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9일 서울 종로구 계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가냘픈 한 여성이 이렇게 외쳤다.
“말할 자유, 모임의 자유를 송두리째 부정당할 암흑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이 대한민국을 독재국가로 후퇴시켰다.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할 저의 마지막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 그는 정당 해산 이후 1년 넘게 근신하고 있었다. 사실 ‘당을 지키지 못한 대표’라는 주홍글씨를 단 그는 갈 곳도, 만날 사람도, 또 할 말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도 모두 거절했다. 그동안 뭘 하고 지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살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죽어 있었다’는 처절한 표현이다. 이 전 대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아들과 모처럼 많은 시간을 가지면서 격정적으로 흘러간 지난 몇 년을 반추 내지 복기했다. 그 복기 결과를 <진보를 복기하다>(들녘)라는 책으로 엮었다. 이 책은 통합진보당이 추진하다 실패했던 정책, 13개 법안을 소개하고 있다. 통합진보당이라는 몸뚱이는 ‘공안몰이’에 해체됐지만, 추구했던 정신을 골라 모은 것이다. 피지 못한 소중한 새싹들이다. 그는 “당이 해산됐다는 것만 기억하고 무엇을 하려 했느냐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이 책을 쓴 동기를 말했다.
이 중에는 비정규직을 없애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관한 특별법’, 노동자에게 작업 중지권을 부여하고, 사망자가 발생하면 사용자를 엄히 처벌해 산업재해를 근본적으로 뿌리뽑을 ‘기업살인 처벌법’ 등이 있다. 이는 경영상 위기가 아니어도 ‘저성과자’라는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하고, 기간제 사용기간을 연장하고, 파견노동자를 확대해 비정규직을 대폭 늘리는 현 정부 기조와는 정반대다.
“이명박근혜 정권의 노동정책이 하나씩 노동자들에게 불리하게 바뀌는 것도 문제지만, 근본적 문제는 이 흐름이 장기집권 전략의 일환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극우정권의 재집권을 위해 저항세력을 사전에 억누르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은 산별노조 무력화가 특징이었다면, 박근혜 정권은 노동자를 개별적으로 모는 것이다. 전교조 법외노조화는 ‘해고된 사람 구하지 마라, 너희들도 죽는다’는 논리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근본(단결)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다.”
통합진보당이 추진했던 법안 중에는 ‘국가정보원법 전면개정법률안’이 있다. 국정원이 불법으로 대선에 개입한 것이 드러난 2013년 국정원을 해외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대테러와 국제범죄조직의 해외정보 수집과 배포, 기밀보안업무만 부여하는 법안을 발의한 것이다. 그는 이 법안에 대해 “국정원을 이름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거의) 해체하겠다는 방안까지 제시한 유일한 법이었다”면서 “정말 어렵게 발의했는데 발의하자마자 닥친 것은 국정원의 내란음모 조작 역풍이었다”고 말했다. 국정원을 개혁하려는 법안이 당을 해산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이 13개 법안이 시행됐으면 “정치공작은 종말을 고할 것이며, 거수기 국회의원은 소환당할 것이며, 권력은 비로소 시민의 손에 되돌려지게 될 것이며, 적대의식과 종북몰이를 불러온 전쟁은 끝을 맺고 평화의 신념은 존중될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1969년 서울 봉천동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재래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1987년 서울대 법대에 진학해 1990년 총여학생회장에 당선됐다. 대학 시절 동두천 기지촌에서 만난 소녀를 보고 여성운동에 참여했고, 1996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고서도 주한미군범죄에 매달렸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과 복지위원장으로 활동하다 2007년 3월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18대 국회의원으로 2009년 민주노동당 대표로 피선됐고, 2011년 11월 통합진보당을 만들면서 공동대표가 됐다.
그의 복기는 2012년 5월 분당사태로 이어졌다. 그는 “되돌리고 싶은 순간, 허위의 공격에 중앙위 폭력사태만이라도 무릎 꿇어서 막았더라면 지금의 결과가 이렇게 참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피아노도 잘 치고 노래도 잘 불렀는데, 이 사건 이후 “음악을 잃었다”고 말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분당의) 근본적인 원인은 통합진보당을 만들며 서로 마음을 열고 배려하고 협력하는 통합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기서 불신이 싹트고, 이것이 갈등의 원인이 되고, 그 과정에서 대표였던 내가 제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 폭력사태는 국민들에게 충격적인 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 것까지 감안해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었고, 그런 점에서 뼈아프다.”
최근 작가 고종석씨가 <경향신문>을 통해 그에게 공개편지를 썼다. 고씨는 편지에서 “스스로 부정을 저지른 국민참여당 계열(국참계) 당원으로 부정경선 책임을 뒤집어 씌웠고 국참계와 언론이 저지른 종북몰이에, 여론은 ‘사악한 이정희 대 정의로운 유시민’ 구도로 받아들였다”고 적었다. 2012년 경선부정의 주범은 국참계였으며, 국참계가 부정경선 사실을 숨기기 위해 당권파(민주노동당계)를 종북으로 몰았다는 것이다.
고종석씨 글을 읽어봤는가.
“(그는 웃을 뿐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경선부정 사태가 났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정치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진상조사보고서가 대단히 잘못된, 오류와 편견에 기초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누가 얘기해 준 것도 아니다. 혼자 봐도 오류가 너무 많았다.(그는 진상보고서의 문제점을 사례를 들어 한참 설명했다)”
정치적으로 살 길이란 무엇이었는가.
“만들어진 여론 있지 않은가, 이른바 ‘민주노동당 출신이 부정경선 주범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여론을 받아들여 거론된 사람을 잘라내는 조치를 했으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고서가 사실과 너무 달라 양심상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진실을 영원히 묻어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경선부정의 진실을 왜 효율적으로 알리지 못했는가.
“내가 꽤 자세히, 열심히 사실관계를 말씀드렸는데… 이미 선입견이 형성돼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변명이나, 책임 부정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여론재판이 참 빨리 끝나버리더라….”
통합진보당 경선비리에 대해 대검 공안부는 2012년 11월 문제의 이석기·김재연의 구속은커녕 입건도 못하고 오히려 국참계 인사들의 비리사실이 많음을 발표했다. 2013년 4월 2일 채동욱 검찰총장 후보자도 인사청문회에서 “이석기·김재연 의원에 대해 혐의점을 찾지 못했고, 개별적으로 부정투표를 하였지만 주모자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대부분 언론은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경선 비리의 진실을 알지 못했고, 심지어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도 이를 정당해산 사유에 인용했을 정도다. 종북몰이 광풍에 진실이 뒤죽박죽되고 정의가 물구나무선 세상이다.
최근 북한의 핵실험과 위성 발사, 이에 맞선 개성공단 폐쇄와 대규모 군사훈련으로 남북상황은 긴장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를 얘기하는 사람은 종북 취급을 받는 분위기가 됐다. 진보진영에서는 이 ‘천형’ 같은 종북몰이, 종북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말한다.
“김남주 시인이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종북몰이를 겪어보니 38선이 자신의 머리에 있더라. 정권의 부당한 공격에 ‘내가 먼저 맞서겠다’고 나서야 극복될 것이다. 그래서 정부의 정당해산청구, 정말 이기고 싶었다.(그는 억지로 눈물을 참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이기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체념과 무력감을 줬다. 죄송하다. 그런데 방법이 무엇인지는… 음음음.”(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자가 ‘종북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인가?’라고 재차 독촉했다. 이에 그는 “무슨 황금열쇠 같은 것이 있어서… 하하하”라고 얼버무렸다. 그는 웃었지만 웃는 것이 아니었다.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그래 종북이다 어쩔래?’라고 정면승부하자는 주장도 많고, ‘우회하자’, ‘아예 잠수하자’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성적 대처’를 얘기한다.
“‘내가 종북이라면 너는 종박이냐’고 대응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적어도 우리의 대응은 다른 수준이어야 한다. 종북이라는 얘기에 대꾸할 필요조차 없다. 종북이라는 말은 굉장히 비하적 요소가 깔려 있다. 이미 종북이라는 표현이 명예훼손이라는 법원 판결도 받았다. 사회의 자각과 정치인들의 태도변화가 매우 중요하다.”
결국 ‘종북몰이는 정치에서 비롯된 것이니 정치로 풀어야, 정치로 승부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그는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다시 뭉치는 것을 억누른다고 억눌러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나는 실패했지만, 다른 분들이 힘을 갖추려는 노력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본인은 정치일선에 나서지 않겠다는 뉘앙스로 들린다. 이에 대해 그는 “내가 미래에 무엇을, 어떤 것을 할 수 있을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서 “큰 흐름에서 역사는 누군가에 의해 진보하고, 거기서 개인에게 주어지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진보정치의 밑바탕으로 통합진보당 지지세력이었다. 민주노총은 4월 총선을 앞두고 ‘2016 총선공동투쟁본부’를 만들었다.
“민주노총은 여전히 진보정치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주역이 국회에 들어가 명망 있는 정치인이 되는 순간, 노동자들이 만들어 낸 정치인이 아니라 보수언론에 휘둘리는 정치인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 노동운동에서 진보정치에 대한 실망감이다. 흔들리지 않는 진보정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 간단치는 않지만 앞으로는 과거와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최근 발기한 민중정치연합에도 기대를 하고 있다. 그는 “청년들이 워낙 경쟁으로 내몰리고,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상태에서 이런 청년들의 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현존하는 정당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분들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진보를 복기하다>에서 “노동자와 농민, 시민들의 손에 스스로 세상을 바꿀 도구를 쥐어주는 것이 진보정치 본연의 의무”라고 썼다. 그는 “당장 무엇을 꼭 해야 되겠다는 계획은…(말끝을 흐렸지만) 언제 어디가 됐든 진보정치의 가치를 계속 추구하는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너무 딱딱한 얘기만 해서 마지막으로 ‘요리 잘하세요?’라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그는 “아, 된장찌개 한 번 끓여드려야 하는데”라며 “그런데 맛은 기대하지 마세요”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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