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2002년 방북 후 유럽-코리아재단 4년간 활동 문건 입수
“14년 전의 일이다. 지나간 일에 대해서 제 입으로 기억 난다 안 난다 말하기는 그렇다. 제가 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난 2012년 6월 이후 VIP(박근혜 대통령)를 만나거나 접촉한 일체의 사실이 없다.” 3월 21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지동훈 전 유럽-코리아재단 이사장이 한 말이다.
<주간경향>은 2002년 박근혜 당시 한국미래연합 대표이자 유럽-코리아재단 이사의 방북 이후 4년간 유럽-코리아재단의 활동을 담은 문서를 입수했다. 문서에는 그동안 국내 언론을 통해서는 거의 공개되지 않은 재단의 활동 정황이 담겨 있었다. 총 29페이지 분량의 이 문서는 북측의 모처에 재단 측의 ‘요망사항’을 정리하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문건에는 ‘유럽-코리아 재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련 사업 현황’, ‘유럽-코리아재단 지원금 현황’, 그리고 2004년과 2005년 재단이 선발해 영국·독일·스웨덴 등지에 장학생으로 보낸 북측 학생 명단, 남측에서 접수한 용천역 참사 후원물품을 평안북도 인민병원에 기증한 영수증, 그리고 박근혜 당시 유럽-코리아재단 이사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주고받은 서신 등이 첨부되어 있다. 서신은 2002년 방북의 후속사업으로 추진되었던 보천보전자악단 서울 공연 추진 상황에 대한 의견교환을 주로 담고 있다. ‘한국미래련합 박근혜 녀사’와 북측이 주고받은 편지도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다.
<주간경향>은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부터 2002년 방북에 관한 추적기사를 써 왔다. 방북은 유럽-코리아재단 이사의 자격으로 이뤄졌지만 재단의 활동이나 방북 경위, 이후의 활동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2012년 대선 시점을 앞두고 재단이 속해 있던 주한유럽연합상공회의소(EUCCK)는 해산했고, 대신 다른 유럽연합상공회의소(ECCK)가 만들어졌다. ECCK 관계자는 <주간경향>에 “EUCCK와 우리는 전혀 무관한 조직”이라고 밝혔었다. 서울 을지로4가에 자리 잡고 있는 EUCCK는 그 후 ‘국제공정무역 인증기구’로 활동의 방향을 바꿨다. 유럽-코리아재단의 명맥은 현재도 유지되고 있지만 과거의 활동기록은 현재 인터넷 상에서는 삭제되었다. 유럽-코리아재단의 인터넷 페이지에 접속하면 “Fairtrade Korea는 유럽-코리아재단에 의해 운영된다”고 돼 있지만, <주간경향>이 이번에 입수한 문건에서 밝히고 있는 사업들을 비롯해 과거 남북관계와 관련된 활동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시 방북과 관련해 경위 등을 밝히고 있는 것은 방북 직후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 그리고 2007년 출간한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 한 챕터로 실린 내용이 거의 전부였다.
박 대통령의 2002년 방북 경위가 1차 논란을 일으킨 때는 2006년이다. 시기적으로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당내 경선에서 이명박 당시 후보 측과 경쟁이 시작될 시점이었다. 당시 개설되었던 박근혜 의원 개인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던 방북기에는 “오찬 뒤 ‘평양 8경’ 중 2경이 있는 모란봉과 김일성 주석 생가가 있는 만경대 관광길에 나섰다. 비는 계속 오고 있었다”고 적혀 있었다. 2001년 방북한 강정구 당시 동국대 교수가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를 방문해 ‘만경대 정신’ 방명록을 남긴 사건과 대비해 만약 박 당시 이사가 만경대를 방문했다면 어떤 글을 남겼을지 논란이 일었다. 이 문구는 “오찬 뒤 ‘평양 8경’ 중 2경이 있는 모란봉을 찾았다. 비는 계속 오고 있었다”로 수정되었다. ‘김일성 주석 생가가 있는 만경대 관광길’은 삭제되었다. 당시 박근혜 의원 홈페이지 관리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위의 내용 중 논란이 되었던, “오찬 뒤 ‘평양 8경’ 중 2경이 있는 모란봉과 김일성 주석 생가가 있는 만경대 관광길에 나섰다”고 되어 있던 기사는 잘못 작성된 것이었습니다. 기자에 의해 당일 수정되었던 (수정) 기사의 내용으로 수정하였습니다. 관리자가 처음 작성되었던 기사를 그대로 인용하였는데, 수정된 기사의 내용을 반영하지 못해 논란을 제공한 점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2006.11.7.”
금수산궁전 방문 의혹 지속되는 이유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대통령의 방북 행적은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번에는 방북 당시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을 방문했는지 여부를 두고 벌어졌다.
2002년 방북 당시 박근혜 이사와 동행했던 3인 중 한 명이었던 신희석 아태정책연구원 이사장은 한 비공개 친목카페에 2002년 방북이 이뤄진 경위와 방북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만찬에서 오간 대화 내용 등을 공개했었다. 회고담 형식으로 된 이 방북기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다음 부분이다. “우리들 두 사람(박근혜 당시 의원과 신 이사장)은 그들의 안내를 받고 최고인민회의, 인민문화궁전, 금수산기념궁전(?)(편집자 주: 물음표나 이하 xx는 신 이사장이 남긴 것), 주체탑, 모란봉 소년소녀xx?, 김일성대학, xx병원, 봉제공장 등 다양한 시설을 견학·시찰하였다.” 이 ‘회고담’에 적힌 방북 행적은 지금도 수정되지 않고 남아 있다.
비록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과거 남북 정상 간의 접촉에서 금수산기념궁전의 방문은 남북 간 의전에서 초미의 쟁점이었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 펴낸 회고록 <피스메이커>를 보면 2000년 김대중-김정일 남북 정상회담 당시에도 금수산기념궁전의 방문을 두고 막후에서 팽팽한 논란이 벌어진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두 정상의 감격적인 상봉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난제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하나는 바로 대통령의 금수산궁전 방문 문제이다. 영빈관으로 오는 길 내내 나는 혹시라도 김 위원장이 갑자기 금수산궁전으로 방향을 바꿔 김대통령도 어쩔 수 없이 김일성 주석의 유해에 참배하도록 만들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임동원, <피스메이커> 81쪽)
금수산기념궁전 방문 문제는 임 전 장관의 책에 따르면 협상 마지막 날까지 걸림돌이었다.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직후, ‘목란각’에서 진행된 김대중 대통령 주최의 만찬장에서 김정일 위원장은 임동원을 불러 귓속말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그는 책에서 적고 있다. “…지금 이곳으로 오는 차 안에서 대통령께 ‘금수산궁전에는 안 가셔도 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임 원장이 이겼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해 방북 남측 관계자들, 그리고 2002년 박근혜 등 유럽-코리아재단 관계자들이 묵은 장소는 백화원이다. 백화원은 평양 미암동에 자리 잡은 금수산기념궁전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초대소다. 구글이 제공하고 있는 인공위성 지도를 보면 금수산기념궁전 왼쪽에는 김일성 종합대학의 캠퍼스가 있고, 우측 바로 아래에 백화원이 있다. 실제 2000년 방북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도 백화원에 묵으며 금수산기념궁전을 방문했다. 김정일이 사망해 이곳 1층에 안치된 뒤(김일성의 시신은 2층에 있다) 금수산기념궁전은 금수산태양궁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6·15선언이 추진된 비사를 담은 임 전 장관의 책에서 이후 진행된 박근혜 대통령의 방북과 관련해 언급되어 있는 대목은 없다. 다만 이 ‘금수산기념궁전’ 참배 문제와 관련해 김정일 위원장이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은 눈길을 끈다. “어쨌든 나(김정일)의 서울 방문 문제를 벌써부터 논의하는 것은 시기상조이지만,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먼저 서울을 방문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게 하겠습니다. 물론 나도 서울을 방문하면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자신도 남한을 방문하면 박정희 묘소를 참배할 테니 김대중 대통령도 김일성 시신을 참배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2002년 방북 논란’에는 북측도 개입한 모양새였다. 대선을 앞두고 북측은 인터넷을 통해 ‘박근혜 녀사의 평양 방문 2002년 5월 11일~14일’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공개한다. 약 20분18초 분량이다. 방북 당시 3박4일 일정의 ‘하이라이트’를 기록한 이 영상에서는 신희석 이사가 언급한 금수산기념궁전 방문과 관련한 영상은 들어 있지 않다. 가능한 해석은 두 가지다. 박 대통령 측이 주장한 대로 방문하지 않았거나, 향후를 대비한 카드로 공개하지 않은 것이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이나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 당시 북측이 집요하게 금수산궁전의 참배를 요구한 것으로 보면 박근혜 이사장의 방북 당시에도 참배에 대한 권유 내지는 압박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까지 관련한 ‘증언’은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고 있다.
“제가 가서 실수하지 않으려면…”
“방북 전에 박근혜 의원의 요청으로 배석자 없이 단 둘이 강남의 르네상스 호텔에서 만났다. 그때 박 의원의 질문을 듣고 ‘아, 이것은 정치적 퍼포먼스에 불과하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3월 24일 <주간경향>과의 통화에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말이다. 그는 박근혜 당시 유럽-코리아재단 이사의 방북 때 통일부 장관이었다. 정 전 장관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들었던 첫 질문은 ‘제가 어떻게 하면 정부에 도움이 될까요’라든가 ‘어떻게 하면 남북관계에 디딤돌을 하나라도 놓을 수 있을까요’가 아니라 ‘제가 어떻게 하면 가서 실수를 하지 않는 걸까요’였다. 그 질문을 듣고 확실한 목적의식을 갖고 방문하는 것은 아니구나 하고 느꼈다.” 정 전 장관의 조언은 ‘말조심’이었다. “그쪽에서 여러 가지 부탁을 하면 ‘예, 예, 알아보겠습니다’라고 해야지, ‘연구하겠습니다’, ‘검토하겠습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나중에 약속했다는 식으로 뒤집어 쓸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간경향>이 입수한 유럽-코리아재단의 대북사업 문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참고자료로 제시되어 있는 ‘한국미래련합 대표 박근혜녀사’ 앞으로 보내는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의 편지와 그에 대한 미래연합 대표와 유럽-코리아재단 이사 직함을 병기한 박근혜 명의의 답신 편지다. 북측이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녀사께서 10월 15일부로 보낸 편지를 11월 2일 베이징에서 재중동포 강향진 녀성으로부터 접수하였습니다.” 내용은 보천보전자악단의 서울 방문 공연을 11월로 예견하고 준비하던 중 준비시간상 여의치 않다며 내년(2003년)으로 미루는데 12월 초에 관련한 실무접촉을 갖자고 유럽-코리아재단 장 자크 그로아 이사장이 제안했는데, 그 내용이 박근혜 이사가 보낸 10월 15일자 편지와 내용상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아울러 북측은 “보천보전자악단의 서울 방문 공연 시기와 관련해 녀사의 정확한 의향을 알고 싶다”며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녀사와 직접 련락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그에 대한 의견도 답신으로 요청했다.
이에 대한 ‘박근혜 이사’가 보낸 11월 13일자 답신은 “귀 위원회에서 보내주시는 모든 서한은 잘 받아보고 있다”며 보천보전자악단 공연 연기와 관련, “실무접촉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이뤄졌으면 한다”고 간략히 답변하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서신 전달 재중동포 강 여인은 누구일까
서신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여러 부분이다. 우선 이번에 입수한 유럽-코리아재단의 문서에 첨부되어 있는 다른 대북문서가 팩스로 보낸 것과 달리 박근혜 당시 이사의 편지는 제3의 인물을 통해 인편으로 북측에 전해졌다는 점이다. 둘째로, 북측이 기술한 강향진이라는 재중동포의 존재나 역할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점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북측에서 굳이 서신의 전달 경위를 밝힌 점은 실제 박근혜 이사를 대리해 나타난 이 인물이 실제 박근혜 대표를 대리한 인물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의도와 함께, 가급적이면 유럽-코리아재단의 틀을 거치지 않고 직접 ‘한국미래연합’이라는 정당의 박근혜 대표와 창구를 만들려했던 목적으로 보인다. 유럽-코리아재단의 당시 지동훈 이사장은 이와 같은 서신을 주고 받았던 과정에 대해 “전혀 기억에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문건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재단이 “북조선 우수학생들의 장학사업을 준비하여 구라파에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구라파 대학들과 협력관계를 맺고 2004년부터 지원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 점이다. 문건에는 장학프로그램의 수혜대상 학생들의 명단 역시 참고자료로 첨부되어 있다. 2004년부터 2005년 12월까지 총 9명을 영국 노팅엄대학(4명)·독일 테에프하대학교(2명)·스웨덴 칼슈타트대학(3명)에 보냈고, 다시 2005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는 영국 노팅엄대학에 3명, 독일 데겐도르프대학에 2명, 스웨덴 칼슈타드대학에 3명, 프랑스에 2명·중국 노팅엄대학교 링보 캠퍼스에 10명 등의 장학생을 보냈다. 문건에 따르면 이들에게는 1년간의 학비 및 생활비, 왕복 항공권 일체가 지급됐다. 이와는 별도로 ‘조선 고위관료 해외시찰 프로그램’으로 약 60~80명을 보내는 계획 역시 문건은 밝히고 있다.
첨부된 유럽 유학생 명단을 보면 유학을 보낼 당시 20대가 중심이지만 40대나 50대 초반의 학생도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예를 들어 독일 데겐도르프대학에 2005년 8월부터 유학할 것으로 되어 있는 김철수는 1965년 생으로 김일성종합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뒤 전기공학을 전공하길 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같은 대학에 유학한 리국철은 1972년 생으로 역시 물리학 전공자다. 16년이 지난 지금, 이들 해외유학파 엘리트들은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주간경향>은 문건에 첨부된 유학생 명단과 지난해 통일부가 발간한 <2015 북한 주요기관·단체 인명록>을 정밀 대조했지만, 유럽 유학 뒤 북한의 초급 당간부로 오른 이는 딱히 찾을 수 없었다. 앞서 언급한 ‘리국철’이나 ‘김철수’등의 이름이 가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주간경향>의 요청으로 유학생 명단을 검토한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영국이나 중국에 유학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경제학이나 경영학, 국제경영학, 회계학 등을 공부해 현재 내각, 특히 대외경제성에서 경제관료나 무역 관계자로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며 “전기공학을 공부한 유학생도 있는데, 이런 전공자들이나 내각 경제관료도 장·차관급이 아니면 북한 언론매체에서 거의 거론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현재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유럽이나 중국에서 유학한 북한 학생들이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의 경제개혁과 개방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고 덧붙였다.
“전혜영 임신으로 보천보악단 서울공연 연기”
문건에서 보천보전자악단의 서울공연이 무산된 경위와 관련해서 “인민배우 전혜영의 임신으로 1차 연기되었다”는 언급도 눈길을 끈다. 전혜영은 ‘휘파람’ 등의 노래로 한국에서도 알려진 인사다. 북한 최고의 여가수로 1992년 인민배우 칭호를 얻은 전혜영은 한때 보천보전자악단의 다른 단원과 함께 숙청설이 한국 매체들을 통해 돌았지만, 2012년 11월 재일교포 매체인 <조선신보>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서 성악지도교원으로 일하는 전혜영의 인터뷰 기사를 실어 눈길을 끈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2002년 방북에 대한 논란은 현재까지 지속되는 이슈다. 2013년 박 대통령 당선 이후 비선실세 의혹이 있던 정윤회씨의 평양 동행설 등을 주장한 조웅 목사는 대통령 취임 며칠을 앞두고 인터뷰 도중 전격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2002년 방북 사진과 함께 “‘김정일 장군은 믿을 만한 파트너’ 고무찬양 의혹, 박근혜도 국가보안법 철저히 수사하라!” 등의 문구가 들어간 전단을 제작했던 박성수씨 역시 지난해 대구지검에 의해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되었다. 박씨는 <주간경향>과 통화에서 “전단의 내용과 관련해 거주하고 있던 곳(전북 군산)에서 별 문제 없다고 무혐의를 받은 것을 다시 대구지검에서 문제 삼아 구속한 것”이라고 밝혔다.
<주간경향>이 입수한 문건에 첨부된 이 서신들의 교환은 당국 허가 아래 진행되었을까. 비록 제3의 인편을 통한 간접접촉이라고 하더라도 통일부의 승인 없이 진행된 일이라면 남북협력 기본법 위반이다. 이에 대한 <주간경향>의 확인 요청에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은 “당시 관련 서류들을 검토해 보면 ‘서신 전달’ 명의로 2002년 10월 10일부터 11월 10일까지 주민접촉 승인이 난 기록이 있다”고 밝혀 왔다. 그런데 <주간경향>이 입수한 박근혜 당시 이사의 답신 발송일은 11월 13일이다. 재차 확인 요청에 통일부 사회문화교류과 관계자는 “서신 전달건과 별도로 그해 6월 18일부터 12월 31일까지 북한 축구대표단과 보천보악단 초청문제 협의를 명목으로 승인을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실정법 위반으로 판단되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주간경향>이 입수한 문건은 2000년 6·15선언 이후 각계각층의 교류가 봇물처럼 터지던 시기에 작성된 문건이다. 박 대통령은 2014년 3월 독일 드레스덴을 방문한 자리에서 남북 주민의 인도적 문제 우선 해결, 남북 공동번영을 위한 민생인프라 구축, 남북 주민 간 동질성 회복 등의 내용을 담은 ‘드레스덴 선언’을 발표했다. 학계나 통일 관련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드레스덴 선언이 성공적으로 이행되려면 그 전제로 “이명박 정부 시절,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을 계기로 이뤄진 5·24조치의 해제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은 개성공단 폐쇄에 이어 남북 간 적십자 핫라인까지 단절되어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전으로 남북관계 퇴보’라는 현재의 상황으로 이어졌다. 남북의 강대강, 벼랑끝 대치는 과연 해소될 수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의 2002년 방북이 주목을 받았던 또 다른 이유는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중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북의 최고수뇌부를 만난 ‘경험’을 가진 유일한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태우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의 집권 후반기 어젠다는 남북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5·24조치를 단행했던 이명박 정부도 임태희 전 노동부 장관을 특사로 파견, 싱가포르 등지에서 비공개 물밑접촉을 했다. 이를테면 최연혜 코레일 사장을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선정한 것은 “기차를 타고 유럽 여행을 가는 것이 어릴 적부터의 꿈”(2007년 1월 27일 일기)이라고 밝힌 박근혜 대통령이 대륙횡단열차와 같은 집권 후반기 남북관계 개선 프로젝트의 일환에서 나온 포석은 아닐까. “사실상 개성공단 폐쇄 이후 남북관계 개선 여지는 없다.” 정세현 전 장관의 말이다. 정 장관은 “남북철도 연결사업의 경우 이미 2006년 시점에 연결공사는 끝난 상태”라며 “개성공단 폐쇄를 바꿔야 할 만한 국제정세 변화도 없고, 그동안 임기 중 했던 대북조치나 발언으로 볼 때 자신의 말을 스스로 뒤집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고 덧붙였다.
주한유럽상공회의소는 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세무조사를 받았을까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10년치 자료를 털었다. (왜 세무조사가 있었는지) 제 추론을 말씀드린다면 파장이 있을 것이니 말을 안 하고 싶다. (‘대표와 이사장직을 그만둔 시점이 왜 하필이면 대선을 앞둔 시점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내(지동훈)가 왜 감옥에 안 갔을까. 사실 얼마나 험난했겠는가. 결론적으로 깔끔했으니(감옥에 가지 않은 것이다).” 2014년 10월 당시 기자와 접촉한 전 EUCCK 공동대표·유럽-코리아재단 이사장은 말을 아꼈지만 뭔가 할 말은 남아있다는 여운을 남겼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사를 맡았던 유럽-코리아재단은 EUCCK에 설치된 기관이었다. EUCCK는 왜 하필이면 대선을 앞둔 시점에 세무조사를 받았고, 해산하게 되었을까. 지동훈 이사장은 여전히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언제부터, 어떤 경위로 유럽-코리아재단의 이사를 맡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박근혜 이사가 그만둔 시점과 관련해서 지 이사장은 이번 취재에서 “대선을 앞둔 2012년 9월 시점에 그만뒀으며, 다른 개인적인 직함들과 함께 신분적인 서류 정리 차원에서 사퇴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외국인 신분으로 박근혜 이사와 같이 북한을 방문했던 장 자크 그로하는 이사장을 그만둔 이후 프랑스로 출국해 현재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장 자크 그로하는 독특한 경력을 가진 프랑스인으로 국내 언론에 소개되어 왔다. 1980년대 약 7~8년간 북한 체류 경험을 거쳐 다시 2001년부터 한국에서 EUCCK 소장과 이사장을 맡아 활동했었다. 북한 체류 당시 그가 북에 반입된 외국서적을 검열하고, 김일성과 김정일 저작집 등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평양 외국문출판사에 근무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2014년 지 이사장은 <주간경향>에 “장 자크 그로하가 북한 생활의 에피소드를 다룬 책을 썼는데, 경향신문사에서 출판해보면 어떠냐”는 제안을 했지만 이 제안은 추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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