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광화문캠핑촌 송경동 시인
13일 오전 함박눈이 내리는 서울 광화문광장에 선 송경동 시인. 그는 이곳 ‘박근혜퇴진을 위한 문화예술인 캠핑촌’에서 지난해 11월 이후 노숙하고 있다. 그는 “87년 항쟁의 명동성당, 5·18의 전남도청, 2011년 미국 뉴욕 주코티공원의 ‘오큐파이 운동’처럼 지속적인 저항의 공간이 필요하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13일 오전 함박눈이 내리는 서울 광화문광장에 선 송경동 시인. 그는 이곳 ‘박근혜퇴진을 위한 문화예술인 캠핑촌’에서 지난해 11월 이후 노숙하고 있다. 그는 “87년 항쟁의 명동성당, 5·18의 전남도청, 2011년 미국 뉴욕 주코티공원의 ‘오큐파이 운동’처럼 지속적인 저항의 공간이 필요하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지난 4년간 국민의 애환과 기쁨을 같이 나누었던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이곳 감옥으로 온 지도 어언 백일이 지났습니다. … 저는 결코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건도 혼자 해먹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야말로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아닌가, 나처럼 돈 없는 사람만 처벌받는 이 세상이 그저 야속할 따름입니다. 대통령 해봐야 5년이면 끝이지만 저들에겐 임기 제한도 없습니다. 만약 이 사실을 안다면 지하에 계신 아버님조차 벌떡 일어나 내가 뭐 하러 대통령을 했나, 재벌을 할걸 자괴감에 빠지실 게 분명할 거란 생각입니다.”(박민규 기자. 소설가. <광장신문> 3호. 2016년 12월10일)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지난해 12월초, 서울 광화문광장에 뿌려진 <광장신문> 1면에는 쇠창살 아래 침통한 표정의 박근혜 얼굴을 합성한 사진이 실렸다. ‘나도 재벌 할걸…자괴감’이라는 헤드라인 밑으로 ‘본보, 박근혜 옥중편지 단독 입수’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광장신문>은 “시민의 꿈과 열망을 담아 가상으로 구성”한 기사를 발간하는 문화예술인들의 퍼포먼스 매체이다.
문화예술인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인 ‘박근혜 퇴진 광화문 캠핑촌’ 사람들은, 이렇게 가상의 광장신문을 내거나 정치 풍자 조형물을 설치하고, ‘하야하툅(Rock)’ 콘서트를 열고, 천막극장을 세워 공연도 준비한다. 광화문 한복판에 나지막한 움집처럼 작은 텐트를 잇대어 설치하고 비닐포장을 엉성하게 덧입힌 캠핑촌은, 기세등등한 권력자들의 턱밑에 살포시 들어선 ‘스머프 마을’처럼 맹랑하고 초현실적이다.
“엄마! 여기 최순실 있다!”
예닐곱살짜리 남자아이가 또르르 달려오며 소리쳤다. 오랏줄에 칭칭 감긴 박근혜와 재벌 총수들의 대형 흉상 옆으로 ‘광화문 구치소’라고 쓰인 설치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이를 뒤따라온 젊은 부부가, 감옥 속 인물 사진들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한마디 보탠다.
“여기, 괴물들 다 모였네.”
조형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아이 아빠에게 행여 방해가 될까, 카메라 뒤로 멀찍이 돌아서 한 남자가 우리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이날(2일)은 봄날처럼 푹한 날씨였는데도, 두터운 조끼와 패딩 점퍼, 솜바지를 겹겹이 껴입은 모습이 영락없는 노숙자의 행색이었다.
시인 송경동. 1967년 전남 벌교생. 여천 석유화학단지와 구로공단, 지하철 공사장에서 용접과 배관과 막노동을 하며 시를 배운 사람. ‘천상병 시문학상’(2010)과 ‘신동엽 창작상’(2011)을 수상하고, 지난해 한국작가회의에서 수여하는 ‘아름다운 작가상’을 수상한 문인. 광화문 캠핑촌 설치를 처음 제안한 사람으로, 그는 벌써 두 달 넘게 촛불광장을 밤낮으로 지키고 있다.
2016년이 저물고 2017년 새해가 밝아올 때에도 그는 광장을 떠나지 않았다. 촛불이 모두 흩어지고 난 새벽녘, 그는 어떤 생각을 하며 잠을 청할까? 빗물이 흐르는 보도블록 위로 얇은 베니어판 한 장 깔아놓고 옹송그리며 한뎃잠을 자는 동안, 그의 시린 뼈마디 위엔 어떤 시어가 새겨지고 있을까?
문화예술인·비정규노동자 모인
박근혜 퇴진 광화문캠핑촌
은박지 돗자리 깔린 텐트 안엔
누에고치 같은 침낭과 담요
전등도 탁자도 노트북도 없다
명동성당이나 오큐파이운동 같은
지속적 저항공간 필요했다
두달간 집엔 딱 한번
거리, 광장, 농성장에서 노숙하며
현장에서 시 쓴다
‘새마음애국퉤근혜자율청소봉사단’
“제 방 한번 보실랍니까?”
그가 자랑스럽게 안내한 그의 잠자리는 조금 특별했다. 일인용 텐트 바깥으로 스티로폼을 잇대어 사각의 구조물을 만들고 입구에는 미닫이문까지 해달았다. 목수 경력이 있어서 뚝딱 만들었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의기양양했다. 은박지 돗자리가 깔린 텐트 안에는 누에고치처럼 침낭과 담요가 돌돌 말려 있었다. 전등도 없고 탁자나 노트북도 없었다.
-식사나 세면은 어디서 하세요?
“모든 게 안 되는 공간이에요. 전기도 안 들어오는 암흑 세상인데요 뭐. 땅은 평당 1억원짜리인데 사회기반시설이 좀 부족합니다. 하하하….”
-캠핑촌을 만들자는 제안은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10월24일 <제이티비시>(JTBC) 보도를 보고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27일 동화면세점 앞에서 한 500명이 모여서 첫 집회랑 시위를 했어요. 며칠 지나면서 아무래도 좀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캠핑촌’ 제안을 하니, 사진가 노순택, 정택용, 판화가 이윤엽 같은 분들이 당장 보따리 싸서 나오겠다고 하더라고요. 블랙리스트에 항의하는 7500인 시국선언을 준비하던 ‘예술행동위원회’가 함께하겠다고 흔쾌히 결정을 해주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의 노동자들이 합류해서 11월4일 7500인 문화예술인 시국선언에 이어서 바로 연대농성에 들어갔지요.”
첫날은 텐트 20동을 몽땅 경찰에 빼앗기는 바람에, 하늘을 보며 한뎃잠을 잤다. 지금은 민예총, 문화연대, 여성영화인, 한국작가회의, 어린이책 작가모임, 전국풍물시국회의 등 문화예술인단체와 유성기업, 콜트콜텍, 쌍용차, 기륭전자, 현대차 직영 비정규직,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같은 노동자그룹이 입주해 있고, 음악인 손병휘, 문규현 신부 등 각계인사들까지 텐트 50여동이 들어서 있다.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세요?
“매일 아침 9시에 ‘촌민회의’가 열려요. 하루 일정 같은 걸 공유하고 마을 일들 점검하죠.”
-마을 일이라 함은….
“여기 캠핑촌을 우린 마을이라고 불러요.(웃음)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땐 마을총회를 소집해서 같이 의논하기도 하고요.”
-세면이나 식사는 여기서 못하죠?
“주변 건물에 가서 해결하죠. 점심 무렵엔 ‘새마음애국퉤근혜자율청소봉사단’이라고 해서,(웃음) 최태민이 했던 조직을 패러디해서, 새마을 모자 쓰고 빗자루 들고 한동안 청소도 다녔어요. 청와대 앞으로도 가고 총리공관 앞으로도 가고, ‘한국 사회의 쓰레기들 치우러, 재벌 청소도 가자!’ 해서 삼성 본사, 기아차 본사에도 다녀왔고요. 재벌 총수들이 국회 청문회 나왔을 땐 빗자루, 쓰레받기 들고 국회 갔다가 몽땅 끌려 나왔지만요.(웃음)”
12월6일 낮 12시, 청소봉사단이 국회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경찰들이 방패로 막아서며 이들을 끌어냈다. 10분 만에 쫓겨나온 청소봉사단은 굳게 닫힌 국회 정문 앞에서 빗자루를 치켜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여의도까지 출장봉사를 나왔으나, 아쉽게도 쓰레기는 수거하지 못했다.
‘맨 먼저 총 맞고 끌려가도 괜찮은가?’
-집에는 종종 들르세요?
“딱 한번 다녀왔어요. 아들 수능 보는 날.”
-저런… 두 달 동안 그날 한번 가고 못 갔다고요?
“아이가 고3이니 곁에라도 있어줘야 하는데. 제가 다른 건 못해도 집에선 ‘송 기사’거든요. 20년 된 중고차 한 대 사서 새벽마다 아이 태워다 주는 일을 했어요. 아무리 술 먹고 늦게 들어가도 그건 꼬박꼬박 했는데….(한숨)”
외아들 관호는 피아노를 전공했다. 없는 살림에 뒷바라지도 변변히 못했는데 예고에 합격하고 혼자서 음대 준비까지 하는 아들이 한없이 대견하고 자랑스럽지만, 중요한 시기에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니 미안할 뿐이다. 아들 얘기를 하며 마른 손으로 얼굴을 부빌 때, 송경동은 시인도 투사도 아닌, 그저 평범한 아버지의 표정이었다.
-처음 농성 시작할 때 이렇게 길어질 줄 아셨어요?
사실 장기적인 싸움이 될 거라고 첨부터 생각은 했어요. ‘광화문광장 프로젝트’를 하자고 할 때 저희가 생각한 건, 87년 항쟁에서 명동성당 같은 역할, 5·18 때 전남도청 같은 공간이 필요하단 거였어요. 2011년에 뉴욕 주코티공원에서 했던 오큐파이 운동처럼 지속적인 저항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2011년에 한진중공업 김진숙씨의 고공시위를 지지 방문하는 ‘희망버스’를 기획한 것 때문에 구속된 적 있으시죠? 이번엔 괜찮을까요?
“희망버스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아직 안 나왔어요. 근래 몇 개 재판이 끝나긴 했지만 세월호 관련 재판도 있었고요. 이번에 연행되면 영장 청구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 사실 저도 거동을 조심해야 하는데…. 이명박 정부 때부터 공개적인 장소에서 천막 치고 농성하는 건 거의 연행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근데, 왜 나오셨어요?
“저도 고민했어요. 박근혜 끌어내리겠다고 나오는 건데, 독재자가 호락호락 물러나는 경우는 없잖아요. 역사적 경험 속에서 보면 쿠데타나 계엄도 있을 수 있는 거고. 촛불집회 초기엔 그런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거든요. 만약 그런 경우엔 맨 먼저 총 맞아 죽어야 되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라면 먼저 끌려가거나 죽을 수도 있는 길인데, 그래도 좋은지, 나 자신한테 물어보고 나왔죠. 이번에 집 나오면서 신변정리 하고 왔어요. 다시 끌려갈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11월4일 그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원래 그날은, 파견노동을 주제로 한·일 변호사들의 합동 세미나에 초청을 받아 그가 일본으로 출국하기로 한 날이었다. 계류 중인 재판 때문에 해외여행이 쉽지 않아 관련 단체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단기 여권도 만들고, 내친김에 호젓한 자신만의 휴가를 가질 생각에 부풀어 여행가방도 다 싸놓았다. 그 가방을 메고 송경동은 인천공항 대신 광화문광장으로 달려왔다. 늘 그랬듯이 그는 이번에도 심장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나올 때 아드님한텐 얘기하셨어요?
“관호야, 미안한데 아빠가 좀 나가봐야 될 것 같다. 당분간 못 들어올 수도 있겠다, 하니까….”
-뭐라던가요?
“‘뭐, 맨날 그러잖아’ 하데요.(웃음) 그래서, ‘하여간 미안하고, 이번엔 아빠가 꼭! 박근혜 끌어내리고 들어올게, 좀 봐줘라’ 했지요. 하하하.”
송경동 시인이 안내한 그의 잠자리는 텐트 바깥으로 스티로폼을 잇대어 사각의 구조물을 만들고 입구에 미닫이문까지 해 달았다. 은박지 돗자리가 깔린 텐트 안에는 누에고치처럼 침낭과 담요가 돌돌 말려 있었다. 전등도 없고 탁자나 노트북도 없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송경동 시인이 안내한 그의 잠자리는 텐트 바깥으로 스티로폼을 잇대어 사각의 구조물을 만들고 입구에 미닫이문까지 해 달았다. 은박지 돗자리가 깔린 텐트 안에는 누에고치처럼 침낭과 담요가 돌돌 말려 있었다. 전등도 없고 탁자나 노트북도 없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노동문학이 사라져도 노동자의 삶은 그대로
길거리 구둣방 손님 없는 틈에
무뎌진 손톱을 가죽 자르는 쪽가위로 자르고 있는
사내의 뭉툭한 손을 훔쳐본다
그의 손톱 밑에 검은 시(詩)가 있다.
(송경동, <가두의 시> 중에서)
그는 거리에서, 광장에서, 농성장에서 일 년의 반을 살다시피 한다. 그에겐 따로 직함이 없다. 무슨 단체 대표도, 지부장도 아니고 그저 ‘시인’이다. 평택 대추리에서는 경찰이 던진 벽돌에 머리를 맞아 응급실에 실려 갔고,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포클레인에 올라 싸우다가 추락해 부상을 입었고, 희망버스를 기획해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을 돕다가 구속되어 3개월간 감옥에 있다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시인이다.
“나도/ 여느 시인들처럼/ 꽃을, 사랑을 노래하고 싶다/ 한 잔의 진한 커피/ 한 잔의 맑은 녹차와 어우러지는/ 양장본 속 아름다운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다”(<한미FTA는 내 시도 빼앗아간다> 중에서)고 낮게 읊조리면서도 그는 노숙을 밥 먹듯이 하고 투쟁 현장에서 시를 쓴다. 송경동은 시가 팔리지 않는 시대에 시인으로 살면서, 가장 인기 없고 하나도 달달할 것 없는 ‘노동’을 주제로 삼는다.
누굴 이롭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 한계와 모순,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투쟁한다
‘나’는 수많은 사람의
꿈과 열망이 엮여 만들어진 것
왜 이렇게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까
1%가 독점한 특권사회 용납 못해
질적 전환, 의제 확장 이뤄져야
누가 정권 잡느냐 중요치 않다
어떤 정책, 어떤 의제냐가 더 중요
-노동자로 살면서 시를 쓸 수는 있지만, 시인으로 살면서 노동에 대한 시를 쓴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노동자 출신 문인들은 명성을 얻으면 대개 중산층 지식인에 편입되어버리기 십상이니까요. ‘노동문학’은 90년대 이후로 거의 소멸했고 이제는 ‘철 지난 프로파간다 문학’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실 사회주의권이 패망한 이후에 노동문학이라는 이름은 문학잡지에서도 사라졌고 근 20년 동안 폐기된 주제 취급을 받아왔어요. 그런데 전 그럴 수 없었어요. 제 삶이 바뀌지 않았으니까요. 우리 사회에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들어섰지만 실제로 내가 현장에서 봤던 사람들의 삶은 뭐가 바뀌었지? 그 사람들이 느끼는 억압된 삶의 감정이 얼마나 풀어졌지? 그런데 이걸 포기해야 되나? 접어야 되나? 내가 소년원에서, 밑바닥 노동자 생활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만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변한 게 별로 없어요. 오히려 80년대 태동해서 90년대 초반까지 반짝했던 노동문학, 과도하게 정치화되었던 문학이, 이제는 평범하게 일하면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한층 깊어져야 할 때라고 봅니다.”
-시인이 되겠단 꿈은 언제부터 가진 거예요?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나요?
“전혀요. 가난한 집에 가정불화도 그치지 않는데다가 어려선 제가 심한 말더듬이여서 주위에서 놀림을 많이 당했어요. 공연히 자신을 학대하면서 위악적인 문제아로 지냈죠. 근데, 중2 국어시간에 ‘봄비’란 제목으로 시를 한 편 써내라는 숙제가 있었어요. 그땐 숙제 안 해 가면 때리잖아요?(웃음) 그래서 써 갔는데 국어선생님이 ‘송경동이 누구야? 넌 시를 정말 잘 쓰는구나’ 하신 거예요. 학교 다니면서 처음으로 들어본 공개적인 칭찬이었어요. ‘아, 나도 할 줄 아는 게 하나는 있는가 보다’ 했죠.”
-그럼 특별히 독서를 많이 한다거나 습작을 열심히 하는 문학소년은 아니었고요?
“아이고, 그런 거 없었어요. 문제적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주먹질하다가 소년원까지 갔는데요 뭐. 무협지, 만화책 같은 거나 읽었을까.(웃음) 책 외판원 하던 큰아버지가 강매로 떠넘기고 간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이 유일한 읽을거리였어요.”
그가 다시 문학에 뜻을 품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소년원에서 출소해서 밑바닥 노동자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새끼목수, 여천 석유화학단지 배관공, 일용직 잡부 등을 전전하다가 문학을 배워보겠다는 일념으로 돈 3만원을 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잡역부 노동자 숙소에서 생활하면서 한길사에서 운영하는 한국문학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문인들을 만났고, ‘구로노동자문학회’란 곳이 있단 소문을 듣고 찾아가 거기서 시를 배우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진보적 월간지 <길>의 기자로 지내던 박수정을 만난 것도 그 문학회에서였다. 96년 결혼한 이후 지금까지, 박수정은 그의 가장 믿음직한 동료이자 ‘삶의 멘토’이다. 10여년째 부부는 ‘여성노동자를 위한 글쓰기 교실’을 함께 꾸려가고 있다.
-문학에 본격적으로 입문을 한 곳이 구로노동자문학회 같은 곳이 아니었다면, 송경동의 시는 전혀 다른 유가 되었을까요? 시쳇말로 ‘운동권 만나서 운동권 시인 된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요?
“그러진 않았을 것 같아요. 그 당시, 90년대 초반에 ‘선진적 노동문학’이란 게 있었잖아요. 박노해 시인으로부터 죽 이어지는… 오히려 그런 문학에 전 거리감을 느꼈어요. 노동자 당파성, 전형성을 바탕으로 투쟁에 나서서 선진노동자로 변해간다는 얘기들이 노동문학의 주류를 이뤘죠. 그런 해방감을 느끼지 못하는 노동자들, 사회적으로 가장 천대받는 하층민이 가지는 연대의식과 간절함에 대해서 전 더 많은 얘길 하고 싶었어요. 따뜻한 말 한마디, 잠깐 껴안아주는 행위 하나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난 따로 배울 필요가 없었거든요.”
야참 사오는 신참 발소리가
안전계단을 철렁철렁 울리면
한참 두고 느긋하게 “어이! 참 먹세!” 하고
옆 조들을 불렀다. 정적 속
단내 나는 사람의 목소리가 사과향처럼 다디달아
“어이!” 하고
괜스레 한번 더 불러보았다.
(송경동, <어이!> 중에서)
-상당히 비타협적이고 전투적인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2011)에서 “해방은 내 안에서 오지, 밖에서 오지 않는다”고 쓰신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누구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한계와 모순과 무지와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투쟁한다”고 쓰셨던데요.
“‘지금까지 날 버티게 해준 힘이 뭘까?’ 생각해보면, 어쭙잖은 사회과학적 지식이나 전망이 아니더라고요. 그보다는, 더 나은 삶을 실현해 보려고 부단히 꿈꾸고 실천하는 친구들, 내 곁의 사람들이 젤 큰 힘이었어요. ‘나’라는 존재는 혼자 잘나고 똑똑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열망이 유기적으로 엮여서 만들어지는 거라는 걸 새삼 깨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패러디해 서울 광화문광장에 천막을 치고 지은 ‘궁핍현대미술광장’ 내에서 송 시인이 판화로 제작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국립현대미술관을 패러디해 서울 광화문광장에 천막을 치고 지은 ‘궁핍현대미술광장’ 내에서 송 시인이 판화로 제작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정권교체보다 중요한 건 개혁의 방향
-이번 촛불항쟁의 모든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속적으로 지켜본 ‘목격자’이신데, 이번 촛불집회의 가장 큰 특징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주목하는 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까?’ 하는 점입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분노도 있겠지만 일상 속에 누적된 분노와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해 나온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근래 나온 신조어들만 봐도, 헬조선, 엔(N)포세대, 흙수저, 자살공화국… 같은 것들이잖아요. 권력과 국가를 사유화해버리는 반민주, 불공정, 불평등에 대해서 사회적 분노가 터져 나온 건데, 앞으로 몇 번 더 폭발할 수 있을 만큼 그런 분노와 불만이 ‘내재’해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탄핵이 국회 표결에서 가결된 이후,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 석방하라’나 ‘박근혜의 노동 관련 법 제정에 반대한다’와 같은 노동계 요구에, 상당수 시민들이 무척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런 분노와 불만이 ‘내재’되어 있긴 하지만 ‘정제’되진 않았으니까요. 내 분노와 불만의 뿌리에 뭐가 있는지는 잘 살피지 않아서 그래요. 즉자적 분노에 사로잡혀서 박근혜 집단에 대한 사회적 단죄를 이룰 수는 있겠지만, 실제적인 사회의 변화, 삶의 변화로 가져가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우리가 바꾸자는 게 그냥 박근혜만 바꾸자는 겁니까? 1% 독점 특권사회는 더 이상 용납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평생 일해도 집 한 채 가질 수 없는 세상이, 박근혜 이후 세상이 되면 좋겠어요? 한상균 한 개인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박근혜 정권에서 자행되었던 정치공작 공안탄압에 대해서 국정조사를 실시하고 모든 양심수를 석방하라는 거예요. 더 이상 광장에 나오는 사람 숫자로 따지지 말자고요. 230만이 나왔는데 더 이상 어떻게 해요? 이제는 광장의 질적 전환, 의제의 확장이 이루어져야 해요.”
-새누리당이 갈라지고 여소야대 국회가 되었으니 일단 야당을 믿고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보수신당에서도 경제와 노동은 개혁노선으로 가겠다고 하는 상황이니까요.
“이렇게 큰 사회적 분노와 시민들의 진출이 있었는데 몇 가지 정책에서 입법적 진전은 있을 수밖에 없지요. 그 정도도 안 하겠다고 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을 테니까. 하다못해 조지 소로스도 ‘자본주의 4.0’을 이야기하고 조선일보도 ‘인간적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가야 한다고 나서는 판이니까요. 그런 말들은 정치권이 맨날 하는 레퍼토리예요. 박근혜도 경제민주화가 자기 공약이었잖아요. 이제 그런 눈 감고 아웅 하는 소리 말고, 1100만 비정규직 체제 없애겠다, 공공부문 민영화 사영화 폐기하겠다, 교육공공성 회복해서 서열경쟁 없애겠다, 노동3권과 표현의 자유 분명히 보장하겠다, 한반도평화체제를 위해 실질적 진전을 이루겠다… 뭐 이런 걸 얘기해야죠. 지금은 주권자들이 사회방향을 제시해서 국회를 강제해내야 하는 상황입니다. 탄핵소추안 가결도 그렇게 광장의 힘으로 이룬 성과잖아요.”
-새해 우리의 가장 큰 목표는 정권교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정권교체 되면 약간의 진전은 있을 수 있죠. 한데 안타깝지만 우린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거쳐봤거든요. 지금 같은 1100만 비정규직 시대로 전환되는 데 그들 정권도 포함되어 있어요. 삼성 공화국이란 말이 나온 것도, 부동산 투기 공화국이 된 것도 그 정권 때였어요. 보수세력이 발목을 잡아서 못한 거라고 하지만, 정권을 10년 쥐고서도 실질적으로 그다지 진전된 게 없었다는 걸 우린 경험으로 알고 있어요. 쌀 개방에 반대하던 농민 세 분이 여의도공원에서 공권력에 맞아 죽은 것도, 포항제철 비정규노동자가 백골단에 맞아 죽은 것도 그때라고요. 정권교체로 인해서, 민주주의 투쟁했던 사람들이 따뜻한 권력 중심부로 가는 것 말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어떤 진전이 있었는지 생각해봐야 해요. 누가 정권을 잡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실제로 어떤 정책, 어떤 의제가 중심이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 먼저 제시되고 그다음에 ‘누가 그걸 하겠다는 거냐?’는 물음이 던져져야 해요. 다시 말해서 광장의 요구를 정식화하는 게 먼저 이루어지고, 그걸 수행하겠다는 정치집단들을 견인하고 강제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길 아닐까요?”
그를 찾는 전화가 계속 이어지기 시작했다. 저녁 먹을 시간도 없이 바로 달려 나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물었다.
-2017년 새해에 가장 큰 개인적 소망은 뭡니까? 광장 얘기 말고 다른 건 없어요?
“집에 좀 가고 싶어요. 빨리 박근혜가 내려와야 갈 수 있을 텐데. 하하하….”
※광화문캠핑촌 후원 신한은행 110-467-235902 송경동
녹취 심지연
▶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