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경을 엄벌하겠다는 것은 대통령의 약속이었다.
단 한명만이라도 살아돌아오라는 국민들의 바램이 분노로 바뀌며 무책임한 정부로 향하던 때였다. 박 대통령은 진도체육관을 방문한 4월17일, 해경의 소극적 구조작업에 항의하는 가족들 앞에서 “조사할 것이고 원인규명도 확실하게 할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반드시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했었다. 세월호 침몰 한달여 뒤인 5월19일엔 전국민이 TV를 지켜보는 앞에서 “해경은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며 해경은 해체하고 관피아와 민관유착에 대해 엄중한 처벌을 하겠다고도 했다.
그리고 해양경찰은 간판을 바꿔달았다. 꼬박 6개월간 ‘해경 해체’라는 굿판을 벌인 후 국민안전처 산하의 해양경비안전본부로 자리를 바뤘다. 그러나 떠들썩한 모양새와 달리 ‘해체’는 처음부터 없었다. 간판만 바뀌었을 뿐 조직도 사람도 유지됐다. 원래 국민들이 요구했던, 구조 방기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처벌도 없었다. 오히려 이들 해경 책임자들은 줄줄이 승진을 거듭하고 있다.
▲ 2013년 12월 발간된 ‘해양경찰 60년사’에 등장했던 현직 지휘부. 사진제공=416연대 부설 세월호참사진상규명 국민참여특별위원회 |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해경 본청의 주요 책임자들은 김석균 해양경찰청장과 최상환 차장, 이춘재 경비안전국장, 여인태 경비과장, 고명석 대변인(장비기술국장), 이용욱 정보수사국장, 황영태 상황실장 등이다. 서해청엔 김수현 서해지방해양경찰청장과 유연식 상황실장, 이평현 안전총괄부장이 있었다. 그리고 김문홍 목포서장과 이명준 청와대 치안정책관(파견)이 해경의 주요 책임자로 꼽힌다.
김석균 청장은 2014년 11월 국민안전처 출범과 동시에 해경청장직을 퇴임했다. 해경청장은 경찰청장과 달리 2년 임기제도 아니어서 그의 퇴임은 경질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았고 실제 이후의 행보도 ‘반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등을 통해 학술총서를 내거나 고향인 하동에서 강연을 다니는 등 훗날을 준비하고 있다.
애초에 해경에선 더 올라갈 자리가 없었던 김 청장 이외에 다른 책임자들은 어떻게 됐을까? 이춘재 당시 경비안전국장은 2015년 7월 남해해양경비본부장을 거쳐 2015년 12월29일 해양경비안전조정관 전담직무대리로 올라갔다. 현재 해경의 ‘넘버2’로 불린다. 이춘재는 김석균 해경청장을 비롯한 해경 수뇌부의 구조 방기 행태에 대한 실질적인 열쇠를 쥔 인물이다. 그는 여인태 본청 경비과장으로부터 승객 상황에 대한 중대 보고를 받고도 퇴선명령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123정’엔 문자상황보고시스템이 없음에도 이 시스템을 통해 지시를 전달해 혼선을 초래했다.
이춘재는 세월호가 이미 45도를 넘어 계속 기울어 있고, 선내에 승객들이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을 여인태 경비과장으로부터 들었다. 세월호 청문회에서 그는 이같은 사실을 김석균 청장도 “안다”며 “(김석균 청장과)같이 있었다“고 답변했다가, 이후 ”정확하게 모르겠다”고 말을 뒤집었다.
이춘재에게 123정으로부터의 중대 보고를 전달했던 여인태 본청 경비과장은 지난해 1월 여수해양경비안전서장에 취임했다. 여인태는 김경일 123정장의 현장보고를 듣고도 퇴선명령이나 선내 집입 지시를 하지 않았다. 그는 감사원 조사에서 “상황처리에 있어 상황 지휘를 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은 제가 독단적으로 직접 123정에게 선내 진입하여 탈출하라는 등의 지시를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된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대부분의 승객이 선내에 남아있고 배가 계속 기울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도 이같은 상황을 다른 곳에 전파하지도 않았다.
세월호 참사 당시 대변인을 맡았던 고명석 장비기술국장은 그해 11월 국민안전처 대변인으로 자리를 옮긴 뒤 2015년 12월29일 치안감으로 승진해 서해해양경비안전본부장(서해해경청장)에 올랐다.
▲ 왼쪽부터 조형곤 목포해경 상황담당관, 이춘재 해경 본청 경비안전국장, 유연식 서해해경 상황담당관. 사진=이치열 기자 |
그는 세월호 침몰 사흘후인 4월19일 “현재 계약된 ‘언딘’이라는 잠수업체는 심해 잠수를 전문적으로 하는 구난업자”라며 “전문성은 해경과 해군보다 더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때는 해경이 언딘의 리베로호가 도착하기 전까지 언딘 협력업체의 미니 바지선인 ‘2003금호’호를 현장에 알박기했던 시점이다. 이 알박기로 인해 구조수색 작업은 빈번히 중단됐다. 이후 5월초 언딘은 자신들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언딘은 구조업체가 아니다”라며 “사고 초기에 구조가 완료됐다고 해서 인양하기 위해 현장에 임했다”고 고백했다.
황영태 본청 상황실장은 2015년초 제주해양경비안전본부 1505함장을 거쳐 올해 1월 3002함 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황영태는 세월호 침몰 당일 “6천톤짜리가 금방 침몰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해 승객 구조를 위한 골든타임을 놓쳤다. 본청 상황실장이었던 그는, 세월호가 선수만 남기고 침몰한지 2시간여가 지난 오후1시 해수부 등이 전원구조와 같은 의미의 ‘350명 구조’라는 동떨어진 상황전파를 한 데도 책임이 있는 인물이다.
침몰 당시 청와대 사회안전비서관실 행정관으로 파견됐던 이명준 총경은 올해 1월8일 서귀포해양경비안전서장에 임명됐다.
해경의 고위 책임자들중 세월호 참사로 해임된 것은 김수현 서해해경청장 뿐이다.
반면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안전총괄부장이던 이평현은 제주해양경비안전본부장이 됐다. 그는 사고 첫날 수사본부장을 맡았고 범정부사고대책본부로 확대된 이후엔 수사부본부장이었다. 그는 16일 밤 언딘측과 해경의 합동회의를 마친뒤 진도체육관으로 가서 가족들에게 “우리는 언딘만 믿습니다.”라며 사태 초기 국면을 구조 실패로 몰아갔던 인물이다. 그는 수사초기 선원들을 해경의 집과 모텔 등에 투숙시킨 의혹과 관련해서도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이다.
서해해경청 상황담당관이었던 유연식은 동해해경서 5001함장을 거쳐 지난해 7월 완도해양경비안전서장에 취임했다. 그는 “세월호에서 승객 퇴선 여부를 묻는데 어떻게 해야되느냐”는 진도VTS센터의 전화를 받고 “퇴선 여부는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선장이 판단할 사항”이라고 했다. 그는 상황파악도 하지 않고 퇴선 책임을 선장에게 떠넘겨버렸다. 감사원은 유연식이 “진도VTS 센터가 홀로 세월호와 교신하도록 내버려두어 세월호와 구조 본부 및 구조 세력 간 직접 교신을 통해 사전 구호 조치를 지시할 기회를 일실하였다”고 지적했다.
김문홍 목포해경서장은 국민안전처 서해해양경비안전본부 기획운영과장으로 갔다가 동해해양경비안전서 1513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서장은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123정이 속한 목포해경서장으로 최초의 현장지휘자였지만 현장으로 가지 않았고 부적절한 지시로 혼란을 가중시켰다. 감사원은 징계의결서에서 김문홍이 “이미 조치했던 원론적 내용에 불과”한 조치들을 명했고 “현장 지휘를 태만히 했다”며 해임을 요구했었다.
최상환 해경 차장은 현재 재판이 진행중이어서 직위해제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이용욱 정보수사국장은 세월호 참사 이후 국제협력관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다른 해운비리 사건에 연루돼 해임됐다.
<도움주신 분=‘416연대 부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국민참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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