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아파트 반값 공급’을 공약으로 내세워 돌풍을 일으켰다. 자료사진
1992년, 고등학교 1학년 가을이었다. HR 시간에 자기가 미는 대통령 후보를 밝히고 일종의 지지 연설을 하기로 했다. 우리 반 모범생 친구가 김영삼을 지지했다. 김영삼을 지지하는 이유는 기억이 안 나는데 김대중이 ‘안 되는’ 이유는 분명했다. “김대중은 고속도로 뚫자는 것도 반대했고 88올림픽도 반대한, 반대만 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김대중을 지지한다고 했다. ‘수평적 정권교체’의 필요성 정도를 강조했던 것 같다. 또 다른 친구는 정주영 편이었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을 위해서”라고.
양김씨의 맞대결 판에 ‘제3후보’로 도전한 정주영 후보는 그해 겨울 16.3%를 득표하며 선전했다. 정 후보의 등장에 마음 졸여야 했던 와이에스는 분풀이 사정을 지시했고 정주영은 선거법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위반으로 법정을 들락거리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통일국민당 당사를 폐쇄하는 방식으로 짧지 않았던 ‘정치적 외도’를 끝냈다. 비정치인 출신 ‘제3후보’의 비극적 말로였다.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가 서울 명동거리에서 부인 박수애씨(오른쪽 두번째)와 함께 시민들에게 인사하며 손가락으로 기호 6번을 만들어 보이고 있다. 김종수 기자 jongsoo@han.co.kr
정주영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비정치인 대선 후보가 출현했다. 2007년의 문국현이 그랬다. 유한킴벌리 사장으로 직원들의 고용불안을 해소하고 환경운동에 투신한 ‘착한 기업인’ 문국현은 정주영보다 훨씬 ‘비정치적’이었다. 정주영은 1992년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그해 4월 총선에서 31석을 얻었고 그 여세를 몰아 12월 대선 출마로 정주행했다. 국회에 교두보를 마련한 뒤 제3당의 총재 자격으로 대선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문국현은 대선을 50일 앞둔 2007년 10월에야 창조한국당을 창당했다. 암만 봐도 물리적 시간이 촉박했지만 당시 정치부 기자로서 본 문국현은 자신감이 넘쳤다. “2개월 안에 인지도를 높일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선거일이 가까워져도 그의 인지도는 높아지지 않았다. 대선을 완주했지만 득표율은 5.8%. 이듬해 총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 이재오 의원을 꺾는 이변을 연출했으나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하며 정치판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안철수 대선후보가 지난 2012년 9월 28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고속버스터미널 호남선 승하차장에서 귀성객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2012년의 안철수는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전무후무한 형태의 ‘제3후보’였다. 안랩의 최고경영자로서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해 무료로 배포한 착한 기업인으로서 교과서에도 실렸지만, 한 번도 공적인 영역에서 과업을 수행한 적이 없던 그였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장관 기용과 국회의원·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제안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물론 정치권과 거리를 뒀던 참신함이 ‘안철수 돌풍’의 원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 경험이 부족했기에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도 서툴렀다. 민주당과 진심캠프 간 치킨게임이 계속되던 시점에 ‘예비후보 사퇴’라는 고독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포기를 ‘양보와 희생과 헌신’으로, 정치적으로 포장할 줄을 몰랐고 그래서 후보 단일화의 시너지도 내지 못했다. 비정치인 대선 후보의 한계였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6일(현지시각) 유엔 안보리 회의가 열리기 전에 뉴욕 유엔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의 4차 핵실험을 강력히 비난하고 있다. 뉴욕/신화 연합뉴스
2016년 새해 여론조사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후보 지지도 1위에 올랐다. KBS 조사에서 29.1%, <경향신문> 조사에서 21.9%,
여론조사에서 19.9%가 나왔다. 최소한 우리 국민 다섯 중 한 명꼴로 반기문을 유력한 대통령감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무렵 반 총장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한일 양국 정부의 위안부 합의를 축하했다는 사실이 청와대에서 흘러나왔다. ‘반기문 대통령-친박 총리’라는 이원집정제 개헌 구상은 더욱 그럴 듯했다. ‘반기문 대망론’이 실체를 가지고 꿈틀대고 있는 느낌이었다. 반기문은 1970년 외무고시 합격 이후 청와대 수석과 외교부 장·차관을 거치며 줄곧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온갖 욕망이 뒤섞여 격렬하게 갈등하는 정치판을 경험하지 못했다. 정치인이 아닌 관료, ‘외교 관료’였다.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연지동 여전도회관을 찾은 고건 전 총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 기자회견장에 내리려다, 지지자들이 앞을 막아서자 눈을 감은 채 착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반기문을 볼 때마다 머릿속에선 고건 전 총리가 떠오른다. 고건은 민선·관선 서울시장을 두루 역임하고 김영삼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총리를 두 번이나 지냈다. 참여정부 첫 총리를 지낸 뒤 한때 대선 후보 지지도 30%를 넘기기도 했다. ‘행정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안정감과 중도 이미지가 그를 유력한 대선 후보로 만들었다. ‘반 노무현’ 정서도 한 몫 했고 그도 계속해서 노무현 대통령과 각을 세웠다. 2006년 11월, 대학 특강에 나선 그를 취재하기 위해 안동까지 동행한 적이 있다. 그때 특강 내용을 기사로 찾아보니 김대중의 햇볕 정책은 찬양하고 이를 계승한 노무현의 포용 정책은 비판하는, 앞뒤가 안 맞는 내용이었다.(관련 기사 : 고건, DJ-노 틈새 전략 http://me2.do/FKFg9mbZ) 서울에서 안동까지, 다시 안동에서 서울까지 하루를 꼬박 함께 다녔지만 기억에 남는 건 별로 없다. 안동에서 안동소주를 뇌관 삼아 폭탄주를 돌렸는데 고령(당시 68살)임에도 술을 잘 마신다는 것 이외에는. 그해 12월 고건의 ‘디스’를 참다 못한 노무현 대통령이 “고건 총리 기용은 실패한 인사”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리고 고건은 한 달도 안 가 갑자기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의원들도 안 붙고 지지율은 떨어지고 대통령한테 욕먹는 상황을 돌파할 권력의지가 그에게는 부족했다. 불출마 선언문을 읽고 황급히 캠프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도주나 다름없었다.
새해부터 반기문의 상승세를 지켜보고 있자니, 지난 연말 ‘김보협의 더정치’ 공개방송에 출연한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의 말이 생각났다.
“영웅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양김처럼 짠 하고 나타나서 해결한 분. 두번째는 싸우다 죽어요. <사막의 라이언>의 앤서니 퀸이나, 노무현 대통령도 그럴 수 있어요. 장렬하게 전사하는 거죠. 그래도 영웅은 되는 거야. 내가 뜻은 못 이뤘지만 내 뒤에 오는 누군가가 이거 이뤄줄 거다. 세번째는 첫번째 짠하고 나타났다가 작살이 납니다. <취권>에서 성룡이 나타났다가 무지하게 깨져요. 산속에 들어가 수련을 막 해. 단련돼서 나타나 악을 물리치는. 이런 버전도 있어요. 모세가 출애굽할 때 애굽에서 나약한 지도자였는데 40년 단련 받아서 출애굽 시켜요. 문재인·안철수도 처음에는 작살이 난 거죠. 다시 한 번 내공을 쌓아서 나아질 수 있는지 지켜보자는 겁니다. 문재인이든 안철수든 유승민이든 이런 정치적 시련을 겪으면서 올라오는 것이고 주문하자면 본인들 내공이 강해지는 것보다 중요한 건 대한민국 국민들이 절망하는 지점 하나를 돌파하는 분이 지도자가 될 겁니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자. 그러지 않으니 정당도 약해지고 정치인도 안 나와요. 맡겨두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정하고 성장합니다. 정치적 결정은 실존적이기에 정치인이 결정해야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도자는, 아니 대통령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지적에 동의한다. 테러당하고 단식하며 죽을 고비를 넘겨도 불굴의 의지로 싸울 수 있어야 하고(김영삼·김대중), 떨어지고 떨어져도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온몸을 던질 줄 알아야 한다(노무현). 반대자의 비판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밀어붙이고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는 강철 멘탈(이명박·박근혜)도 필요하다. 그래서 난 ‘반기문 대망론’에 회의적이다. 꽃가마를 타는 영웅은 없기 때문이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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