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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February 15, 2016

박근혜가 싸울 때, 시진핑은 "천하대장부!" [유라시아 견문] 신상태 : 중국과 중동의 상호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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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태 

새해 첫 달, 세계 경제가 휘청했다. 유가는 하락하고 주가는 폭락했다. 표적은 둘이다. 중동 산유국의 파산을 전망하고, 중국의 경착륙을 우려한다. 그러나 공히 허언이고 실언이다. 흑심마저 담겨있는 교활한 언사이다. 

유가는 시장의 논리만을 반영하지 않는다. 국제 정치와 지정학이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이번에는 산유국과 미국의 셰일 업계 간 치킨 게임이 치열하다. 사우디가 선봉에 섰다.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셰일 산업을 주저앉히고 석유 시장의 지배권을 미국에서 사우디로 탈환하려든다. 

당장의 재정난도 감수키로 했다. 대응책으로 국영 석유 회사 아람코의 주식 일부를 상장한다. 아람코는 총자산 10조 달러, 세계 최대의 석유 회사이다. 상장은 국제 부문의 5000억 달러 정도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애플이나 구글에 버금가는 규모이다. 이로써 재정 적자 2년치를 메울 수 있다는 것이다. 향후 1~2년간 셰일 업계와 저유가 경쟁을 지속하겠다는 뜻이다. 

정작 위기는 셰일 업계로 옮아갈 듯하다. 이미 만성 적자로 허덕인다. 그 적자를 정크펀드에 의존해 버텨왔다. 셰일 업계가 무너지면 미국의 사채 시장 전체가 위험해진다. 그래서 무리를 거듭하여 자금 회전을 지원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유가가 지속되면 달리 수가 없게 된다. 

내년(2017년) 여름까지 미국 석유 회사의 3할이 도산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셰일 업계는 절반 이상이 파산할 수 있다. 사채 시장의 붕괴는 주식과 채권 시장에도 직격탄이다. 리만 브라더스 사태 이상의 금융 붕괴를 촉발할 수도 있다. 그 후 유가는 다시 60달러 선으로 회복할 것이라는 것이 사우디의 예측이다. 믿는 구석이 있다. 일대일로가 진전한다. 아메리카를 대신하여 유라시아에서의 수요가 늘어날 것이다. 

중국은 주가 폭락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경착륙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단기 수익에 연연하는 투자자(와 투기꾼)들의 호들갑이다. 월가의 입김에 놀아나는 언론들도 덩달아 아우성이다. 그러나 중국 위기론은 30년째 반복되는 돌림노래이다. 정작 중국 주식 시장에서 외국 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5%도 안 된다. 

주식 계좌를 가지고 있는 중국인들 또한 2억에 못 미친다. 실제 거래 계좌는 1억 안팎이다. 즉 실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고, 국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지 않다. 주식보다는 예금의 규모가 훨씬 더 크다. 저축액이 GDP의 절반에 이른다. 차고 넘치는 외환 보유고에 금까지 넉넉하다. 

즉,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같은 사태가 중국에서는 일어날 수가 없다. 2008년 미국식 금융 위기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금융이라는 가상 경제가 실물 경제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금과 주식 모두 중국 당국이 큰 손이다. 외부의 작전에 대응할 정책적 수단이 다양한 것이다. 

중국의 제조업 지수가 낮아진 것도 위기의 징후라 잘라 말하기 어렵다. 구조적 이행의 지표에 가깝다. 2015년은 중국 경제에서 서비스 분야가 제조업을 앞지른 첫 번째 해였다. 비중이 50%를 넘어섰다. 중국에 공장을 두었던 기업의 상당수가 동남아시아나 남아시아로 이전한다. 즉 중국이 생산 기지에서 소비 시장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소비와 서비스, 첨단기술이 향후 중국 경제를 이끌고 간다. 그래서 실업률은 도리어 줄어든 것이다. 소비할 수 있는 인구가 더 늘고 있다는 뜻이다. 

중국은 현재 중산층만 6억이다. 미국 인구의 2배이다. 2015년부터는 한 자녀 정책도 폐지했다. 여력이 있는 집부터 둘째를 가질 것이다. 그들이 성인이 되면 소비 시장은 더욱 커진다. 당장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들도 중국에 사활을 걸고 있다. 애플, 아마존, 스타벅스, 맥도날드, 나이키 등 글로벌 브랜드의 신년 계획도 하나같이 중국 시장에 명운을 건다는 쪽이다. 페이스북의 최고 경영자도 거듭 중국어로 춘절을 축하한다. 향후 30년간 글로벌 소비 시장의 '중국화'는 불가역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즉 중국이 생산하고 세계가 소비했던 개혁 개방 이래의 '구상태'는 지나갔다. 세계가 생산하고 중국이 소비하는 '신상태'로 진입했다.

2016년은 '신상태'의 첫해로 기록될만하다. 13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되었다. 핵심은 역시 일대일로이다. 중국 경제의 병폐인 중복 투자와 과잉 생산의 거품을 덜어낸다. 1월 13일, 57개 창립국으로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AIIB)도 닻을 올렸다. 한 달 전(2015년 12월)에는 아세안의 경제 통합체로서 AEC(아세안 경제 공동체)도 출범했다. 21세기 해양 실크로드를 통하여 중화 세계와 만다라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되어간다.

여기에 더해 시진핑 주석은 1월 19일부터 23일까지 중동을 방문했다. 새해 첫 해외 순방으로 사우디와 이집트, 이란을 선택한 것이다. 사우디는 7년, 이집트는 12년, 이란은 14년만이었다. 중국과 중동의 상호 진화, 중화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재)통합에도 박차를 가한다. 비단 중국만이 아닌 것이다. 유라시아 전체가 '신상태'로 진입 중이다. '다른 백년'의 恒産(항산)을 지어간다. 

신형 국제 관계 

중동 순방에 앞서 중국의 아랍 정책을 총괄하는 백서가 발표되었다. 1월 14일자 <인민일보>에도 공개되었다. 중동에서 발을 빼는 미국을 대신하여 중국의 관여(Engagement) 정책이 본격화된 것이다. 에너지 합작, 고속철도 건설, 문화와 교육 교류, 인민 외교 등 다방면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공익과 공영에 기초한 신형 국제 관계를 통하여 중동의 평화를 재건하겠다는 뜻이다. 장차 유엔(UN) 개혁, 기후 변화 등 지구적 현안에 대해서도 아랍 국가들과 보조를 맞춘다고 한다. 

첫 방문지는 세계 최대의 산유국 사우디였다. 유가 하락에 고심인 사우디에 거액의 구매를 선사했다. 대중국 석유 수출을 위한 인프라 건설도 합작한다. 장차 결제 통화는 달러가 아니지 싶다. 미국 금융 패권의 핵심이었던 '오일-달러'의 공식을 무너뜨려가는 것이다. 중국과 사우디는 양국 관계를 '전면적 전략 동반자'로도 격상시켰다. 아무래도 미국의 맹방이었던 20세기의 사우디는 차츰 잊어가도 좋을 것 같다. 

다음 행선지는 중동 최고의 군사 강국 이집트였다. 마침 '아랍의 봄' 5주년이었다. 중동의 민주화라는 장미 빛 전망이 허위이고 기만이었음이 날로 명확해지고 있다. 곳곳에서 국가 붕괴와 내전이 이어졌다. 이 혼돈과 혼란으로 이집트는 돈줄까지 메말랐다. 공항에 홍등까지 켜두고 시진핑을 맞이한 연유이다. 유/무상 경제 지원은 물론이요 지지부진하던 신행정 수도 건설도 돕기로 했다. 마침 양국 수교 60주년이었다. '중국 문화의 해'을 선포하는 개막식에도 시진핑이 직접 참석했다. 

중동 순방의 정점은 이란이었다. 중동의 대국 이란이 국제 사회에 복귀한다. 그 첫 손님이 바로 시진핑이었다. 하산 로하니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하고, 최고 종교 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도 접견했다. 성과 속의 지도자를 두루 만난 것이다. 세속의 지도자는 곧바로 유럽을 방문하여 세일즈 외교에 분주했지만, 영적인 지도자는 '서방을 결코 믿지 않는다'며 여전한 불신을 드러냈다. 

립 서비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냉전기 CIA의 정권 전복이 처음으로 성공한 나라가 이란이었다. 탈냉전기에도 '악의 축'이라며 '체제 전환'을 호시탐탐했다. 2월 11일 이슬람 혁명 37주년 기념행사에서도 '반미'와 '반이스라엘' 구호는 여전했다. 미국의 패권에 굴복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균열을 내갈 것이다. 이란산 석유 역시 유로로 결제해야 한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이란은 관건적인 장소이다. 일대(육로)도 통과하고, 일로(해로)도 지나간다. 실은 서방의 경제 제제 기간에도 중국은 이란과 우호적 관계를 지속했다. 이란의 시장 개방으로 더욱 전면적인 관계 증진에 나선 것이다. 양국의 합작으로 '신중동'의 초안을 마련해간다. 시진핑이 강조한 것은 누천년의 역사이다. 중화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으로 거슬러 오르는 오랜 우정을 상기시켰다. 양국은 에너지, 산업, 철도, 항만, 신기술, 관광 등 17개 분야에서 계약을 체결했다. 지속 기간은 25년이다. 2040년까지 비단길의 부활을 약속한 것이다. 

백미는 카이로에서 열린 아랍연맹 본부에서의 기조 연설이었다. 중국이 중동의 '균형자'가 될 것을 천명했다. 마침 사우디와 이란의 국교 단절로 알력이 심해지던 시점이었다. 수니파와 시아파 간 경색 국면에서 중재자의 자세를 취했다. 시리아 내전 해결에도 가담하고 있다. 12월에는 정부 대표단을 접견하고, 1월에는 반정부군을 접촉했다.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삼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지지도 밝혔다. 요르단, 레바논, 리비아, 예멘에도 인도주의적 지원이라며 돈 보따리를 풀었다. 중동에서 전개되고 있는 중국식 '재균형'이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이래 중동은 유럽 제국주의의 안방이었다. 21세기에도 이라크 전쟁, 아프간 전쟁, 리비아 내전 등 미국의 군사적 개입주의의 볼모였다. 100년이 넘도록 화약고가 지속되는 근본적 까닭이다. 군사적으로 정복해서 경제적으로 착취한다는 서방의 논리가 지속된 것이다. 반면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와 테러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교조적 민주주의'와 '종교적 원리주의'가 악순환을 거듭한 것이다. 십자군 전쟁이 세속화되고, 근대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는 여전히 견원지간, 천년의 앙숙이다.

중국은 다른 논리를 제시한다. 정경 분리이다. 체제와 이념에 가타부타하지 않는다. 남들의 내정은 본체만체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일 뿐이라고 한다. 경제 교류를 확산시켜 새로운 국제 질서, 신형 국제 관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과연 중국이라 해서 유럽이나 미국과는 다를 것인가? 반신반의하는 아랍 지도자들에게 시진핑이 읊은 것은 <맹자>의 大丈夫(대장부)였다.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道與民由之, 不得志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천하의 넓은 집에 거처하고,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도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한다. 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이 절개를 변하게 하지 못하며, 위무가 지조를 굽게 하지 못하는 것, 이를 대장부라 이르는 것이다." 

새해 벽두부터 이슬람 세계에 천하대장부가 울려 퍼진 것이다.

ⓒnews.cn

중화 세계와 이슬람 세계 

중화 세계와 이슬람 세계가 늘 봄날은 아니었다. 첫 대면은 반목으로 시작했다. 시안에 거점을 둔 대당제국은 서역으로 팽창했다.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아바스 왕조는 동진을 거듭했다. 양 제국이 충돌한 것이 탈라스 전투(751년)이다.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정치적 경쟁이 군사적 충돌로 치달았다. 양대 제국의 알력으로 육상 교역로는 쇠퇴했다. 실크로드의 중심이 초원길에서 바닷길로 옮아간 것이다. 아바스 왕조도 대당제국도 해군은 부실했다. 인도양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바다였다. 드문드문 생계형 해적만 있었다.

해양 실크로드의 개척자는 상인들이었다. 아랍과 페르시아 출신들이 앞장섰다. 아라비아 해와 벵골 만을 엮고, 아랍의 바다를 중화의 바다까지 연결해내었다. 항해 기술과 선박 제조술도 날로 발달했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사람들의 이동도 늘어났다. 자연스레 지식과 문화의 교류도 증진되었다. 빈번하게 접촉하며 상호 이해도 증진되었다. 이슬람 세계와 중화 세계의 공존과 공영은 생활인들이 기초를 다진 민간 사업에서 출발한 것이다.

민간의 교류와 교역을 정치적 차원에서 통합한 제국이 몽골이다. 몽골 유목인들이 양대 세계를 융합했다. 1260년에서 1368년까지 두 세계가 하나의 하늘 아래 자리한 것이다. '팍스 몽골리카'라는 보기 드문 盛世(성세)였다. 칼리프(서역)와 칸(북방)과 황제(동방)가 통합되자 제국적 선순환이 작동했다. 관료와 지식인, 군인들의 순환 보직이 일반적이었다. 바그다드를 통치하다가 쿤밍으로 이직한 오마르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들을 따라 상인과 장인도 이동했다. 중국의 동남부 연안에 정착한 무슬림들은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의 무역도 촉진시켰다. 이들을 따라 화교들의 동남아 진출도 활발해졌다. 유라시아의 동서남북에서 상품과 지식과 인간과 생물의 교류와 교환이 정점에 달했던 시절이다.

그 황금시대의 산물 중 하나가 세계 지도이다. 유라시아를 하나로 그려낸 세계 지도가 속속 등장했다. 말미암아 중화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자기중심적 세계관도 일정하게 수정될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는 몽골세계제국의 외부에 자리한 서유럽까지 영향을 미쳤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그 증거이다. 이 책에는 실제로는 가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대한 서술도 적지 않다. 아랍어와 중국어로 축적된 사전 지식과 정보가 있었던 것이다. 즉 <동방견문록>은 몽골세계제국이 촉발한 유라시아적 지식을 집대성한 하나의 판본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합당하겠다. 

몽골세계제국이 해체되면서 이슬람 세계와 중화 세계는 다시 갈라진다. 티무르 제국과 명제국이 갈등했다. 호전적인 쪽은 티무르였다. 사마르칸트에 터를 두고 명의 정복을 시도했다. 반면 명제국은 중앙아시아로 진출하지 않았다. 남경을 수도로 삼은 한족 왕조는 유라시아 진출보다는 중화제국에 자족했다. 

그럼에도 몽골제국의 흔적은 여전했다. 정화의 대원정이 대표적이다. 바닷길의 이슬람 네트워크를 따라 수차례 동아프리카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아프로-유라시아를 담아낸 세계 지도도 편찬했다. 갓 건국한 조선에서도 세계 지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1402년)가 편찬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아랍의 바다와 중화의 바다가 밀물과 썰물처럼 오고갔던 인도양의 전성기가 유라시아의 동쪽 끝 반도까지 파고를 미친 것이다.

물론 중화 세계가 항상 화평했던 것만은 아니다. 이슬람 세계 또한 늘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응당 중화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교류 역시 훈풍만은 아니었다. 갈등과 대립의 삭풍도 있었다. 그럼에도 두 세계에 남아있는 기록과 여행기들은 상대방에 대한 호감과 호의가 주조를 이룬다. 무슬림 지식인들은 중국 장인들의 기술과 넓은 영토와 체계적인 행정 체제와 세련된 문화와 풍요로운 생활을 칭송했다. 중국의 지식인들 또한 이슬람 세계를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부유하고 세련된 교양인들이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한다고 말했다. 일부 전설과 환상에 기댄 바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사실에 바탕을 둔 상호 인식이었다. 풍문에 견문을 보태어 천년을 누적한 상호 왕래의 소산이었기 때문이다.

1498년, 고아(Goa)에 낯선 이가 도착한다. 기왕의 무슬림들과는 생김새가 달랐다. 리스본이라는 외딴 곳에서 왔다는 뜨내기였다. 이름은 바스코 다 가마라고 했다. 마침내 유라시아의 서쪽 끝 사람들도 인도양 네트워크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대수로이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차츰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19세기부터는 전혀 딴판이었다. 대양의 육지화, 군사화가 본격화되었다. 

지도의 성격 또한 크게 달라졌다. 민간 교류보다는 영토 정복이라는 국가적 어젠다가 투영되었다. 영토성이 연결망을 대신하고, 군사망이 상업망을 대체했다. 이슬람 세계와 중화 세계의 거개가 식민지로 전락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중화 세계는 분열되어 갔고, 이슬람 세계는 더 잘게 분할되어갔다. 이 과정을 문명화니 근대화니 우롱하는 프로파간다도 널리 횡행했다. 이 선전선동을 제도화한 학문이 바로 근대의 역사학이다. 진보(progress)의 대서사가 春秋(춘추)를 대체한 것이다. 

유라시아 대서사 

민족주의가 화급한 시대정신이 되면서 이슬람 세계와 중화 세계는 소원해졌다. 그러나 각자도생만으로는 온전한 독립국가가 되기도 힘들었다.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제3세계 운동을 함께 펼치며 양대 세계는 서서히 재결합한다. 이번에는 작가와 지식인, 정치인들이 앞장섰다. 토막토막 난 물류를 대신하여 문류부터 먼저 회복해 간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일대일로의 발진 또한 뜬금없는 돌발이 아니라고 하겠다. 20세기를 통하여 교감했던 정신적 연대의식에 육체성과 물질성을 부여해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특히 냉전기 신중국과 신아랍 간 연대와 교류의 역사는 일대일로의 초석이 되고 있다. 미국의 속국으로 태평양을 해바라기했던 한국은 그 남남(south-south)합작의 유산에 대해 도무지 까막눈이다. 인도양 세계와 이슬람 세계로 서진하면서 차차 복기해 갈 작정이다.

새해 첫 달, 유가와 주가보다 더 흥미로운 통계 지수를 접했다. 국제 해운 동향을 보여주는 BDI(Baltic Dry Index)가 그것이다. 사상 최저 기록을 연거푸 갱신 중이라고 한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오고갔던 선박 운항의 숫자가 급격히 줄고 있다는 것이다. 즉, 유럽과 아메리카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아시아와 아메리카도 멀어져 가고 있다.

반면 유럽과 아시아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서 인도양만 더욱 분주한 것이다. 인도양이 유라시아의 '內海(내해)'로써 공진화하고 있다. 마침 작년 12월 글로벌 운송 기업 DHL은 중국과 터키를 잇는 새로운 철도 연결망을 제출했다. 민간의 물류망 또한 일대일로에 호응하고 있는 것이다. 민관 합작으로, 고금 합작으로, 동서 합작으로, 유라시아를 만들어간다. 

ⓒdhl.com

이 유라시아의 대서사는 재차 春秋(춘추)에 더 가까울 것 같다. 봄이 가고 가을이 온다. 가을이 지면 봄이 온다. 문명의 교류에도 썰물이 있고 밀물이 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이다. 盛(성)과 衰(쇠)가 교차하고, 음과 양이 태극으로 운동한다. 하여 '역사의 종언'도 아닐 것이며, '문명의 충돌'만도 아닐 것이다. 春夏秋冬(춘하추동)의 대서사를 궁리해보고 있다. 

진보가 역사를 독점했던 20세기, 3중의 분단 체제가 있었다. 남북의 분단은 좌/우의 분단이다. 이념과 체제의 분단이었다. 전근대와 근대의 시간적 분단도 있었다. '고/금간 분단 체제'이다. 20세기를 전혀 딴 시절인 양 간주했다. 더불어 유럽과 비유럽 간의 공간적 분단도 있었다. 유럽과 그 외부를 별천지처럼 다루었다. 

'유라시아 대서사'는 이 시공간적 분단 체제의 극복과 해소를 지향한다. 유라시아의 동/서/고/금 간 회통을 꾀한다. 이 대서사에 남북 통일의 (소)서사도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대서사가 부재하기에 소소사가 갈피없이 표류하는 것이다. 大計(대계)가 없기에 小計(소계) 또한 부실한 것이다. 

과연 대안적인 유라시아의 거대 서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시시비비와 허허실실에 대해서는 뉴델리에서, 테헤란에서, 바그다드에서, 두바이에서, 카이로에서 거듭 묻고 따져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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