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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September 16, 2016

창살 없는 감옥 ‘남조선’, 그녀는 도망치고 싶다 [인터뷰] 北 송환 투쟁 중인 ‘타의적 탈북자’ 김련희

약 6년 전이었던가. 북녘 땅에서 어렵게 여권을 받게 된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마냥 설레었다. 아마 그것이 그녀가 느꼈던 마지막 행복이었을 것이다. 그 꿈이 지금 닥친 불행의 전조가 될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한국이라는 땅은 그녀에게 창살 없는 감옥이다. 5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는 탈출 시도는 번번이 좌절됐다.
김련희(48)씨는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탈북자’ 신분이다. 그러나 그녀는 ‘탈북자’가 아니다.
원래 그녀는 김책공업종합대학병원 의사인 남편, 딸과 함께 평양에서 조그만 아파트에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1년 초 갑자기 간경화를 앓게 됐다. 치료를 받긴 했지만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몸을 가눌 수 있게 됐을 무렵이었을까. 한참 전 신청했던 여권이 발급됐다. 생애 첫 해외여행의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중국에 있던 사촌언니 집에 머무르며 여행과 치료를 병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떠나기 전에 간경화가 심하게 오는 바람에 6개월 동안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었어요.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있다가 어느 정도 호전이 됐어요 그래서 두달 짜리 자유여행 자격으로 중국을 가게 됐죠. 북조선에서 해외여행은 남조선에서처럼 자유롭진 않아요. 여권 발급 조건이 꽤 엄격하지요. 그래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어요. 병도 호전이 돼서 무사히 다녀올 줄 알았는데 막상 갔더니 더 악화됐어요.”
탈북 브로커와의 잘못된 만남
그렇게 생애 처음으로 해외로 나갈 수 있게 됐지만 가자마자 난관에 봉착했다. 생활 환경이 달라진 탓에 간경화가 악화된 것이다. 그때부터 여행은커녕 중국에 있는 병원에 다니며 병치레하는 신세가 됐다.
“북조선처럼 무상의료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국도 사회주의 국가라 병원비가 쌀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장기간 치료하기엔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어요. 사촌언니에게 부담을 주기가 미안해서 여기서 더 이상 치료를 받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녀는 병원 치료와 귀국 사이에서 고민했다. 중국에서 계속 치료를 하기엔 돈 문제가 걸렸고, 북에 돌아가 치료를 받는다고 더 나아질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중국에서 직접 돈을 벌어 치료비를 충당하기로 마음먹었다.
“중국에서 몇 달 정도 돈을 벌어서 치료를 받고 싶었어요. 그래서 평양에서 중국으로 넘어갔을 때 알게 된 사람한테 일자리를 알아봐줄 수 있냐고 부탁을 했지요. 그땐 몰랐는데 그 사람이 탈북 브로커였어요. 북에서 정식 여권으로 입국하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브로커들이 일일이 입국자들을 체크하더라고요. 저 같은 사람들이 입국하자마자 친절하게 목적지까지 차표도 끊어주고 식사 대접도 하면서 친절하게 접근을 해요. 조선말을 잘 쓰니깐 같은 동포라서 잘 해주나 싶었죠. 그래서 별다른 의심 없이 일자리를 알아봐달라는 부탁까지 하게 됐지요.”
그것이 화근이었다. 브로커는 그녀에게 다소 엉뚱한 제안을 했다. 한국으로의 밀항이었다. 한국에서 한두 달만 일해도 중국에서 치료받을 정도로 넉넉하게 돈을 벌어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브로커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당신 바보냐. 중국 사람들도 남조선 가서 돈 벌어온다’고. 고난의 행군 때 국경에 있던 사람들이 밀항으로 중국에 드나들면서 돈을 벌어오곤 했거든요. 그런 식으로 밀항으로 남조선에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불법이라 당국에서 알기라도 하면 큰 죗값을 치러야 했어요. 그래도 그땐 ‘남조선이 무섭다’, ‘처벌이 무섭다’ 이런 생각보다 빨리 돈을 벌어서 치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우선이었어요.”
그렇게 그녀는 밀항선에 몸을 실었다.
밀항선이 아니라 탈북선이었다
브로커와 함께 심양에서 밀항선을 기다렸다. 그곳엔 7~8명 정도가 한국으로 가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북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 김련희(48)씨.
북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 김련희(48)씨.ⓒ김련희 제공
“그때까지만 해도 그 사람들이 탈북자인 줄 몰랐어요. 어떤 사람은 중국말을 워낙 잘해서 한국 가서 돈 벌어오려는 중국사람인 줄 알았어요. 조선말을 하는 사람도 있어서 나랑 비슷한 처지인 줄 알았지요.”
일행들과 대화를 나누던 김련희는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자연스럽게 각자의 사연을 이야기하다가 전부 탈북하려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았어요. 나만 남조선에 가는 이유가 달랐던 거였지요. 내 이야기를 듣더니 다들 ‘정신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저 배를 타게 되면 태국에 들렀다 남조선에 가는 것까지 2~3개월이 걸리고, 국정원, 하나원 거쳐서 여섯달이 넘어야 나올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국정원이니 하나원이니 무슨 말인 줄 그때까지는 전혀 몰랐지만, ‘꼼짝없이 남조선에 고립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곧바로 들었지요. 속았다고 생각했어요. 평생 가족들을 못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자신을 데려온 의문의 사나이에게 여권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하지만 이미 여권은 브로커를 통해 한국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김련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 강제적으로 태국으로 간 이후부터는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꼼짝없이 한국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었다.
“그때부터는 남조선에 간 이후의 방법을 고민하게 됐어요. 남조선에서 북조선으로 올라온 비전향장기수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나도 그런 식으로 다시 송환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한국에 가서 솔직한 사정을 이야기해서 다시 돌려보내달라고 요구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요. 남조선에 오자마자 국정원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가 저를 태워갔어요. 국정원에 가자마자 말을 했어요. ‘난 올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속아서 왔다’고.”
그녀의 읍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기획탈북이든 브로커의 실수였든 탈북자 중 한명이 송환을 요구한다는 이야기가 밖으로 흘러들어가봐야 자신들에게 득 될 것이 없었다. 그때부터 국정원의 회유와 협박이 시작됐다.
“처음엔 국정원에서 그러더라고요. ‘북으로 돌아가봐야 역적으로 몰려 죽을텐데 그렇게 되도록 할 수 없다’고. 마치 나를 위하는 것처럼 회유하더라고요. 그런 말이 전혀 귀에 안 들어왔어요. ‘죽어도 내 가족들 있는 데서 죽겠다. 내가 여기서 살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한달 동안 단식하면서 송환 요구를 했어요. 그럴수록 국정원에선 더 강하게 나왔어요. 여기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겠다는 서약서를 쓰지 않으면 국정원에서도 단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고 협박하더군요. ‘여기서 죽어도 아무도 모른다. 살고 싶으면 서약서를 쓰라’는 식이었어요.”
몇 번의 자살 시도…‘셀프간첩’ 자처하기도
국정원과 하나원을 거쳐 그녀는 사회에 나왔다. 말이 사회지 일종의 보호관찰이었다. 경찰들이 수시로 집에 드나들었고 실시간으로 연락하면서 그녀의 거취를 확인했다. 그녀에게 한국은 자유로운 나라가 아니었다. 물론 이곳에서의 자유를 꿈꾼 적도 없었지만.
하나원에서 나와서도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마음 뿐이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하나원에서 나가면 여권이 나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여권을 받고 중국으로 가서 북조선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6개월을 버티고 나가서 여권을 신청했는데 같이 온 사람들 중에 나만 여권 발급이 불가능한 인물로 분류돼 있다고 하더라고요.”
한국땅에서의 합법적인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탈북자들을 통해서 브로커를 소개받아서 밀항을 도모했어요. 그런데 이 사회에서 뭔가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더라고요. 밀항까지 2천만원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주위에 아는 사람이라곤 경찰밖에 없는데 돈을 빌릴 만한 사람도 없었지요. 조금 더 싸게 위조여권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해서 그것도 알아봤는데, 그 과정에서 경찰에 발각돼서 조사를 받게 됐어요.”
점점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렇다고 한국 땅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결국 그녀는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
“절망 속에서 수면제를 먹었어요. 그때가 2013년이었어요. 어쩌다 의식을 찾게 돼서 병원 신세를 지게 됐지요. 중독 후유증이라고 해서 20일 동안 하반신 마비 상태로 휠체어를 타고 다녔어요. 그러다가 퇴원을 했는데 죽지 못하고 살아나온 사실이 너무 저주스러웠어요. 그래서 바로 다음날 동맥을 끊었어요. 그것조차 제대로 안 되더군요. 다시 병원에 실려가서 수술을 받고 살아났어요. 집에 들어가서 불이 안 켜지니깐 경찰이 올라와서 제 상태를 확인하고 구급차 불러서 병원에 보낸거지요. 살아났는데도 경찰들 감시에 숨이 막혀서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완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로 고향으로 돌아가길 학수고대하던 그녀는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을 접하게 됐다.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이 ‘강제추방’이었다.
“탈북자들의 정보를 북조선에 넘기는 간첩 임무를 수행했다고 하면 재판에서 유죄를 받고 간첩으로 강제추방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알고 있던 탈북자 17명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적어서 그 정보를 갖고 경북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에 전화를 했어요. ‘북에다가 넘길 정보를 수집했다. 그걸 넘기기 전에 내 행동을 멈추게 해달라’고 말했어요. 직접 간첩이라고 자수를 했는데도 열흘이 넘도록 나를 안 잡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전화를 해서 경찰에게 만나자고 했어요. 그래서 한마디로 ‘셀프간첩’이 돼서 재판을 받았는데 집행유예가 나왔지요.”
고난 끝에 만나게 된 민변 변호사들…끝나지 않은 송환 투쟁
‘셀프간첩’ 사건을 계기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의 장경욱 변호사를 만나게 됐다.
“집행유예를 받고 나왔는데 장 변호사가 찾아왔더라고요. ‘당신은 간첩이 아닌데 왜 간첩이라고 하는 것이냐’고 묻더라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난 민변에 대해 전혀 몰랐고, 강제추방이 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계속 간첩이라고 우겼지요.”
그렇게 한달이 지났지만, 자력으로는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장 변호사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렇게 그녀의 이야기는 세상에 처음 알려지게 됐다. 그때가 작년 7월이었다.
그녀는 지난 4월 집단입국한 북한식당 종업원들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다. 그들이 자신과 같은 처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다고 했다. 여전히 그들이 자의적으로 한국에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내가 국정원 요원들한테 매달려서 제발 북으로 돌려보내달라고 해도 이 사회에서 내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전 류경식당 종업원들이 만약 자의적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면 그 아이들을 만나서 꼭 말해주고 싶어요. ‘애들아, 세상은 너희 편이다. 절대 겁먹지 말고 싸우라’고.
그녀는 이제 민변의 도움을 받아 정부 당국을 상대로 북 송환을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한국 땅에서 살라는 당국의 회유는 여전하다.
“통일부 정책지원과장이라는 사람과 면담을 한 적이 있어요. 나더러 여기서 살겠다고 하면 최대한 지원을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되물었어요.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부모 자식을 팔 수 있겠느냐. 천륜 앞에서 어떻게 돈 이야기를 꺼낼 수가 있느냐’고. 억만금을 받고 유복한 생활을 하는 게 내 목적이 아니에요. 조국과 가족 없이는 어떤 것도 의미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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