 소수자들에 대한 그의 발언은 끔찍하다. 도가 지나치다.
하지만 덜 세련되고 덜 정련되었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을 때, 힐러리는 흑인 청년들을 약탈자(super-predators)라고 경멸하여 곤욕을 치른바 있다. 힐러리가 더 빼어난 것은 미디어 앞에서의 연출과 연기에 능수능란하다는 점이다. 세련되고 모던한 정치인이다. 가면극에 탁월하다.
트럼프는 일견 인종 차별주의자로 보이지만, 그가 제출하고 있는 국제 전략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미국에 직접적인 안보 위협을 가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한다며 남의 나라에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라크의 후세인과 리비아의 카다피가 있는 편이 중동 안정에 더 이로웠다고도 한다. 외국의 독재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시장을 개방시켜 경제 발전을 유도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도 한다. '정경분리', '先經後政'(선견후정)에 가깝다. 그는 담대한 아이디얼리스트가 아니다. 철저하게 계산적인 리얼리스트이다.
리얼리스트는 미국 외교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민주화'를 표방하며 실패를 반복하는 호전파의 대척점에 자리한다. 가장 유명한 이로는 닉슨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 헨리 키신저를 꼽을 수 있다. 베트남전쟁의 수렁에서 미국을 구해내기 위하여 중국과의 화해를 도모했다. 공산주의 확산 저지를 명분으로 전쟁을 지속하기보다는 중국공산당과 손을 잡음으로써 탈냉전을 견인했다.
트럼프도 엇비슷하다. 그는 강력한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는 비록 민주적이지 않더라도 필요악으로 인정한다. 유독 푸틴을 높이 사는 이유이다. 미국이 푸틴을 적대시할수록 중국과 러시아가 결속하여 미국에 대항한다며, 러시아와의 화해가 필요하다는 실용적인 판단도 내린다. 응당 우크라이나에서 '민주화'를 선동하기보다는 유럽의 문제는 유럽에 맡기자고 한다. 냉전의 유산인 NATO에도 부정적이다. 이 모든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는 죄다 외면하고 돌출발언만을 부각시켜 파시스트로 낙인찍는 것 또한 민주 개혁 진영의 커다란 편견이며 편향일 것이다.
<1984>
나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유명한 사람보다는 유능한 인물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유능한 이보다는 유덕한 사람이 최고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德(덕)을 쌓은 사람이 福(복)을 베풀 수 있다. 인간은 논리로 설득되지 않는다. 솔선수범하여 감화시키고 감득시켜야 한다. 이성적 토론을 통한 합리적인 의사 결정? 민주주의의 이상은 근대의 신화이다.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계몽주의적 오해 위해 세워진 모래성 같은 제도이다.
트럼프 현상 또한 민주주의가 쇠퇴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가면 아래 민낯이다. 100년도 안 된 이 새파란 제도는 20세기 후반 줄곧 오작동 했다. 당장 세계 지도를 펼치고 민주주의 국가들을 살펴보기를 바란다. 그 중 훌륭한 거버넌스를 갖춘 국가가 얼마나 되는지 따져보기 바란다. 열손가락 꼽기도 쉽지 않다.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주어도 1할이 채 안 된다. 공시적으로도, 통시적으로도 미심쩍은 제도이다. 그럼에도 외면하고 간과했을 뿐이다. 고도성장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의 풍요가 민주주의의 실상을 가렸던 것이다.
나는 1인 1표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가 화석 연료 시대의 예외적인 정치 제도였다는 생각을 점점 굳혀가고 있다. 아테네에서 반짝했다가 2000년이 넘도록 부정당하고 기각되었던 제도가 (일시적으로) 부활한 마법의 비결에도 지하자원의 남용이 있었다고 여긴다. 인간 사회에 과도한 에너지가 일시에 투입되면서 그 무질서(자유 상태)를 제도적으로 흡수하는 정치형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성립 과정과 석탄과 석유의 발견 과정, 그리고 민주주의를 유일 신앙으로 삼는 학문과 사상의 확립 과정은 중동과 유럽으로 서진하면서 차차 살펴갈 작정이다.
즉 20세기의 번영은 석탄과 석유를 때우며 이룬 것이지, '각성한 노동자', '깨어있는 시민'들의 집합적 의지로 성취한 것이 아니었던 듯하다. 민주주의는 인민들의 붉은 피가 아니라 땅 밑의 검은 기름을 먹고 피어났던 것이다. 헌데 그 지하자원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저성장 혹은 성장 없는 살림살이가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아버지만큼 잘 사는 아들이 나오기 힘든 시대로 진입한다. 20세기만큼 풍요로운 세기 또한 도래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연 상태'로 되돌아간다.
그럴수록 민주주의의 오작동은 더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다. '인간 해방'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자원이 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욕망의 절제를 미덕으로 삼고, '자유인'을 동경하기보다는 聖人(성인)을 존경했던 정치문화가 재차 기지개를 펼 것이다. 인권(Human Right)을 내세우기보다는 人性(인성) 도야가 강조될 것이다.
독일의 유력지 <슈피겔>은 트럼프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지목했다. 옳은 말씀이다. 근대의 마지막 신화, '민주주의 근본주의'를 근저에서 허물고 있는 이단이기 때문이다. 서둘러 봉합하려 든다. <뉴욕타임스>, <르몽드>, <가디언>, <슈피겔>, <아사히신문>, <한겨레> 등 각국의 민주와 진보를 상징하는 언론들도 대동소이하다. 혹시 이들이야말로 '민주주의 근본주의'를 사수하는 최후의 프로파간다 기구는 아닐까. '새 정치'의 출현을 가로막고 있는 <1984>의 빅브라더(Big Brother)일 수 있다.
미얀마에서 식민 경찰로 한 때를 보내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가 조지 오웰이었다. 미얀마에서는 농반진반으로 '1984년의 미얀마'를 예측한 예언서라며 <1984>를 높이 산다. 그런 구석이 크다. 그런데 그뿐일까. 오웰은 미얀마에서 영국의 '문명화 사업'에 환멸과 염증을 느꼈다. 기만적인 '백인의 책무'에 구역질을 했다. 그래서 제국의 옷을 벗고 펜을 들었던 것이다. 제국주의의 본질을 직시한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도 투신했다.
따라서 <1984>를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은유만으로 읽어내는 것도 '냉전적 독해'에 그친다. 그 반대편 민주주의 사회는 얼마나 달랐던 것일까? 그런 의심과 회의 자체가 원천 봉쇄되어 있다는 점에서 '1984'의 가공할 상태와 유사하지 않은가. 19세기 영국의 문명화 사업과 20세기 미국의 민주화 사업은 연속적인 것이다. 빅브라더가 진화한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밖을 상상하지 못한다. 고작 다시 민주주의, 더더 민주주의이다.
11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사상 해방'은 폭발할 것이다. 20세기 전반의 파시즘과 20세기 후반의 공산주의를 '전체주의'로 묶고, 그 맞은편에 민주주의를 세웠던 20세기형 프레임이 붕괴할 것이다. 그러나 당선이 안된다하더라도 미국은 장기적으로 트럼프의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세계를 향해 활짝 열렸던 문은 차츰 닫혀갈 것이다. 벽을 치고 담을 쌓을 것이다. 제국의 활력 또한 현저히 줄어들어갈 것이다. 자연스레 대서양과 태평양과도 멀어져갈 것이다. 미국의 위상 저하와 함께 민주주의 또한 쇠락해 갈 것이다.
한 시대의 지배 이념은 패권국의 이념이라 했다. 2076년이면 미국 건국 300주년이 된다. 세 번의 100년을 온전히 나는 나라가 거의 없음이 역사의 증언이다. 신대륙도 예외는 아니지 싶다. 미국의 쇠락과 더불어 '진보'라는 근대의 신화 또한 퇴화해갈 것이다. 아메리카의 새 문명이 회군하면서, 유라시아의 옛 문명들이 回生(회생)할 것이다.
200년 전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나폴레옹을 가리켜 '시대정신'이라 했다. '문제적 개인'이라고도 했다. 그를 흉내 내어 트럼프를 21세기 미국의 시대정신을 담지한 문제적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헤겔이 나폴레옹에게서 '시대정신'을 보았을 때, 미국을 직접 견문하며 민주주의를 살핀 이가 프랑스의 청년 귀족 토크빌이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출간한 것이 1835년이다. 건국 70여년, 파릇파릇한 미국을 관찰했다. 그럼에도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선동하지는 않았다. 그는 반신반의했다. 득과 실을 고루 따졌다. 밝음과 어둠을 함께 살폈다. 특유의 균형감각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를 책을 썼다.
토크빌이 21세기를 산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인도라고 생각한다. 건국(1947년) 7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가 인도이다. 미국부터 40개 민주주의 국가들을 합해야 인도의 규모에 이르게 된다. 민주주의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21세기는 어떤 방향으로 흐를 것인가? 인도에서 결판날 것이다. 북아메리카보다는 남유라시아를 주목해야 한다. <인도의 민주주의>를 써야할 시점이다. 과연 거대한 변화가 진행 중이었다. 인도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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