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3월 23일 밤 11시부터 새누리당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1) 23일 밤 11시가 되도록 공천관리위원회로부터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한 유승민이 대구 지역구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렇게 선언했다. “부끄럽고 시대착오적인 정치보복이다.” “공천에 대해 지금까지 당이 보여준 모습은 정의가 아니다. 진박, 비박 편 가르기만 있었을 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2) 23일 늦은 밤부터 24일 새벽까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건너편의 한 감자탕 집에서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 최고위원 서청원, 원내대표 원유철, 사무총장 황진하 등이 ‘술자리’를 가졌다. 거기 동석했던 제2사무부총장 박종희는 일행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글과 함께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심야 최고회의에서 격론과 고성이 오갔습니다만 격의 없이 화해하고 총선 승리를 다짐하는 자리였다. 김 대표와 원 원내대표는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고 소주잔을 주고받았다. 새누리당의 정치 잠재력을 볼 수 있는 자리였다.” ‘반박’인 김무성과 ‘친박’인 서청원·원유철은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불구대천의 원수들처럼 상대를 비난하고 공격했다.
▲ 23일 오후 대구 동구 용계동 사무소에서 새누리당 탈당 및 무소속 출마 기자회견에 앞서 지지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유승민 의원 뒤로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이 보이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3) 24일 오후 새누리당 공관위원장 이한구는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유승민 의원은) 우리 당을 모욕하고 침을 뱉으며 자기 정치를 위해 떠난 것”이라고 비난했다. “국회의원 한 번 더 하기가 인생 목표인양 생각하거나 내무반에서 서로 총질하는 그런 모습” “본인을 정치적 희생양 취급하는 것도 청산해야 할 구태정치”라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4) 김무성은 ‘감자탕 술자리’가 끝난 뒤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24일 오후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구동을의 유승민을 비롯한 5곳에 대한 공관위의 결정을 대표로서 의결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옥새 투쟁’을 선언한 것이다. 그는 “의결이 보류된 5곳을 무공천 지역으로 남기겠다”고 말했다. 낙천된 ‘비박’이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지역구에 새누리당 후보를 내지 않겠다는 뜻이다. ‘진박 대학살’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임이 틀림없다. 김무성이 서청원, 원유철 등 ‘친박’과 “격의 없이 화해하고 총선 승리를 다짐했다”는 박종희의 ‘보도’는 순식간에 무색해지고 말았다. 김무성은 ‘옥새 투쟁’을 선포한 뒤 직인을 들고 곧장 부산의 지역구로 내려갔다.
▲ 당 공천관리위원회의 공천안에 반발해 최고위원회의 소집을 거부한 김무성(오른쪽) 새누리당 대표와 설득에 나선 원유철 원내대표가 24일 오후 부산 중구 자갈치시장에서 만나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
5) 원내대표 원유철은 김무성의 ‘폭탄선언’이 나온 직후인 24일 오후 5시 사무총장 황진하를 통해 최고위원회 소집을 정식으로 요구했다. 회의에는 최고위원 서청원, 김태호, 이인제와 사무총장 황진하가 참석했다. 인터넷매체 노컷뉴스 24일자 기사(“김무성의 배수진은 ‘신의 한 수’··· 진박 총선 행 원천봉쇄”)는 이렇게 보도했다. “선관위에 새누리당 후보자로 등록을 하기 위해선 당인과 당 대표 직인이 날인된 공천장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김 대표가 입장을 바꾸지 않는 이상 5곳의 진박 후보는 총선 출마가 불가능하다.” 최고위원회의가 끝난 뒤 원유철이 발표한 5개 결정사항 가운데 결론 부분은 다음과 같다. “만약 김무성 대표가 끝까지 최고위 소집과 진행을 거부하면 당헌 제30조와 당규 제4조, 7주에 의거해 원내대표가 직무대행을 해 최고위를 개최하기로 한다.”
원유철은 24일 저녁 부랴부랴 부산으로 가서 중구 자갈치시장의 한 횟집에서 김무성을 만나 술잔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만남은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듯 보였지만 김무성은 최고위원회를 열어달라는 원유철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는 25일 서울로 가서 당무를 정상적으로 보겠으나 “최고위 소집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김무성이 기습적으로 일으킨 ‘반란’ 또는 ‘쿠데타’ 때문에 친박 최고위원들보다 더 격분한 사람은 어디 있는 누구일까?
이한구는 유승민을 공천에서 배제하는 근거를 댈 때마다 ‘한 의원’ ‘그분’ ‘본인’ 이라고 불렀다. 듣는 이들은 누구인지도 모를 추상적 인물을 지칭하는 것 같았다. 그는 유승민에 대해 이런 비판을 가했다. “(그분은) 꽃신을 신고 꽃길만 걸어왔다.” “텃밭에서 3선 기회 주고 늘 당의 요직을 줬다.”
이한구는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대우경제연구소 사장, 16~19대 국회의원으로 4선, 새누리당 전국위원회 의장과 공관위 위원장. 이런 경력은 “꽃신 신고 꽃밭을 걸은 것”도 ‘요직’도 아닌가? 이한구는 듣고 보는 이들에게 ‘씁쓸한 웃음’을 주는 데 장기가 있는 것 같다.
이한구가 앞장선 ‘유승민 죽이기’는 역설적으로 유승민을 유력한 ‘대권주자’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될 것 같다. 유승민이 대구동을에서 압도적인 표 차이로 승리한다면 ‘차세대 TK 지도자’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는 ‘탈당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 바 있다.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당 공천관리위원회의 결정에 반발해 유승민 의원 등 지역구 6곳에 대해 무공천을 선언해 갈등이 이어지고 있는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로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승강기에 올라 이동하고 있다.사진=포커스뉴스 |
“어떤 권력도 국민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원칙이 지켜지고 정의가 살아 있고 상식이 통하는 세상입니다. (···) 권력이 저를 버려도 저는 국민만 보고 나아가겠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이 길을 용감하게 가겠습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결코 멈추지 않겠습니다. (···) 오늘 저의 시작이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로 나아가는 새로운 걸음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새누리당 공관위가 ‘유승민 추방’을 극렬하게 밀어붙인 뒤 대구·경북에서는 박근혜 지지율이 폭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리얼미터가 24일 발표한 3월 4주차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긍정적 평가는 무려 11.5%나 떨어진 58.4%, 부정적 평가는 9.5%나 오른 35.5%였다. 유승민이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발표한 이튿날인 24일 코스닥 시장에서는 ‘유승민 테마주’가 일제히 크게 올랐다. 그가 박사학위를 받은 미국 위스콘신대 동문이 대표이사로 있는 대신정보통신은 전날보다 23.3%나 올랐고, 같은 이유로 ‘유승민 테마주’로 분류된 삼일기업공사도 17.65%나 상승했다.
3월 25일 아침 인터넷매체 머리기사에 달린 제목들은 으스스했다. “[총선 D-19 새누리 ‘무공천’ 초유 사태] 김무성 ‘당무는 복귀, 무공천 불변’ 친박 ‘대통령에 전쟁 선포’”(경향닷컴), “김 대표의 기습 쿠데타···‘대통령과 결별’로 승부수”(조선닷컴), “‘청(靑)과 돌아올 수 없는 강’ 건넌 김···승부수인가 무리수인가”(동아닷컴).
김무성의 이번 ‘거사’는 그동안 비틀걸음을 계속해오며 ‘줏대 없는 정치인’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그가 대권주자로서 단호한 자세를 보이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박근혜와 ‘친박’의 압박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유승민과 김무성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크게 다를 것이다. 유승민이 무소속으로 출마한 뒤 ‘친유연대’를 결성한다면 더욱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유승민이 새누리당 출신으로서 ‘합리적이고 따뜻한 보수적 대선 후보’가 될는지 여부를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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